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55화
수빈의 바이올린에서 첫 음이 흘러나오자 붉은 펜을 쥐고 있던 율리아 빈터의 손이 멈추었다. 다른 참가자들의 연주를 들을 때는 정확한 채점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던 손이었다.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율리아 빈터의 고개가 저절로 위로 들렸다. 다른 심사위원들의 고개도 무대 위로 향했다.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밝은 조명 아래.
어린 바이올리니스트가 서 있었다.
활을 잡은 오른손과 바이올린 현 위의 손가락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흘러나오는 소리는 달랐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저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집중한 것이 율리아 빈터에게도 느껴졌다. 수많은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본 심사위원들도 채점해야 하는 것도 잊고 그저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반쯤 농담으로 생각했던 보석이 정말로 눈앞에 나타나자 율리아 빈터는 온몸의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세우며 선율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현을 누르는 손가락과 내리긋는 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오버 더 레인보우]를 떠올리고 있었던 탓일까.
율리아 빈터는 어쩐지 ‘배우 서준 리’의 등장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감독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능에 충격을 받고 그 재능을 잘 키워서 세계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율리아 빈터가 눈을 빛내고 있는 사이, 관객석은 지루함의 적막이 아니라 아름다운 선율을 더 잘 듣기 위한 적막으로 가득 찼다.
14번 참가자까지는 마음속으로 응원하러 온 아들딸과 비교를 해댔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마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의 바이올린 연주회에 온 것 같았다. 아들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진짜 잘하네.’
관객들은 터져 나올 것 같은 감탄을 삼키며 바이올린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피아노 반주와 어우러진 수빈의 바이올린 연주는 콩쿠르에 참가하는 다른 부 대기실까지 전해졌다. TV에 비친, 다른 아이들보다 조그마한 마지막 참가자의 모습에 귀엽다며 웃고 있던 참가자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 할 것 없이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마른침을 삼켰고 누군가는 손을 떨었다. 반응은 다 달랐지만 모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참가자들은 관객들보다 바이올린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 저 조그마한 참가자의 재능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다.
“……미친.”
미리내 예고 음악과 바이올린 전공 1학년들은 ‘이서준 선배님’의 ‘아는 동생’의 연주에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계속 듣고 싶었던 수빈의 바이올린 연주가 끝났다.
마지막 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적막이 흘렀다. 관객들은 그 적막마저 연주의 일부분인 양 감상했다.
두 뺨이 빨갛게 상기된 수빈이가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바이올린에서 턱을 뗐다. 그리고 적막한 관객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콩쿠르라 박수 소리를 듣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서준이 형이랑 은수한테 어땠는지 물어봐야지!’
피아노 반주자, 최수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수빈이 엄마가 엄지를 척 드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무대를 떠나려던 그때,
짝짝짝!!
관객석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김한석과 친구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두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뒀다. 빠르게 마주치는 두 손바닥이 뜨거웠다. 멋진 무대를 본 만큼 박수를 보내주고 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이쪽이 나이는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쟤는 진짜 재능 쩐다.”
“애들 괜찮으려나?”
김한석은 이 상황을 대기실에서 TV로 보고 있을 음악과 친구들을 떠올렸다. 미술과 1학년은 손뼉을 멈추지 않고 쓰게 웃었다.
“안 괜찮겠지. 근데 예술 쪽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재능러가 한두 명이냐.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계속하기 힘들어.”
“그건 그렇지.”
“뭐, 쟤 혼자서 모든 행사를 갈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음악계의 이서준 선배님이라고 생각하자. 이서준 선배님처럼 쟤 덕분에 음악계가 커지면 좋잖아.”
음악과 피아노 전공 1학년의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중등부의 콩쿠르가 시작되었다.
중학생들은 바로 전 초등부 15번의 연주의 영향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연주에도 심사위원들은 냉정하게 평가했다.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길게 쉬는 시간을 가졌지만 멘탈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했나 봅니다.”
