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살부터 슈퍼스타-343화 (34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43화

[캘리포니아주]

[LA]

하늘에 떠 있는 카메라가 LA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 있는 해변부터 야자수가 있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경기가 열리고 있는 LA다저스 스타디움과 사람들이 가득한 놀이공원, 유명한 관광지들까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LA를 한 바퀴 돌던 카메라가 한 곳을 클로즈업했다.

새하얗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갤러리아 몰]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새하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북쪽 놀이공원]

가장 먼저 카메라가 향한 곳은 북쪽 놀이공원이었다.

북쪽 놀이공원은 반쯤 천장으로 덮여있었는데 크기가 큰 놀이기구는 천장 밖에, 우천시에도 운영할 수 있도록 작은 놀이기구들은 천장 안에 있었다.

웃으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치고 높게 올라간 자이로드롭에서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웃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다니는 인형들을 보며 꺄르르 웃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 내 풍선!”

아이가 놓친 풍선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밝은 태양 빛에 눈살을 찌푸린 부모가 울상인 아이를 달래며 아이스크림을 사러 향했다.

알록달록한 풍선은 높이 높이 푸른 하늘로 올라갔다.

[동쪽 영화관]

영화를 보러온 가족과 연인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자리를 옮겼다.

[서쪽 식당가]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가족들이 가득했다.

아빠의 손을 이끄는 아이와 맛집 리스트를 보며 의논하는 커플이 보였다.

“난 감자튀김!”

“음료수는 뭘 먹을래?”

아이의 음료수를 시키는 엄마의 뒤로 텔레비전 화면이 보였다.

텔레비전 속 아나운서가 입을 열었다.

<국제 테러조직…… 의 신병을 확보……>

평화로운 LA.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소식이었다.

누군가의 일상 같은, 평화로운 광경에 좀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은 송유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평화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다가올 재앙에 더 조마조마해졌다.

[남쪽 상점가]

스크린에 갤러리아 몰의 남쪽 게이트가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카메라가 사람들을 따라 남쪽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상점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모임이 보였다.

나왔다!

익숙하고도 낯선 차림의 사람들이 보이자 송유정과 임예나가 눈을 빛냈다.

주황색 등산복을 입고 동네 아저씨가 된 김종호가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아들이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대상. 대상이야. 여보.”

“그으래. 대상!”

귀에 쏙쏙 박히는 한국어에 한국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활연기 같은 자연스러운 김종호와 배우들의 연기에 관객들이 빠져들었다.

그 알록달록한 무리의 뒤로 홀로 멀찌감치 떨어져 걷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 첫 해외여행에 들떠 인터넷으로 산 선글라스를 쓴 고등학생, 이현우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무리에서 주춤주춤 멀어졌다.

“현우야! 아들!”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고 걷고 있던 이현우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엄마 아빠 쪽으로 걸어갔다.

“왜? 통역해야 해?”

“아니. 아빠한테는 이 ‘바디 랭귀지’라는 게 있어서 괜찮아!”

우스꽝스러운 아빠의 몸짓에 관객석에서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냥 날 불러.”

이현우의 말에 아빠가 킬킬 웃으며 이현우의 오른손을 턱 잡아 활짝 펼쳤다. 펼쳐진 현우의 손바닥 위에 흰 봉투 하나가 놓였다. 알 수 없는 흰 봉투에 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랑 엄마는 친구들이랑 이 안에서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현우 너도 혼자서 놀다 와. 여기 놀이동산도 있다더라.”

“……그건 또 언제 알아봤대.”

부모님 취향의 패키지여행이라 유명한 놀이동산에 가지 못했던 걸 아쉬워하던 이현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행사 직원한테 물어봤지. 버스 출발 시간은 알지?”

“……응.”

“그럼 그때 보자. 아들.”

이현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빠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이현우는 저 손바닥의 거칠거칠함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이현우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여행 정말 재미있었어. 고맙다.”

“……다음에도 보내줄게.”

진심 어린 아빠의 말에 괜스레 먹먹해진 이현우가 코를 킁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래. 엄마는 영국 가고 싶다더라. 아빤 러시아 가고 싶어. 대륙횡단 해보고 싶었거든.”

그 말에 이현우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현우를 따라 빙그레 웃은 아빠가 말했다.

