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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62화 (362/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62화

“……일단 이 작품 저 작품 연기하면서 얼굴을 알려야 더 큰 영화에서 큰 배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대본이면 작은 배역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 배역을 연기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서준이 무명의 아역 배우라고 착각하고 있는 민희경과 솔직한 슈퍼스타 이서준의 대화가 조금씩 엇갈렸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죠. 연극이랑 드라마에서도 찾아보고요.”

할리우드에서 들어오는 대본까지 있으니 그렇게 찾기 힘든 일은 아니라고 마음 편히 생각하는 슈퍼스타와 이렇게 태평하다가 얘 주인공도 한 번 못해보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민희경이었다.

“선배님! 잠시만요!”

“어. 그래!”

3학년 감독이 1학년을 불렀다. 3학년 감독의 말을 들은 1학년이 서준을 불렀다. 서준이 3학년 감독에게로 향하고 민희경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3학년 감독과 배우에게 연기 시범을 짧게 짧게 보여주고 있는 서준은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서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서준을 보고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인정받는 연기력인가 보다.

그런데도 아직 무명이라니.

‘잘하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는데…….’

저런 배우가 무명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희경은 주머니 속에 숨겨진 송곳을 자신이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렇게 연기를 좋아하고 빛나는 배우와 함께 촬영하고 싶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뭐야?”

조언을 하고 돌아온 서준에게 민희경이 물었다.

“좋아하는 영화요?”

“응. 네가 연기했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영화.”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아주 옛날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영화와 드라마, 연극을 넘나들었고 배역의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민희경은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듯 귀를 기울였다.

“근데 갑자기 영화는 왜 물어보셨어요?”

“네가 연기하고 싶을 만한 대본을 적어보려고.”

오.

감독의 말에 서준이 눈을 빛냈다.

“그럼 저야 좋죠!”

“근데 도통 공통점이 보이질 않네.”

“전 재미있으면 다 좋아요.”

“그 재미가 문제지. 생각보다 많이 까다롭다, 너. 고전부터 최근작까지…… 명작이란 명작은 다 나왔잖아.”

“아하하하.”

민희경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민희경도 웃고 말았다.

아. 좋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언제였는지.

“좋은 대본 써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무명이라 힘들어도 연기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말고.

걱정스러운 민희경의 눈빛에 고개를 갸웃한 서준이 이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서준은 어떤 대본이 나올지 궁금해진 상태라 즐겁기만 했다.

잠시 후.

민희경과 서준의 조언으로 순조롭게 흘러간 촬영이 모두 끝나고 아이들은 하나둘 장비를 정리했다. 서준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나도 오늘 즐거웠어. 다들 조심해서 가.”

꾸벅 인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민희경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이 시끌벅적 웃고 떠들며 사라졌다.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던 민희경이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던 찰나,

“으아악! 이름이랑 연락처 안 물어봤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절규했다.

* * *

영화제작사, 단홍.

서준이 단종을 연기했던 영화 [역逆]을 만든 제작사는 오늘도 평소와 같이 회사로 들어온 대본과 시놉시스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 잔뜩 쌓인 작품들 중 흥행할 만한 작품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진짜 요새 결말은 다 이런 식이네요.”

“원래 유행이라는 게 그렇잖아.”

[생존자들-감독판]이 플러스+에 업로드된 이후로 나온 캐릭터들이 다 죽는 결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한 번이면 몰라도 계속 보니까 이젠 처음 읽을 때부터 다 죽겠구나, 한다니까요.”

한 직원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루하긴 하지만 비슷비슷한 대본들 속에서 찬란하게 빛날 작품을 찾는 게 일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눈과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직원이 새로운 대본을 집어 들었다. 수정될지도 모르는 제목은 흘려보고 시나리오 주인의 이름을 살폈다. 시나리오의 주인이 감독이나 작가냐에 따라서 제작사에서 할 일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네. 민희경?”

낯선 이름을 보니 배우 혹사, 일정 무시, 배우나 스태프에 대한 갑질 등 함께 일하기 어려운 감독들을 구분해 놓은 단홍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본도 보지 않고 단번에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던 [역逆]의 우정한 감독처럼 이름 있는 감독도 아니었다.

