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54화
[지금부터 제8회 ATR 바이올린 콩쿠르를 시작하겠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휴대폰을 끄거나 무음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방송되었다. 관객들은 오늘을 열심히 준비했을 자신의 친구, 아들딸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주섬주섬 움직였다.
잠시 후. 부스럭대는 움직임이 잦아들자 다시 방송이 흘러나왔다.
ATR 바이올린 콩쿠르에 대한 소개와 심사 방식, 시상 부분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오고 심사위원석에 앉을 네 명의 심사위원의 소개가 이어졌다.
깐깐해 보이는 중년인과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남자, 작년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바이올리니스트가 앞문 쪽에서 심사위원석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이어 들어오는 심사위원에게 관객들의 시선이 쏠렸다.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참가자 모두에게 좋은 점수를 줄 것 같이 인상이 좋았다.
“외국인도 있네?”
“한국예대 바이올린과 교수님이고 이름은 율리아 빈터래.”
김희상의 말에 오호, 탄성을 내뱉었다.
서준이 든 안내 팸플릿에도 네 심사위원의 이력에 대해 적혀 있었다. 네 명 모두 대단한 이력이라 이번 콩쿠르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앉고 무대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올라갔다. 훤히 보이는 넓은 무대 위에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고 밝은 조명이 무대 위를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무대였지만 시작 전의 긴장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연극과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새삼 예전 ‘그레이 바이니’로서 공연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간질간질한 손을 내려다보니 수빈이를 위해 넣어둔 능력들이 보였다.
브라운블랙을 도왔을 때 썼던 [(선)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연결-하급]과 [오버 더 레인보우]를 촬영하며 사용했던 [(선)바이올린 꿈요정의 기초수업-하급], [(선)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선율-중하급]이었다.
능력을 써서 수빈이가 이기게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었고 수빈이의 연주를 보고 고쳐야 할 점이 있으면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취미라 나쁜 버릇이 들지 않게끔 가볍게 가르쳤지만…….’
이제 콩쿠르에 나가기 시작했으니 훗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서준은 수빈이의 형으로서 열심히 수빈이를 돕고 싶었다.
반짝이는 능력들을 보고 두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편 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초등부 1번.]
방송이 흘러나오고 무대 옆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반주자와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반주자는 곧바로 그랜드피아노로 향했고 바이올린을 든 여자아이도 피아노 앞에 작게 표시된 자리로 향했다.
‘1번이라니, 긴장되겠네.’
첫 순서는 콩쿠르를 시작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곡을 듣지 않아 귀가 쌩쌩한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은 바이올린 연주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가득했다. 뒤쪽으로 가면 갈수록 바이올린 연주에 익숙해져서 지루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관심을 받는 첫 순서도 부담이 클 터였다.
관객석 중 한 곳이 가벼운 움직임을 보였다. 차마 소리를 내 응원하지 못하는 참가자의 가족들이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여자아이도 긴장이 되는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바이올린에 턱을 괬다. 긴장하는 듯하면서도 연주를 잊지 않는 모습이 콩쿠르에 제법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첫 음이 흘러나왔다.
서준의 손에 박힌 세 개의 문양이 음악에 반짝반짝거렸다.
잔뜩 심통이 난 것 같지만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 하나와 즐거운 듯 보이는 두 개의 능력.
세 능력의 영향으로 음악적 능력이 강화된 서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김한석과 친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초등부 연주를 듣고 있었다.
원래라면 바로 옆 은하수 센터 본관에서 짧은 공연을 보거나 건너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볼 예정이었다. 하지만 초등부 맨 마지막에 나온다는, 바이올린까지 잘 켜는 ‘그’ 이서준 선배님이 잘한다고 말하는 초등학생을 보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짝짝짝.
첫 번째 참가자가 내려가고 박수 소리가 들렸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 위 배우들을 향해 박수를 쳐주는 것이 몸에 새겨진 연기과 김한석과 친구들도 훌륭한 연주를 보여준 첫 번째 참가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초등부라고 들었는데 잘한다.”
“그러게. 애가 1등 하는 거 아니야?”
“뒤에 나오는 애들도 잘할걸? 전국 규모잖아. 게다가 아직 선배님이 아는 동생도 안 나왔고.”
친구의 말에 김한석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던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마자 곧바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다음 참가자를 위해 콩쿠르 중에는 박수를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아.
콩쿠르 중에는 박수를 치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2번째 연주가 끝나고 김한석과 아이들은 저절로 모아지던 두 손을 참아냈다. 다른 관객들도 속으로만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조용한 관객석에,
짝-!
어디선가 참아내지 못한 듯 박수 소리가 들렸다. 적막을 깨는 그 소리에 김한석과 아이들과 작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서준이 얼른 박수를 치려는 은수의 두 손바닥 사이에 왼손을 끼워 넣었다. 손과 손이 마주치고 한 번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영문을 모르는 은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서준이 웃으며 소곤소곤 설명해 주었다.
* * *
초등부 대기실.
다른 부 참가자들이 무대와 연결된 TV로 귀여운 초등부의 연주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초등부는 TV를 켜지 않은 상태였다. 앞 순서가 연주를 잘해도 못해도 더 긴장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5, 6학년 아이들은 의자에 앉아 악보를 보거나 소리를 내지 않고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하면서 이미지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반주자들도 조용히 아이들을 도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아홉 살 수빈이는 의젓하게 의자에 앉아 악보를 읽고 있었다. 엄마에게 연필을 받아 서준이 형과 이야기했던 곳들을 체크했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아 달랑달랑거리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다들 긴장한 상태라 최수희를 빼고는 보지 못했다.
