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59화
서준이 선기를 흘려보내 김한석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른 1학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아이들이 따뜻한 기운에 하나둘 진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많은 얼굴이라 서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 아픈 데가 없으면 잘못 나온 걸 수도 있어.”
“그렇지만…… 요새 식욕도 없고…….”
김한석의 말에 서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1학년들과 김한석의 시선도 밑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비어 반짝반짝한, 설거지가 필요 없는 식판이 보였다. 김한석의 식판이었다.
……오늘 점심이 유난히 맛있긴 했다.
“어……오늘 좀 피곤하기도 했는데……!”
“……너 어제 게임하느라 늦게 잤다며…….”
연기과 1학년의 말에 뜨끔한 김한석의 표정을 보던 아이들이 하나둘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조금 풀린 분위기에 서준이 김한석을 토닥이며 말했다.
“일단 부모님께 연락하는 건 어떨까?”
서준의 말에 김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걱정이 가득한 친구들과 함께 비실비실 걸어가는 김한석의 뒷모습에 서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고생을 하는 김한석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멀쩡하다고 말해줄 수도 없고…….”
믿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동화 속, 대나무숲을 향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주인공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 * *
그리고 그날 조퇴한 김한석은 일주일 동안 학교에 오지 않았다.
* * *
“서준이 형!”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김한석이 보였다.
서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찍 왔네?”
“학교에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몰라요!”
혈색이 돌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약간 살이 빠져 보였다.
“저 괜찮대요! 완전! 엄청! 진짜로 멀쩡하대요!”
근심·걱정을 떨쳐 버린 김한석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알아. 어제 통화했잖아.”
>김한석 : 서준이 형.
>김한석 : 저 완전 멀쩡하대요ㅠㅠ
메시지를 보내고 곧바로 통화도 했다.
울음소리가 반이라 제대로 알아듣기도 어려웠지만 말이다.
“히히. 괜히 일주일 동안 겁먹었어요.”
귀에 입이 걸릴 것같이 계속 웃는 김한석의 모습에 서준도 빙그레 웃었다.
“일주일 동안 진짜 엄청나게 겁먹었다고요. 진짜 큰 병이면 어쩌지. 앞으로 어떻게 하지.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까 말까. 버킷리스트라도 적을까,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못 온 거야?”
앞자리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하는 서준에 김한석이 얼른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네. 병원 갔다 와서 집 분위기도 장난 아니었거든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렇게 저 애지중지하는 것도 처음 봤어요. 갑자기 건강식을 주지 뭐예요.”
엄마는 안 보던 건강 프로를 찾아보고 아빠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들고왔다. 제 간식을 주는 동생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면 동생도 따라 울었어요.”
이제는 맘 편히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학교에 가도 집중도 못 할 테니까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안 가기로 했어요. 만약에 결과가 안 좋으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아서요. 그동안 엄마 아빠랑 이곳저곳 놀러 다녔어요.”
고작 일주일.
하지만 1년, 아니, 10년 같았던 일주일이었다.
김한석의 가족은 그런 무거운 시간 속에서 좋은 결과만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결과 나오고 파티했어요. 한우 파티! 일주일 동안 나물이랑 채소만 먹다가 고기 먹으니까 엄청 맛있더라고요.”
가족들 모두 훌쩍거리면서 먹었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 있죠?”
“그래?”
“다음 달에 나오는 마린사 시즌 2도 봐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드라마도 어떻게 끝나는지 봐야 하고. 만화도, 게임도 못 한 게 엄청 많아요.”
신나게 말하던 김한석이 의젓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 아직 주인공도 못 해봤잖아요.”
배우의 후회는 다 똑같은 걸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말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고 말았다.
‘이 녀석도 천생 배우인 모양이네.’
“그게 제일 아쉬웠어요. 그래서 내년 연말 공연 때 무대에 연극 올리려고요. 올해는 벌써 접수가 끝나서 힘들대요. 이런 거 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한번 해보려고요.”
서준이 웃으며 김한석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일주일 사이 엄청 철든 것 같네.”
“아하하하.”
김한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고민은 한 톨도 묻어나오지 않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2학년 선배인가 싶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김한석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김한석!”
“야!!”
“여기 있을 줄 알았어!”
김한석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서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곧바로 김한석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평소, 이 시간이면 도착도 하지 않았을 친구들을 보며 김한석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너 때문이잖아!”
“일주일 동안 학교 안 나오니까 좋던?”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말이야!”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아이들의 안도한 목소리에 서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토요일.
한강 공원.
주말이고 날씨도 좋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하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햇살을 즐기기도 했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 중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옷! 옷 어디 있어?”
“선배님! 이 씬부터 찍는 거 맞죠?”
“소품은 얻다 뒀어?”
이번 졸업 무대에 단편 영화를 올릴 예정인 미리내 예고 학생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취지에서 연기과뿐만이 아니라 미술과, 음악과 1, 2학년들도 있었다.