“바로 앞에 저런 재능있는 애가 나오면 ‘나는 저 나이 때는 뭐 했나’, 싶죠.”
“근데 이런 일은 국제 콩쿠르에서는 자주 일어나니까요.”
율리아 빈터의 말에 세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콩쿠르는 대부분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콩쿠르에 참가하니 서로 얼굴과 실력이 익숙할 겁니다. 그래서 입상하는 아이들도 비슷비슷하죠.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말입니다.”
“그 우물 안에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군요.”
바이올리니스트의 말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돌덩이’인 초등부 15번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중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기에도 침착하게 제 실력을 발휘한 참가자들이 있었네요. 이런 멘탈이라면 실력도 금세 늘 거예요.”
“이번에는 순위가 많이 바뀌겠습니다.”
“고등부도 일반부도 기대가 되는군요.”
이제 겨우 반이 지나갔지만, 여러모로 파란만장한 콩쿠르였다.
* * *
중등부 콩쿠르가 진행되는 동안 서준과 가족들은 가까운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중식.
동그란 테이블에 세 가족이 모여 앉았다.
물론, 서준의 양옆은 은수와 수빈이 차지했다.
주문을 하고 잠시 후.
각자 취향대로 시킨 음식들로 테이블 위가 가득 찼다.
은수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내가 비빌래!”
“알았어.”
서준이 자신의 앞에 짜장면 한 그릇을 놓자 은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짜장면을 비볐다. 새하얀 면에 새까만 짜장 소스가 빠진 곳 없이 잘 묻을 수 있도록 신중한 얼굴이었다.
수빈이는 많이 긴장해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말도 없이 냠냠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있었다.
“수빈아. 꼭꼭 씹어 먹어.”
“응!”
서준의 말에 입 주위에 새까만 짜장 소스를 묻힌 수빈이 헤헤 웃었다.
그 모습에 어른들이 웃고 말았다.
“아까 무대 위에서 본 건 꿈 같네.”
“그러게 말이야.”
다들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상은 몇 등까지 받는대요?”
서은찬의 물음에 짬뽕을 먹고 있던 김희상이 대답했다.
“3등까지. 금상, 은상, 동상 준대. 근데 예전에 동상이 안 나왔었던 때도 있다더라.”
그 말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사 기준이 많이 까다로운 모양이네.”
“그래도 그만큼 공정한 콩쿠르라는 거겠지.”
“맞아요. 심사위원이랑 아는 사이라고 합격시키는 것보다는 낫죠. 이쪽은 장난 아니에요.”
홍보팀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고 있는 코코아엔터 홍보팀장, 김수련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점심을 먹은 후, 서준은 고등부 콩쿠르를 보러 가기 위해 수빈이와 함께 은하수 센터 별관으로 향했다.
“그럼 우리는 시상식 때 올게.”
“나중에 봐! 서준이 오빠! 수빈이 오빠!”
모두의 예상대로 은수는 키즈카페로 향했다. 표정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키즈카페로 향하는 두 발은 구름 위를 걷는 듯 발랄했다.
“수빈아. 일반부까지 볼까? 아니면 고등부만 보고 키즈카페에 갈까?”
“으음.”
서준의 말에 서준의 손을 꼭 잡고 걷던 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바이올린 연주도 듣고 싶지만 은수와 키즈카페에서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수빈이가 입을 열었다.
“키즈카페 갈래!”
“그래. 그러자.”
수빈이의 결정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바이올린 연주도 듣고 키즈카페에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난 수빈이를 데리고 서준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활짝 열린 제2홀로 들어가니 고등부 참가자들의 지인들과 가족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준과 수빈이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달랑달랑거리고 있는 수빈이에게 음료수를 건네준 서준의 시선이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소곤소곤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귀가 좋은 서준에게는 잘 들렸다.
“초등부? 초등학생이 그렇게 잘했다고?”
“그렇다니까. 우리 애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야.”
수빈이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기실에 TV가 있다더니…….’
