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53화
악보를 보며 고개를 까딱까딱거리고 있는 수빈이에게 서준이 물었다.
“수빈아. 순서는 정해졌어?”
“응! 뽑기로 정했어. 난 맨 마지막이야.”
수빈의 말에 김희상과 최수희는 조금 전 대기실의 상황을 떠올렸다.
2학년인 수빈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작으니 대기실에 모여 있던 초등부 참가자들과 보호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는데 그것도 모자라 맨 마지막 순서가 되어버렸다.
“다들 얕보더라고.”
김희상이 삐죽 웃으며 악보를 푹 빠진 수빈이에게는 들리지 않게 속삭이듯 말했다.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데는 경험과 연습이 필요한 만큼 어릴 때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로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5, 6학년들과 2학년.
눈으로만 봐도 바이올린을 연주해온 시간의 차이가 보였다.
‘그것도 재능 앞에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유럽에서 활동하며 많은 천재들을 봐왔던 피아니스트 최수희가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엄마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해 봐도 수빈이는 그런 천재들과 비슷했다. 하나를 가르쳐 줘도 열을 알고 그것을 순식간에 습득한다. 연주 안에 담긴 감정도 대단했다.
‘물론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표현하는 건 힘들어하긴 하지만 말이야.’
슬픔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기쁨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아직 그 많은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수빈이에게는 슬픔과 기쁨도 단순했다. 최대의 슬픔이 서준이 형이랑 못 노는 것인 9살 아이였다.
‘실력은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지만…… 그게 다 재능 때문만은 아니야.’
최수희는 누구보다 바이올린을 사랑하고 열심히 연습한 수빈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최수희는 생각했다.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수빈에게 말했다.
“긴장만 하지 않으면 수빈이는 잘 할 거야.”
“응! 그레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거야!”
수빈이에게 콩쿠르의 순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레이 바이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엄청엄청 큰 대회니까 사람들도 많을 거야.’
두 뺨이 붉게 물든 수빈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다니 심장이 콩콩 뛰면서 숨이 조금 가빠져왔다.
“서준이 형. 그레이도 이렇게 두근두근했을까?”
수빈이의 말에 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몇 년이 지난 영화인데도 이렇게 사랑해 주는 팬이 있으니 ‘그레이 바이니’도 ‘이서준’도 정말 행복했다.
“그럼. 얼마나 두근두근했는데…… 그래도 즐겁지 않아? 수빈이의 연주를 듣고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하면 말이야.”
“헤헤. 응. 좋아.”
수빈이가 헤헤 웃자 서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 * *
바이올린 케이스에 악보를 잘 접어 넣은 수빈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형. 은수는 언제 와?”
“은수? 조금 있다가 올 거야.”
때마침, 서은찬과 서은찬의 아내 김수련, 일곱 살 은수가 별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은찬과 눈을 마주친 서은혜가 손짓하자 서은찬과 김수련이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려는 은수를 붙잡아 두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오빠다!”
서준과 서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수빈이의 모습에 은수가 눈을 빛내며 쌩하고 달려오려다 김수련에게 붙잡혔다. 김수련이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사람 많은 곳에선 뛰지 말랬지?”
“앗, 그랬지!”
눈을 동그랗게 뜬 은수가 헤헤 웃고는 살금살금 걸어 서준과 수빈에게로 향했다. 이번엔 너무 조심하는 딸의 모습에 서은찬과 김수련은 결국 웃고 말았다.
* * *
은수의 유치원 이야기, 수빈이의 학교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콩쿠르 시작 시간이 다가오는지 로비에 있는 사람들도 반쯤 줄어 있었다.
“잠시 후 바이올린 콩쿠르 초등부 본선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초등부 참가자분들은 대기실로, 관객분들은 제2홀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하수 센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흩어졌다.
대기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어서 반주자인 최수희가 수빈이와 함께 대기실로 가고 김희상은 서준이네와 함께 관객석으로 가기로 했다.
긴장한 다른 참가자들과는 달리 들떠 보이는 수빈이가 서준과 은수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내 연주 잘 들어줘!”