“재밌게 놀다 와.”

“응. 아빠도.”

멀어지는 어른들을 보는 이현우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 * *

[갤러리아 몰 보안실]

CCTV 모니터가 가득한 사무실에 바쁘게 모니터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비팀장이 CCTV 화면 속에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꼬마. 아까부터 저기 서 있던 것 같은데?”

“미아일까요? 바로 직원한테 연락하겠습니다.”

경비원 중 하나가 무전기를 들었다.

* * *

“안녕. 난 신시아라고 해. 이름이 뭐니?”

“……이안 위버예요.”

갤러리아 몰의 안내 직원, 신시아 린드버그가 웃으며 이안 위버를 살펴보았다. 울지도 않고 불안해 보이지도 않는 모습이 미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누나는 여기서 일하고 있거든.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누나랑 저쪽에 가 있을까?”

신시아 린드버그의 말에 이안 위버의 눈동자가 데굴 굴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희미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스쳐 지나갔다.

놓칠 수도 있는 대사였지만 자막에는 확실히 나와 송유정은 그 문장을 확실히 보았다.

‘……뭐지?’

스크린에는 고개를 젓는 이안 위버의 모습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신시아 린드버그의 모습이 비쳤다.

* * *

갤러리아 몰에서 미아가 생기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곧 아이의 부모가 미아센터로 올 것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CCTV를 보던 경비팀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 앞으로 향했다.

“……저 가방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

경비팀장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알록달록하고 유치한 가방은 그저 어린아이의 분실물처럼 보였다.

“……글쎄요?”

일순 보안실 내부에 긴장감이 돌았다.

평범한 분실물일 수도 있지만…….

“일단 가서 살펴봐.”

“네.”

경비원 몇몇이 밖으로 나갔고 무전기로 밖에 있는 경비원에게도 연락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경비원들을 보고 경비팀장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아까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양도 크기도 다른 ‘분실물’들이 노린 것처럼 기둥이나 벽 앞에 놓여 있었다.

!

그걸 알아채고 놀란 경비팀장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콰아아앙!

폭발음이 들렸다.

가장 먼저 분실물을 발견하고 살펴보러 갔던 남쪽 게이트였다.

* * *

이현우는 놀이공원에 가기 전 한국에서부터 정해둔 엄마아빠의 선물을 고르고 싶었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엄마 아빠를 확인하던 이현우가 열심히 바디랭귀지를 시도하는 아빠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오세요.”

“여기…….”

그때,

콰아아앙!!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를 웅웅 울릴 듯한 커다란 굉음에 이현우와 직원, 그리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진인가?”

“아니야. 이건…….”

지진 같은 땅의 흔들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열된 상품들도 멀쩡히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자잘한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꿀꺽 침을 삼켰다.

“……폭발이야.”

평화로운 일상. 행복한 한때.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콰아아앙!!

스피커를 쩌렁쩌렁 울리는 폭발음에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스크린에 남쪽 게이트 입구가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폭탄의 위력에 날아간 기둥 때문인지 입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은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일제히 차량들이 튀어나왔다. 심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이렌이 울렸다.

그리고,

콰아아앙!

갤러리아 몰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대형마트가 폭발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송유정과 임예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관객들도 헙, 숨을 들이마셨다.

마트에서 튕겨 나온 파편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부서졌다. 차 안에서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망가진 차의 라디오에서 희미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당장 ……의 석방을 요구하며……]

[우리는 ……를 인질로……]

콰아아앙!

LA 다저스 스타디움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유원지가 폭발했다.

차 안에서 그 모습을 황망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남자의 라디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번 말한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명확해졌다.

[우리는 ‘LA’를 인질로 삼고 있다.]

미친……!

송유정은 굳은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본 LA 여기저기에서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 *

사방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에 카메라는 하늘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차량들을 비추었다. 조그마한 장난감 같은 소방차와 경찰차들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송유정이 마른 침을 삼켰다.

한 곳으로만 가도 안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사방으로 흩어지는 차들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카메라가 다시 갤러리아 몰로 돌아왔다.

바깥 사정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빠르게 남쪽 게이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갤러리아 몰의 주차장에서 건물 안에 들어가 나오지 못한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울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딸을 안고 있는 여자가 멍한 얼굴로 갤러리아 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건물의 잔재들이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었다.

