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61화
연기와 작품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서준은 [우리 동네]의 감독인 민희경에게 [우리 동네]에서의 좋은 점과 좋지 않았던 점을 술술 설명했다.
“6년 전이라면 오버 더 레인보우가 개봉했을 때네요. 그 해엔 무난무난한 느낌의 영화가 많아서 강렬한 결말이 인상 깊게 남았을 거예요.”
당시의 유행과 전개의 속도감 등을 예로 들어가며 조곤조곤 설명하는 서준의 말에, 민희경은 마치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라면 이렇게 연기했을 거예요. 그러면 관객들도 캐릭터에 공감하기 더 쉽거든요.”
배우라는 자기소개가 거짓이 아닌 듯, 배우와 관객의 시선이 적절하게 섞인 서준의 평가를 들으며 6년 전 자신의 작품을 되돌아보던 민희경이 속으로 감탄했다.
‘얘…… 그때 초등학생 아니었나?’
민희경이 첫 작품을 개봉하고 사람들을 평가를 듣고 나서야 후회하고 깨달았던 점들을 당시 초등학생이었을 이 아이는 영화를 봤을 때부터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망한 영화를 말이다.
‘요즘 애들 대단하네.’
이런 애가 아직 무명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아역 배우 붐이라더니.’
제작사 직원의 말이 민희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본을 쓰느라 몰랐는데 요즘은 이 정도의 지식과 보는 눈이 없으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출연한 작품도 모르는, 우연히 만난 아역 배우가 이 정도인데 이서준이나 김주경 같은 유명한 아역 배우들은 어느 정도일까.
‘엄청 대단하지 않을까?’
민희경의 아역 배우에 대한 기준이 급속도로 상승했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아역 배우들이나 황금세대라고 불리는 미리내 예고 연기과 아이들이 알았다면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을 생각이었다. 이서준이 특별한 거라니까요! 하고 끙끙 앓을지도 몰랐다.
‘탑배우 이서준’의 배경 지식에 감탄하던 민희경의 시선이 설명을 끝내고 대본에 푹 빠진 서준에게로 향했다.
한번 쭉 읽고도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글자 하나하나 분석하듯 읽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열심히 작품을 읽어준 적이 없어 민희경은 괜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배우 입장에서 보면 어때?”
그런 서준의 태도에 민희경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버릴 대본이지만 배우, 게다가 주인공과 같은 또래라면 자신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평가할까?
감독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니 어떤 평가가 나와도 제3자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진 않네.’
갑자기 긴장이 됐다.
평가 하나에 영화 제작이 걸려 있는 제작사 직원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의미로 영화 제작, 아니, 영화 흥행이 걸려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민희경의 말에 서준이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우리 동네랑 비슷하네요.”
“……아 ……그래?”
민희경의 표정이 흐려졌다.
“고친다고 고쳤는데 아직 남아 있나 보네.”
“감독님의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랑 대본만 읽어도 떠오르는 풍경은 우리 동네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전개 속도도 더 빨라진 것 같고요. 근데…….”
“근데……?”
“이야기가 부족해요. 전개가 굴곡이 많지 않고 평탄하달까…… 소재가 흔한 소재인 만큼 많은 작품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관객의 입장에서도 초반부부터 대충 전개를 짐작해 버릴 것 같아요.”
서준의 말에 민희경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부족하다…… 라…….”
“영화가 자신의 추리와 비슷한 전개로 진행되면 지루해지잖아요. 하지만 반대로 관객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요소가 들어가면 특별해지고요.”
특별.
민희경의 뇌리를 스치는 영화가 있었다.
“……생존자들처럼?”
민희경의 말에 [생존자들]에 출연했던 서준이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으음…… 네. 생존자들 개봉판이 클리셰적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거기서 주인공격인 레이먼드 위시가 가장 먼저 낙오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현우가 생존자들의 구조에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요.”
민희경이 [생존자들]을 떠올렸다.
아르바이트와 집필로 바쁜 와중에도 화제가 되는 영화는 빠짐없이 봤다. 올해 여름을 뒤집어놓았던 [생존자들]도 물론 보았다.
“이안 위버가 가정 폭력 피해자라는 것도 특별한 점이었지.”
“저도 그게 좋았어요. 재난영화에 그런 과거를 가진 조연은 거의 없잖아요. 미아가 있으면 맨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남은 미아의 부모가 주인공이 구해준 미아에게 달려가는 장면이 종종 나오긴 하지만요.”
벌써 서준의 입에서 재난영화 한 편이 뚝딱 만들어졌다.
그 클리셰에 민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쿠키 영상도 화제가 됐고.”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감독판은 존재 자체가 예외 덩어리라 분석 안 하는 게 나아요. 전부 다…… 아, 감독판 보셨어요?”
“봤지.”
플러스+에 뜨자마자 봤다.
스포일러를 할까 봐 물었던 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안 위버가 제일 먼저 죽고 이현우는 미치고…… 그렇게 캐릭터들이 다 죽었는데도 영화관에 올라갈 정도로 흥행할지도 몰랐어요.”
“그건 그렇지.”
누가 이안 위버가 가장 먼저 죽을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민희경은 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런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꼭 한 장르만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로맨스릴러라는 것도 있고요.”
“……새로운 이야기…….”
뭔가.
잡힐 듯 말듯 머릿속을 떠다닌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민희경을 바라보던 서준이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한지호 : 어디임? 나 촬영 끝났는데.
>한지호 : 은신술이라도 쓰냐?
>한지호 : 언제 사라진 거야;;;
은신술이라는 부분에 서준이 움찔 몸을 떨었다.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종류긴 했다.