“그래! 오빠! 꼭 1등 해!”
“형도!”
“그래. 수빈이 화이팅!”
은수와 서준의 응원에 함박웃음을 지은 수빈이 최수희의 손을 꼬옥 붙잡고 대기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수빈이를 보던 서준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고 말았다.
“……수빈아. 아빠도 여기 있는데?”
슬픔이 가득한 김희상의 말에 어른들과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들이 웃는 이유를 몰라 눈을 깜빡이던 은수도 이내 따라 웃었다.
* * *
은수가 엄마 손에 이끌려 화장실에 간 사이 서준은 회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로비 한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눈에 밟히던 아이들이 있었다. 조용히 아이들에게 다가간 서준이 그중 한 명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응?”
어깨를 치는 낯선 손길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김한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모자를 쓴 어쩐지 익숙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지?’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모자챙이 위로 들렸다. 김한석에게 얼굴을 보인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안녕. 한석아.”
“……헉!”
김한석은 익숙하다 못해 그제도 플러스+에서 봤던 얼굴에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다.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사람이었다.
“서, 서, 서준이 형……?!”
“쉿!”
서준이 얼른 검지를 입술에 댔다. 로비에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김한석은 물론이고 김한석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미리내 예고 아이들이 놀라 멍한 얼굴로 서준을 바라보았다. 학교에서도 아주 가끔, 스치듯 봤던 선배님을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서, 서준이 형이 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동생이 콩쿠르에 나와서 응원하러 왔어.”
그 말에 김한석과 친구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이렇게 놀랄 말인가? 너무 놀라는 아이들의 모습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님, 동생이 있으셨어요?”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1학년 후배들에 서준이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 친동생은 아니고 아는 동생.”
“……아…….”
김한석과 아이들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콩쿠르에 나갈 예정인 바이올린 전공 1학년이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서준에게 물었다. ‘그레이 바이니’를 연기하며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던 이서준이 아는 동생이면 실력이 대단할 것 같았다.
“아는 동생이면 고등부에 나와요? 콩쿠르 고등부에 나오는 애들은 한 번쯤 봤던 얼굴이라 익숙한데…… 아니면 중등부?”
“고등학생은 아니고 초등학생이야.”
“오…….”
생각보다 어린 동생에 김한석과 1학년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매고 있던 1학년들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경쟁자는 아니었다.
그사이 서준은 조금 전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근데 왜 1학년들밖에 없어? 2학년 애들이랑 3학년 선배들은 한 명도 안 보이던데?”
아는 사람들이 있으면 인사도 하고 응원도 하려고 했는데 2학년도 3학년도 보이지 않았다.
바이올린 전공 1학년이 얼른 대답했다.
“선배님들은 이 콩쿠르는 작년에 나오셨을 거라서 이번 여름방학에는 다른 국제 콩쿠르에 나가셨을 거예요.”
“그래?”
콩쿠르에도 나가는 순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음악과에 대해선 잘 모르는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초등학생이라면 5학년이에요? 6학년이에요? 대기실에도 TV가 달려 있어서 저희도 볼 수 있거든요.”
“서준이 형. 저희도 관객석에서 응원할게요. 몇 번째예요?”
아이들의 물음에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2학년이야.”
“……네?”
“초등학교 2학년이야. 순서는 맨 마지막이고.”
생각보다 많이 어린 동생에 미리내 예고 1학년들은 너무 놀라 눈만 깜빡였다.
* * *
오늘 콩쿠르에 나가는 음악과 1학년들을 응원해 주고 온 서준이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은수가 얼른 서준의 손을 잡고 헤헤 웃었다.
“친구는 만났어?”
“응. 한석이랑 1학년들이 있길래 응원하고 왔어. 오늘 고등부에 나온대.”
“한석이?”
김희상이 고개를 갸웃하자 서은혜가 입을 열었다.
“서준이랑 한 걸음 찍었던 동생이야. 서준이랑 같은 학교래. 중학교도 같은 곳이었지?”
“응.”