수빈이의 연주가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에게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나이가 좀 있으면 모르겠지만, 아직 중학생이라면 실력 차이에 큰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었다.
“반주자 선생님들도 어디 학원 애냐고 알아보고 다닌다던데요?”
“그러게요. 어느 학원 다닐까요? 서울이면 옮기고 싶은데…….”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 고등부 콩쿠르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초등부 때처럼 심사위원이 들어오고 커튼이 올라갔다. 넓은 무대 위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반주자와 참가자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첫 순서네.’
고등부 첫 순서는 아까 만났던 음악과 바이올린 전공 1학년이었다. 1학년의 바이올린에서 첫 음이 흘러나오고 서준과 수빈이 그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 * *
[지금부터 제 8회 ATR 바이올린 콩쿠르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실수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한 참가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자리를 떠났고 혹시나 싶은 기대를 가진 참가자들의 가족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참가자들은 이름이 불리면 바로 무대 위로 올라가기 위해 관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서준과 은수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서준은 보라색 라일락 꽃다발을, 은수는 노란색 프리지어 꽃다발과 분홍색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건 은수 거야!”
분홍색 장미 꽃다발을 옆자리에 앉은 아빠에게 준 은수가 노란색 프리지어 꽃다발을 꼬옥 껴안고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
“응!”
서준도 은수를 따라 웃었다.
수빈이만 꽃다발을 받으면 은수가 실망할까 봐 두 개를 사 왔는데 마음에 들어 하니 서준도 기뻤다.
[초등부 동상.]
이름이 불린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무대로 향했다.
무대 위에는 ATR 재단의 이사장이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여울 예중과 미리내 예고 입학식, 졸업식 때마다 봐서 서준에게도 익숙한 얼굴이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중등부 동상.]
이름이 불린 중학생은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놀란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학생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놀란 것처럼 박수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박수가 터져 나왔고 중학생은 벌건 얼굴로 무대 위로 향했다.
“쟤 평소에는 순위권에 못 들었던 애 아니에요?”
“맞을걸. 아마 콩쿠르에서 상을 받는 건 처음일 거야.”
학원 강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헐. 진짜요?”
“이번에 중등부 순위권 애들 중에 대부분이 실수를 해버렸어. 난 중등부만 봐서 모르겠는데 초등부 마지막에 연주한 애가 너무 잘해서 그렇다더라고.”
“? 콩쿠르에 잘하는 애가 있는 건 다 똑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니까.”
음.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그 잘하는 애가 초등학생 2학년이면 충격받을 만하지 않을까.
‘그것도 보통 잘하는 것도 아니고 충격적이게 잘하니까.’
우리 수빈이 최고.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서준이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초등부 은상.]
무대 위로 올라간 아이가 활짝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박수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의 플래시가 번쩍였다.
[중등부 은상은 없습니다.]
그 방송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특히 중등부 참가자 가족들의 얼굴이 침울했다.
“금상도 없는 거 아니야?”
“그러게…….”
고등부, 일반부 은상이 발표되고 마지막.
금상만 남았다.
[초등부 금상.]
이름도 불리지 않았는데 초등부 연주를 봤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1초의 고민도 없이 만장일치로 금상을 정한 심사위원들도 들뜬 얼굴이었다.
서준과 은수는 박수를 칠 준비를 했고 어른들은 카메라를 준비했다.
[매실 초등학교 2학년. 김수빈.]
수빈이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큰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서준과 은수가 있는 힘껏 손뼉을 치는 사이 어른들은 준비하고 있던 카메라를 들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함박웃음을 지은 수빈이가 짧은 다리로 총총총 걸어가 무대 위에 올랐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작은 아이의 모습에 잠시 놀란 이사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넸다.
“축하해요. 수빈 군. 앞으로도 멋진 연주 들려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사장에게 꾸벅 인사한 수빈이 꽃다발과 트로피를 품에 껴안고 관객석 쪽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어쩐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엄마 아빠와 서준이 형, 은수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 같아 수빈이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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