일단 시나리오의 주인이 감독이기 때문에 시나리오에 맞는 감독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민희경 감독의 실력이 영 별로면 시나리오를 사서 새로운 감독에게 맡겨야겠지.’

하지만 감독이나 연출은 두 번째.

가장 중요한 건 대본의 내용이었다.

“대본 먼저 볼까.”

직원이 첫 장을 넘겼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직원의 시선이 주인공의 나이에서 멈추었다.

18살.

그 숫자를 빤히 바라보던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사무실을 나서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

“아, 창고 좀.”

열여덟, 열여덟.

중얼거리며 창고로 향하는 직원의 모습에 동료가 고개를 갸웃했다.

창고로 향한 직원은 여기저기 놓여 있는 상자들을 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고 어제 직원들이 살펴본 대본들이 든 상자를 열었다. 이 창고는 영화 제작 기준에 미치지 못한 작품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열여덟 살. 열여덟 살. 언제 봤는데…….”

직원은 이틀 전, 삼 일 전, 그리고 그 전날까지의 대본들을 살폈다. 첫 장을 넘겨 주인공의 나이를 확인하고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오! 여기 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의 상자에서 찾던 대본을 발견했다.

“감독 민희경. 역시 같은 감독이었네.”

대본을 챙겨 창고를 나온 직원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직원이 두 대본을 살폈다. 같은 감독이었지만 제목이 달랐다. 첫 장을 읽어보니 주인공은 바뀌지 않았지만, 등장인물들이 추가되었다. 소개도 조금씩 달랐다.

두 개의 대본을 펼쳐 놓은 직원의 행동이 궁금했던 동료가 물었다.

“뭘 가져온 거야?”

“아. 이번에 들어온 대본을 어디서 본 것 같아서 창고에서 찾아왔어.”

“그걸 다 기억해?”

쉴 새 없이 들어오는 대본을 기억하는 직원의 행동에 동료가 놀라 물었다. 직원이 웃고 말았다.

“그럴 리가. 감독 이름도 기억 못 했는데…… 그냥 주인공 나이가 기억에 남더라고.”

“나이?”

“열여덟 살이야.”

“오…… 그거…….”

꼭 누군가를 노린 것 같은 나이가 아닌가.

단번에 이서준을 떠올린 동료를 알아챈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대본은 별로더라고.”

“그래?”

보통의 재미만 있어도 [검토] 상자에 들어간다. 그러면 다른 직원들도 읽어봤을 텐데 자신이 읽어보지 못한 걸 보면 많이 별로인 모양이었다. 흥미진진하던 동료의 얼굴에 김이 조금 빠진 듯했다.

“근데 일주일 만에 수정해서 보냈나 봐.”

“일주일이라…….”

많은 내용을 수정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읽어보려고? 내용은 수정 전이랑 비슷한 거 아니야?”

“등장인물도 좀 많아진 것 같고 소개도 꽤 흥미로워서 말이야.”

“글쎄. 시나리오 작가가 붙은 것도 아니고 같은 감독인데 얼마나 바꿨을지…….”

대본을 읽기 시작하는 직원을 본 동료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일을 이어나갔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동료가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직원은 아직도 대본을 읽고 있었다. 다른 감독의 대본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재미가 없었다면 술술 넘기다가 상자에 넣어졌을 텐데 한 문장 한 문장 열심히 읽고 있었다.

동료가 책상 위에 있는 예전 대본을 가져왔다.

첫 장을 넘기고 캐릭터들의 소개를 읽고 첫 장면을 읽어 내려갔다. 으음. 좀 집중하는가 싶더니 슬렁슬렁 종이가 넘어갔다. 다 알 것 같고 지루한 이야기였다. 왜 검토 상자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것도 그렇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수정한 시간은 겨우 일주일.

영화의 신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별로였던 대본이 썩 나아질 것 같지는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 직원이 대본에서 눈을 뗐다. 동료가 기다렸다는 듯 얼른 물었다.

“어때?”

“엄청난데?”

“나쁜 쪽으로?”

“좋은 쪽으로!”

크게 뜬 직원의 눈과 큰 목소리에 동료가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직원에게서 받은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와 종이를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진짜 영화의 신이라도 만난 건가?”

고작 일주일.