“10번 참가자! 준비해 주세요!”
10번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난 남자아이가 후우, 숨을 내쉬고는 반주자와 함께 대기실을 나섰다. 마지막 순서인 수빈이를 빼고 이제 4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수빈아. 무대 위에서 긴장되면 관객석 뒤쪽에 서준이 형이랑 은수랑 앉아 있으니까 그쪽 보고 연주하면 돼.”
“응!”
조금 긴장한 듯 보이지만 반짝이는 눈동자가 수빈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선 연주해 본 적이 없긴 하지.’
수빈이의 관객이라고 해봤자 서준이네, 은수네, 친인척이 다였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자신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심장이 떨릴 정도로 긴장되면서도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이 행복한 일이라는 걸 피아니스트 최수희도 잘 알고 있었다.
“수빈아. 우리 제일 멋진 연주를 들려주자.”
“응!”
고개를 끄덕이는 수빈이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 * *
한국예대 바이올린과 교수, 율리아 빈터가 채점표를 넘겼다. 전국에서 끌어모아서 그런지 다들 나이에 비해 잘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예전보다 지원자들이 많아진 덕분일 터였다. 율리아 빈터가 그 원인을 떠올렸다.
‘오버 더 레인보우.’
6년 전 나왔던 음악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 당시도 ‘그레이 투어’라는 유행을 만들고 바이올린에 관한 관심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에서 활동 중이었던 율리아 빈터도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공연 요청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리고 [오버 더 레인보우]는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영화를 본 아이들이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기도 하고 영화를 본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권유하기도 하면서 바이올린에 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서 줄어들긴 했지만, 영화가 나오기 전보다는 여전히 많지.’
이런 관심이 이어진다면 자신의 재능을 몰랐던 아이가 어쩌다가 연이 닿아 멋진 재능을 뽐낼지도 몰랐다.
‘언제 나타나려나?’
율리아 빈터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음 참가자를 기다렸다.
* * *
[초등부 15번.]
드디어 초등부 마지막 순서였다.
중간에 서은찬과 잠깐 나갔다 온 은수가 눈을 반짝였다. 서준도 어른들도 미소 띤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앞쪽에 앉아 있던 김한석과 아이들도 눈을 빛냈다.
넓은 무대 위.
검은 정장을 입은 피아노 반주자와 바이올린을 든 작은 아이가 총총총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나왔던 5, 6학년 아이들보다 작은 키에 사람들은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미리 참가자의 정보를 알고 있었던 심사위원들도 생각보다 작은 체구에 오호, 소리 없이 감탄했다.
수빈이가 의젓하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수빈이의 등장에 입을 활짝 벌린 은수가 소리 없이 웃으며 서준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음소거가 된 것처럼 조용하면서도 표정만은 시끄러운 은수의 모습에 어른들이 웃고 말았다.
‘콩쿠르가 아니라 공연장이었으면 그 누구보다 커다란 박수를 보내줬을 텐데.’
적막한 홀이 조금 아쉬워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서준이 이내 웃으며 수빈이를 바라보았다.
‘수빈아, 화이팅!’
수빈이는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있어 조금 떨리긴 하지만 그레이 바이니도 이런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정말 영화와 똑같은 풍경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도.’
나도 멋진 연주를 들려줘야지.
가볍게 숨을 내쉰 수빈이 바이올린에 턱을 괴었다. 그 모습을 본 최수희가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 반주가 들리고 수빈이가 길게 활을 그었다.
모차르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휴식을 취하던 때에 만들어진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1악장’의 선율이 홀을 가득 채웠다.
* * *
어쩐지 바이올린 꿈요정이 날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착각일까.
지휘봉의 요정이 기분 나빠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했고 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도 털썩 주저앉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수빈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작은 몸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박력과 힘이었다. 강할 때는 강하게, 약할 때는 약하게. 강약조절도 대단했다.
속삭이는 듯한 연주가 흘러나왔다. 밝은 선율이 밝은 수빈의 표정과 함께 어우러졌다.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선율이 관객석을 가득 채웠다.
최수희의 피아노 반주와도 어울렸다.
무엇 하나 빠짐없는 연주에 심사위원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14곡이나 되는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 너무 익숙해진 관객들도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수빈이를 어리게만 보던 시선은 사라지고 모두 연주에 집중했다.
넓은 홀을 사로잡은 수빈의 연주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틀린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서준은 한쪽 귀로는 수빈이의 연주를 마음껏 받아들이고 한쪽 귀로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세 능력 덕분에 날카롭게 다듬어진 서준의 음악적 감각이 이곳저곳 아쉬운 곳들이 지적했다. 몸에 익어버린 버릇도 있었고 연습이 부족해 보이는 부분도 보였다.
취미로는 훌륭한 연주였지만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평가하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나중에 가르쳐 줘야겠다.’
이 부분과…… 이 부분.
아까 봤던 악보를 떠올리며 체크를 하던 서준의 머릿속에 어떤 것이 쓱 스쳐 지나갔다.
평소의 감각이라면 넘어갔을 그것을 신이나 날뛰고 있던 바이올린 꿈요정과 사냥본능이 뛰어난(너무 뛰어나 한 세계를 사냥하려고 했던) 지휘봉의 요정이 날쌘 손짓으로 그것을 낚아챘다. 느긋하게 수빈이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고블린 바이올리니스트까지 팔딱팔딱 뛰는 그것을 구경했다.
아주 잠깐의 찰나.
스쳐 지나가려던 영감을 낚아챈 서준이 다급한 표정으로 노트와 필기구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서준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수빈이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리고 하나하나 메모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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