콰아아앙!

들려오는 굉음에 이현우가 정신을 차리고 엄마 아빠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송유정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대피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이현우를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모두 남쪽 게이트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여, 여보. 현우는? 우리 현우는?”

“괜찮을 거야. 놀이공원은 북쪽에 있잖아. 일단 우리부터……!”

그때.

엄마 아빠의 눈에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홀로 거슬러 오는 아들이 보였다.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부부가 있는 곳으로 오던 아들이 부부와 시선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었다.

안도한 아들의 웃음에 부부의 심장은 오히려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관객석에서도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해가 가면서도 속이 답답해져 왔다.

“이현우!!”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빠가 외쳤다.

아빠의 고함에 이현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로 향하는 발은 멈추지 않았다.

천장에서 커다란 무언가 떨어졌다. 그게 가족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방이라도 그것이 현우를 짓누를 것 같아 사색이 된 엄마는 비명처럼 외쳤다.

“현우야! 이쪽으로 오지 마! 뒤로 가!!”

“어, 엄마…….”

“이현우! 빨리 피해! 가라고!”

자신을 보내려고 마주 잡은 손을 푸는 엄마의 손을 꽈악 잡은 아빠가 외쳤다. 땀에 젖은 아빠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현우! 가! 이쪽으로 오지 마!”

비명이 들렸다. 무너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가라고--!”

쿠우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 아빠와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무너진 기둥에 완전히 가려졌다. 자신의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돌덩이에 이현우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관객들도 숨을 멈추었다.

스크린 속 무너지는 광경이 보이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도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현우와 함께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가신 것처럼 이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엄마…… 아, 아빠!”

이현우는 다른 말은 잊은 것처럼 엄마 아빠만 외치며 돌무더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거친 돌조각에 손톱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돌을 파냈다. 이현우의 마음속의 절망처럼 새하얀 벽 위에 새빨간 핏자국이 남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려오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손자국이 관객들의 마음에 자국을 남겼다.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현우의 불안과 함께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관객들이 이현우에게 빠지고 있을 때,

“이봐! 정신 차려!!”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피투성이가 된 이현우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거칠고 뜨거운 손에 이현우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가느다란 희망에 심장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뛰었다.

“아ㅃ,”

“빨리 피해야 해!”

아빠가 아니다.

낯선 흑인 남자의 얼굴에 이현우의 심장이 덜컹, 멈춰 버렸다.

* * *

갑자기 정신을 잃은 이현우를 업은 잭슨 밀러는 불빛이 들어오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폭발은 잦아든 것 같았다.

“……잘못 말한 것 같네.”

등 뒤의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잭슨 밀러가 내뱉었다.

너무 급한 상황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동양인 아이가 홀로 갤러리아 몰에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친구나 가족이랑 왔겠지.”

잭슨 밀러는 제 앞에서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두 손을 보았다. 열 개의 손톱이 벌어지고 깨져 성한 것이 하나 없었다. 게다가 손가락의 상처에서 나온 피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그 벽 너머에,

손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터였다. 아마 정신을 잃은 것도 제 말이 방아쇠가 된 탓일 터였다.

“미안하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던 잭슨 밀러의 눈에 천장에 붙어 달랑거리는 안내판이 들어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출입구는…….’

후우, 숨을 내쉰 잭슨 밀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동쪽 영화관이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던 잭슨 밀러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피곤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잭슨 밀러가 숨을 내쉬며 상황을 살폈다. 잭슨 밀러의 등장에도 사람들은 힐긋 쳐다보고만 말았다.

“왜 여기 모여 있는 겁니까?”

잭슨 밀러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상의는 갤러리아 몰의 안내직원의 복장인데 치마가 아니라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의 옆에 남자아이가 있어서 말을 걸기가 수월했다.

잭슨 밀러가 이현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쪽 상점가에 폭탄이 터지고 곧바로 방송실이 있는 동쪽 게이트에도 폭탄이 터졌어요.”

“그리고 그다음엔 서쪽 식당가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대요. 남은 출입구는 북쪽 게이트뿐이에요.”