<벌써;;;?
<하나도 못 봤는데?
>한지호 : 아직 재한이 촬영은 남음.
<지금 갈게.
벌써 반이나 흘러간 촬영에 마음이 급해진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하던 대본은 다 읽었으니 이제 촬영을 보러 가야겠다.
옆자리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민희경이 서준의 움직임에 생각에서 깨어나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대본을 탁탁 정리한 서준이 민희경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친구들이 찾아서요. 여기 대본이요. 잘 읽었습니다.”
집에 가면 폐지함에 버려질 종이들이 누군가의 손에서 소중히 다뤄지는 걸 보니 민희경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구깃구깃해진 대본을 받아든 민희경이 검은 모자를 쓴 무명의 아역 배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감독님.”
꾸벅 인사를 한 서준이 걸음을 옮겼다. 민희경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삼 떠오른 건데 이 아이는 ‘감독님’이라는 호칭으로 민희경을 불렀다.
감독을 그만두기로 했지만, 그 말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 뻐근함이, 손안에서 느껴지는 종이뭉치, 아니, 자신의 대본의 무게가,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새로운 이야기가 민희경의 마음을 울렸다.
생각도 하기 전에 먼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기!”
민희경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기던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서 촬영하고 있지? 구경하러 가도 될까?”
* * *
>한지호 : 괜찮으시대!
>한지호 : 조언 부탁드려도 되냐시는데?
한지호에게 답장이 왔다. 서준이 옆에 선 민희경을 보며 물었다.
“감독님. 조언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 망한 감독이라도 괜찮으면…….”
왠지 민망해진 민희경은 휴대폰을 두드리는 서준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잘 보일 것 같은데 여기 앉을까요?”
“그래.”
촬영장으로 돌아온 서준과 민희경은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촬영을 마친 한지호는 팔을 걷어붙이고 스태프 일을 돕고 있다가 서준을 발견하자 손을 흔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민희경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스케이프에 나왔어요. 고주원 친구로요.”
“아아!”
한지호도 그동안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가장 설명하기 쉬운 건 [이스케이프]였다.
한지호의 모습에 촬영장에 있던 학생들이 서준이 있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서준의 옆자리에 앉은 어른의 모습에 조금 긴장한 아이들도 있었다. 꾸벅 인사한 아이들이 조용조용 떠들었다.
“감독님이시래.”
“선배님은 어디서 저런 분을 만나는지 모르겠어.”
망하긴 했어도 포털사이트에 [우리 동네]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것도 상업영화. 언젠가 또 다른 상업영화를 찍을지도 모르는 감독은 아이들로서는 신기하고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촬영 집중하자!”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멈춘 건 가장 부담이 될지도 모르는 3학년 감독이었다.
같은 감독으로서 민희경에게 어떻게 보일까, 영상이 아니라 영화는 처음 찍어보는 터라 부담이 될 만도 한데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에 다른 학생들이 감탄하는 사이 카메라를 잡은 3학년 감독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서준이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이라고…….’
누구보다도 영화에 대해서 잘 아는 배우가 촬영을 구경하러 온다는데 신경을 안 쓸 리가 있나. 오늘 아침 청심환을 먹고 온 3학년 감독이 애써 신경을 끄기 위해 노력했다.
‘서준이랑 감독님 조언 덕분에 좋은 작품이 나오다면야…….’
이깟 부담, 얼마든지 참아내겠다고 다짐한 3학년 감독이 액션을 외쳤다.
실로 멋진 예술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 * *
“컷! 오케이!”
“NG!”
“한 번 더 가자!”
오랜만에 듣는 외침에 민희경의 마음이 술렁였다. 아까 촬영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봤을 땐 느껴지지 않았던 울렁임이었다. 이제 영화감독은 그만두기로 결심한 민희경은 파도같이 밀려오는 그 마음을 깨닫기에는 겁이나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배우 이서준’이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는 눈빛.
그렇게 빛나는 눈동자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민희경이 서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에도 고개를 완전히 촬영장에 고정한 서준은 눈을 깜빡하는 시간마저 아까운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동자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배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도 그게 재미있다는 듯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들뜸이 물감이 번지듯 민희경에게까지 전해졌다.
결국 ‘영화감독’ 민희경은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의 모습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 배우를 내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민희경의 머릿속과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새로운 이야기와 소년의 모습이 합쳐졌다. 머릿속에 그려놨던 이미지 속에서 그렇게 바라던 ‘이서준 배우’를 밀어낸 ‘소년’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렇게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가 연기하는 영화는 어떤 작품일지 정말 궁금해졌다.
정말로.
이런 배우가 왜 아직까지 무명인지 모르겠다.
민희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넌 왜 촬영 안 해?”
자기 입으로 배우라고 소개했으면서, 저렇게 연기를 좋아하면서 왜 촬영하지 않는 걸까?
작은 영화에 많이 출연해서 얼굴을 알려야 나중에 큰 영화에 출연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 ……연기를 못하는 건가?’
아차 싶었다.
연기를 좋아해도 작품을 보는 눈이 좋아도 그걸 몸으로 대사로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민희경도 분석한 만큼 표현해 내지 못하는 배우들을 본 적이 있었다.
촬영을 보느라 미안해하는 민희경을 알아채지 못한 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대본이 연기하고 싶을 만큼은 아니라서요.”
3학년 감독이 들었다면 울었을 거다.
하지만 연기에서만큼은 무엇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서준이었다.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하긴 했지만, 대본은 마음에 안 드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걸 또 마음에 들게 수정하려면 아예 대본을 엎어야 했다.
‘그러면 선배님 작품이 아니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준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민희경이 입을 쩌억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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