서은혜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희상은 ‘한 걸음’이란 말에 기억을 떠올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수련과 서은찬도 김한석의 모습을 떠올렸다.
“걔 연기 잘하던데, 연기과 아니야?”
“친구 중에 바이올린 전공인 애가 있어서 응원하러 왔나 봐. 그래서 나도 고등부 보려고.”
ATR 바이올린 콩쿠르는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로 진행되며 모든 연주가 끝난 후에 시상할 예정이었다.
콩쿠르에 참가했던 아이들은 자신의 순서가 끝나면 밖으로 나가서 시상식 때까지 돌아오면 되었다. 게다가 순서 사이사이 쉬는 시간이 있어서 관객들도 편하게 오고 갈 수 있었다. 지인이 참가한 부만 보고 가는 것도 가능했다.
서준의 말에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중등부 때 점심 먹고 돌아오면 되겠다. 수빈이도 콩쿠르 볼지 물어보고 본다면 서준이랑 같이 보게 하고.”
“수빈이는 왠지 서준이랑 같이 본다고 할 것 같은데…….”
“그러게.”
은수가 ‘서준이랑 같이 본다’는 말에 꽂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나도 서준이 오빠랑 같이 볼래!”
“딸. 근처에 키즈카페 있는데?”
미리 사전 조사를 해온 김수련의 말에 헉! 숨을 들이킨 은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턱까지 괴고 ‘서준이 오빠냐, 키즈카페냐.’ 고민하는 은수의 모습에 어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좀 더 고민해 볼래!”
“그래. 점심 먹으면서 생각해 봐.”
초등부 연주를 들으면 은수의 선택이 쉬워질지도 몰랐다.
‘활발한 은수한테는 꽤 지루한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서준의 걱정을 알았는지 제2홀에 들어가기 전, 서은찬이 은수를 불렀다.
“은수야.”
“응?”
서준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걷고 있던 은수가 아빠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서은찬이 험상궂은 얼굴로 웃었다. 태어날 때부터 봤던 얼굴이라 면역이 된 은수는 놀라지도 않고 동그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음악 듣다가 지루해지면 말하지 말고 아빠 손을 잡아. 그럼 아빠랑 쉬는 시간에 나갈 수 있으니까.”
“안 지루할 건데?”
은수의 말에 서준과 어른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의 집중력이 얼마나 짧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음악 듣다가 졸리고 놀고 싶으면 조용히 아빠 손잡는 거야? 다들 열심히 연주하는데 시끄러우면 슬퍼할 테니까. 수빈이 오빠가 슬퍼하는 건 싫지?”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수빈이가 슬퍼하는 모습을 떠올린 은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가고 싶으면 아빠 손 잡을게!”
“아이고. 우리 딸 착하지!”
고집부리지 않고 잘 대답하는 모습에 감동해 번쩍 들어 올리려는 서은찬을 피해 은수가 꺄르르 웃으며 서준의 뒤에 숨었다. 서준과 어른들도 모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서준과 가족들은 제2홀 안으로 들어가 관객석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앞뒤로 나눠서 앉은 서준과 어른들에게 김희상이 콩쿠르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초등부 본선은 자유곡 하나씩 연주한대. 수빈이는 15번이고.”
“자유곡이면 고르기 힘들었겠다.”
서준의 말에 김희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이도도 생각해야 하고 수빈이가 좋아하는 곡으로 고르느라고 수희가 고생 좀 했지.”
이런 콩쿠르에서는 자신에게 알맞은 곡을 정하는 것도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연주 색에 맞는 연주곡이냐, 아니냐는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수빈이는 뭐 연주한대?”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1악장.”
제목을 들어도 모르는 곡이라 이민준이 두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휴대폰을 꺼내 김희상이 말해준 곡을 찾아보았다. 이어폰을 꺼내서 짧게 들어보기도 했다.
“……어려운 것 같은데?”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잘할 거야.”
서은혜의 말에 김희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고 관객석이 어두워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관객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곧 홀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제8회 ATR 바이올린 콩쿠르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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