신시아 린드버그의 설명에 관객들까지 놀랐다. 조금 전부터 바깥 상황은 전혀 보여주지 않아 다른 게이트도 폭발한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생존자들에게 몰입되는 것 같아 송유정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이먼드 위시가 통로를 찾아오자 사람들이 먼저 가겠다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사이, 이안 위버가 이현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따뜻하고 여린 체온에 흠칫 몸을 떤 이현우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말간 눈동자의 어린아이가 이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우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활짝 웃자,

탁!

이현우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쳐버리고 말았다.

놀라기도 할 법한데 이안 위버는 익숙하다는 듯 이현우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레이먼드 위시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주위에 쓸 만한 게 있으면 가지고 갑시다. 먹을 것도 좋고 조명으로 쓸 것도 괜찮습니다. 다 챙기고 여유가 있으면 옷 종류도 챙기십시오.”

그 말에 사람들이 주섬주섬 주위를 살폈다.

아직 전기는 들어왔다. 몇몇 전등이 깜빡거렸다. 신시아 린드버그는 이안 위버가 가방을 메고 있다는 걸 알고 가방을 잠시 빌렸다.

“나중에 가방으로 쓸 만한 거 찾으면 돌려줄게. 과자는 이안이 먹고.”

“네.”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가 이안 위버의 가방에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챙겼다.

근처에 가게가 많아서 그런지 멀쩡한 물건들이 꽤 있었다. 자판기에서 나온 물병들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작은 가방이 가득 차도록 집어넣은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는 다른 것들도 챙겨 생존자 무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아아앙!!

상황을 살펴보던 레이먼드 위시가 무어라 외치려던 순간 바닥이 꺼졌다. 그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시꺼먼 어둠이 사람들을 삼켰다.

* * *

지하로 떨어진 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레이먼드 위시가 손에 든 손전등의 불빛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관객들이 스크린 속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바닥이 흔들리고 이현우가 주저앉았다. 이현우의 신음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레이먼드 위시의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움찔거리는 레이먼드 위시의 손과 팔이 스크린에 비쳤다.

불안하다.

이현우의 앓는 소리는 관객들의 신경까지 깔짝깔짝 건드렸고 눈에 보이는 레이먼드 위시의 불안정함이 관객들의 심장을 불규칙하게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못 해!”

“입 닥치라고! 누군 멀쩡해서 이러는 줄 알아?!”

폭발한 레이먼드 위시가 이현우의 멱살을 잡았다.

이현우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스크린에 비친, 죽어버린 이현우의 눈동자에 관객들도 입을 틀어막았다.

잔잔하던 생존자 무리에 불안한 바람이 불었다.

* * *

“……여긴 아까 왔던 곳이군요.”

주변을 살펴보던 잭슨 밀러의 말에 레이먼드 위시와 신시아 린드버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두운 지하, 막혀 버린 통로, 망가진 안내판으로 북쪽으로 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냥…… 이 자리에 머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구하러 올 때까지 말입니다.”

신시아 린드버그의 말에 잭슨 밀러가 동의했다.

“여기 위로 4개의 층이 있습니다.”

갈라진 레이먼드 위시의 목소리에 신시아 린드버그가 이안 위버의 가방에서 물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갑작스러운 추락으로 챙겼던 물건들의 반도 회수하지 못했다. 뭐든 아껴야 했다.

“갤러리아 몰이 완전히 무너져내렸으면 우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 4층이나 되는 무너진 벽을 뚫고 우리를 찾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 말고 다른 생존자들을 찾으려고 할 테니 속도도 나지 않을 겁니다.”

위층의 생존자들을 구하고 여기 지하까지 내려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레이먼드 위시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북쪽은요?”

“거긴 놀이공원이라 천장이 한 겹뿐입니다. 거기다 야외라 구조에 필요한 기계들을 가까이 가지고 올 수도 있으니 생존자 수색도 거기가 가장 속도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레이먼드 위시의 말은 확실히 납득이 갔다.

앞으로를 대비해 목만 축인 레이먼드 위시에게서 물병을 받아 든 신시아 린드버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떻게 북쪽으로 가느냐가 문제겠네요.”

“나침반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잭슨 밀러의 말에 이현우의 옆에 앉아있던 이안 위버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기억 속, 조용한 병실.