“뒤에 그림자!”
감독의 외침에 조명을 든 아이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섰다.
검은 모자를 쓴 서준이 신기한 듯 감독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를 잡고 앵글을 살피고 있는 학생 감독은 미술을 하다가 영상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미술과 3학년이었다.
“미술과 3학년이 보는 풍경은 어떨지 궁금하네.”
감독이 2학년 때 그렸던 그림을 봤던 서준은 어떤 영상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이리저리 배경을 살펴보는 감독에게서 시선을 뗀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촬영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반대편에는 연기과 2, 3학년들과 강재한, 한지호가 대사를 맞추고 있었다.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소규모 촬영이 궁금해서 구경하러 오긴 했는데 촬영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이런 시행착오마저도 다 경험이 되겠지.’
촬영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는 아이들이 보였다.
많이 힘들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여기 있는 것도 까먹은 것 같은데…….”
존재감을 너무 죽였나 보다.
피식 웃은 서준이 한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에 한강을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건강을 위해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과 산책을 나온 가족들,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이 보였다.
“초코야!”
목줄을 쥔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초코색 강아지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꼬리를 휭휭 돌리는 걸 보니 강아지도 엄청 신이 난 모양이었다. 신나게 달리던 강아지 초코가 새하얀 종이에 발자국을 남겼다.
“……종이?”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한 번 인식하니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단지처럼 보이는 종이들이 산책로를 따라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이리저리 널 부러 있었지만 한쪽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빵부스러기 같았다.
쓰레기라고 생각했는지 그 종이를 밟는 사람들도 있었고 누군가 떨어뜨린 물건이라고 생각했는지 피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한 청소년으로서 쓰레기를 줍기 위해서였다. 결코, 새하얀 종이 위에 적힌 것이 대본처럼 보여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진짜 대본이네?”
가장 끝에 떨어진 종이를 주운 서준이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종이에는 S#(씬 넘버), NAR(내레이션) 등 익숙한 시나리오 기호들이 적혀 있었다.
검은 모자를 쓴 소년이 산책로 한복판에 쭈그려 앉은 모습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곧 근처에 모여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는 일행이겠거니 생각하며 신경을 끄고 지나갔다.
그사이 서준은 종이에 있는 내용을 읽고 있었다. 캐릭터의 이름과 대사도 적혀 있었지만 한 장만으로는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으음. 한 장만으로는 모르겠는데…….”
종이의 글자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읽던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마치 치즈 조각처럼 새하얀 종이들이 산책로를 따라 이리저리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대본을 보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말라던 찬이 삼촌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없고 대본만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다호 형을 불러오기엔 너무 사소한 일 같았다.
어떻게 할까.
손에 든 종이와 길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던 서준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잠시만요!”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진 전단지 같은 종이 위로 발을 내디디려던 남자가 서준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종이를 피해 발을 내렸다. 서준이 얼른 달려가 밟힐 뻔한 대본 한 페이지를 주웠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네.”
종이를 소중히 줍고는 씩씩하게 인사하는 검은 모자를 쓴 소년을 한 번, 저쪽에서 촬영하고 있는 무리를 한 번 바라본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대본 날아왔나 봐.”
“그러게. 저기까지 있던데 다 주우려면 고생하겠다.”
조금 전 만났던 소년이 배우 이서준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두 사람이었다.
* * *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여 버렸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로 주운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서준은 이미 움직여 버린 거 그냥 대본을 줍기로 했다.
서준은 바닥에 놓인 해바라기 씨를 모으는 햄스터처럼 주섬주섬 떨어진 종이들을 주웠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대본에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서준은 진하게 신발 자국이 묻은 부분을 털어내고 구겨진 종이를 반듯하게 폈다. 하나하나 소중히 정리하던 서준이 안타까운 눈으로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순서가 엉망이네.”
씬 넘버에 맞춰 정리하고 있었지만 영 줄거리가 연상되지 않는다. 그래도 대본에 보이는 캐릭터들의 대사들은 서준의 눈길이 사로잡았다.
서준은 한 장을 주워 읽고 다시 한 장을 주워 읽으며 대본과 바닥을 번갈아 보고 걷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또 다른 한 페이지의 대본이 보였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대본을 줍는데 새하얀 종이 위로 다른 손이 보였다.
제 손이 아닌 다른 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서준이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앞에 있던 사람도 고개를 들다가 서준의 손에 들린 종이들을 보고는 한숨을 뱉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방이 열린지도 모르고 걷는 바람에…….”
음.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서준아. 처음 보는 사람이 대본 보여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
다시 한번 서은찬의 목소리가 서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은 여자의 손에 들린 대본과 자신이 들고 있던 대본을 번갈아 보던 서준이 눈을 데굴 굴렸다. 순서대로 정리된 대본을 보고 싶어졌다.
‘……따라가는 건 아니니까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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