환골탈태라도 한 것처럼 확 달라진 작품에 감탄한 영화제작사 단홍이 움직였다.

* * *

민희경이 긴장한 얼굴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눈앞에 놓인 커피는 손도 대지 못했다.

연락이 올 때까지만 해도 어디선가 새어 나간 정보에 걸려온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는데 진짜 영화제작사, 단홍의 사무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첫 상업영화 제작사는 단홍처럼 큰 제작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첫 데뷔를 하는 신인 감독처럼 손이 떨렸다. 아니, 마음은 마냥 들떠 있을 신인 감독이 더 편할지도 몰랐다.

한 번 망해봐서 현실을 충분하다 못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알고 있는 민희경이 축축하게 젖은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시나리오를 팔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단홍이라면 자신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했을 거다.

‘내 첫 작품도 보고 독립영화들도 봤겠지.’

시나리오는 마음에 들지만, 연출은 마음에 안 들어 할지도 몰랐다.

민희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나가야지.’

여기가 아니라도 제작사는 많았다. 그곳이 과연 좋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아예 독립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독립영화라도 장편이라면 돈이 많이 들었지만, 민희경은 꼭 만들고 싶었다.

주인공도 이미 정해놓았다.

연기를 사랑하는, 검은 모자를 쓴 배우.

민희경은 그 배우와 함께 이 작품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한강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이야기를 수정해 나갔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아이디어를 쥐어짜고 소년이 좋아한다던 작품들을 보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 정도의 명작을 쓸 자신은 없으니 그저 열심히 쓸 수밖에 없었다.

부디 자신의 시나리오가 소년의 마음에 들어서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연락처도 모르지만 말이야…….’

민희경은 너무 어이가 없어 허탈한 듯 흐흐흐 실소를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름도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았던 멍청한 저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애들도 그렇지…… 왜 선배님, 선배님만 부르고 이름을 안 불렀던 거야…….’

그거야 사람 많은 한강 공원에서 서준의 이름을 부르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일부러 3학년 감독이 서준을 직접 부르지 않고 1학년에게 시킬 정도로 조심한 것이었지만 민희경은 전혀 알지 못했다.

민희경이 서준에 대한 힌트를 하나라도 더 떠올리기 위해 끙끙대고 있을 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이번 제작을 맡게 될 기획팀장과 직원들이 밝은 얼굴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민희경 감독님.”

“아, 안녕하세요.”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회의는 부드러운 회의 속에 진행되었다.

민희경 감독의 걱정과는 달리 제작사 단홍에서는 감독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약 사항에 관해서 설명을 듣고 제작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촬영을 위해 정한 장소들이 있는지, 원하는 촬영감독이나 미술팀이 있는지 묻는 기획팀장의 말에 민희경 감독이 대답했다.

“그럼 감독님들은 저희가 알아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척척 진행되는 상황에 민희경 감독도 한결 마음 편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이번 영화는 잘될 것만 같아 마음이 들떴다.

“아, 민 감독님. 혹시 주인공으로 생각한 배우가 있으십니까?”

기획팀장의 말에 환하게 웃던 민희경 감독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민희경 감독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직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서준이겠죠?”

“맞습니다. 나이도 18살로 딱 맞고. 이 이야기라면 이서준 배우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이서준 배우랑 찍으면 흥행은 확정이죠!”

“투자금도 걱정 없고!”

“플러스도 당연히 투자하겠죠?”

“당연하지. 거긴 제일 먼저 갈 거야.”

기획팀장마저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민희경 감독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대본을 수정하던 일주일 내내 떠올렸던 검은 모자를 쓴 배우.

이미 민희경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 속 모든 이미지에는 그 소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새 코코아엔터에 대본을 보내자고 결정 내리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에 민희경 감독은 다급해졌다. 만약 이서준 배우가 출연하겠다고 결정 내리면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막상 이서준 배우가 캐스팅되면 흔들릴 것 같았다.

소년을 생각하며 적은 내용이니 소년이 연기해 줬으면 했다.

‘그렇다고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애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고!’

초조해진 민희경 감독이 외쳤다.

제발 그 애가 정보에 빠삭하고 한강에서 잠깐 만났던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오디션 보면 안 될까요?!”

민희경 감독의 외침이 회의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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