자신의 팔에 시계를 채워준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이안이 엄마를 지켜야 해.’

이안 위버의 시선이 웅크린 이현우에게로 향했다.

“나 있어요.”

“응?”

“나침반.”

세 어른이 놀란 표정으로 이안 위버를 바라보았다.

이안 위버가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신시아 린드버그에게 건네주었다. 시계 속 작은 나침반을 발견한 신시아 린드버그가 환하게 웃었다.

* * *

평화도 잠시.

힘겹게 참아내던 불안 결국 터져 버렸다.

“아아아악!”

이현우의 발작에 레이먼드 위시가 폭발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레이먼드 위시의 기세에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가 레이먼드 위시의 앞을 막아섰다. 이안 위버가 얼른 발작하는 이현우의 위를 감싸 안듯 덮었다.

“제발…… 제발 입 좀 닥치라고!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서 미쳐 버릴 것 같으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레이먼드 위시가 발작하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 괴로움이 가득한 모습에서는 처음 봤을 때의 믿음직한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식당가에 가족이 있어…… 내가 구하러 가야 된다고……!”

가족.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줘……!”

적막이 흘렀다.

레이먼드 위시와 이현우의 흐느낌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미안……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정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흐…… 흐으…….

누구 것인지 모를 흐느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관객들은 옴짝달싹도 못 했다.

이현우의 앞에 웅크리고 있는 레이먼드 위시의 모습에 버럭 화를 내던 그를 안 좋게 보던 관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탈출에 방해만 되는 이현우를 못마땅하게 보던 관객들도 연신 사과하는 이현우의 모습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말로.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 * *

쿠우웅!

‘다행이다.’

이안이 살 수 있어서.

이현우는 덜덜 떨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가로막힌 벽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벽 건너.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사라진 것처럼 자신도.

새까만 어둠은 천천히 이현우의 발을 잡아 발목을 타고 다리를 따라 천천히 기어 올라왔다. 진득한 공포가 이현우를 삼켜,

“뭐 하고 있어?!”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손이었다.

“이리로 나와!”

흐릿한 시야 속에서 보이는 레이먼드 위시의 눈동자에 이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그때.

엄마 아빠에게 닿고 싶었던 손이었다.

으아…….

이현우가 레이먼드 위시의 손을 잡고 돌벽을 넘고 나서야 송유정은 저도 모르게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옆자리에 앉은 임예나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깜빡거리지도 못한 눈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벌써 두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이안 위버가 바닥에 주저앉은 이현우를 꼬옥 껴안았다.

레이먼드 위시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뻐근한 어깨를 움직였다. 신시아 린드버그는 피가 나는 이현우의 다리를 살폈고 잭슨 밀러는 주위를 살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네.”

“힘들면 바로 말해.”

이안 위버는 이현우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잭슨 밀러가 이안 위버를 잘 달래 업었다. 아까 이 작은 손을 놓쳤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출발합시다.”

레이먼드 위시가 다시 앞장섰다. 좁을 길을 따라 생존자들이 걸음을 옮겼다. 이안 위버는 잭슨 밀러의 등에 업히고 잭슨 밀러가 지칠 때는 신시아 린드버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위험해 보이는 길에선 레이먼드 위시의 등에 업혔다. 조금 거칠게 이안 위버를 업은 레이먼드 위시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잭슨 밀러는 이현우를 부축했다.

의지할 빛은 손전등 하나 휴대폰 조명 하나에 꽉 막힌 주위 환경은 정신적인 충격이 큰 이현우에겐 너무 안 좋은 상황이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정신을 아예 놓은 것 같군.’

아까 억지로 버틴 영향 때문인지 지금 이현우는 반쯤 정신을 놓고 그저 걷는 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잭슨 밀러는 한숨을 쉬며 이현우의 차가운 손을 꾹 잡았다.

“전 가족들이 밖에 있습니다.”

가족.

이현우가 조금이라도 삶의 의지를 찾을 수 있도록 잭슨 밀러는 그의 트리거를 일부러 꺼냈다. 잘못하면 상황이 더 악화할지도 몰랐지만, 잭슨 밀러는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잭슨 밀러가 입을 열자 말없이 걷던 생존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이현우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인식했다.

“며칠 후가 딸아이의 생일이거든요. 휴대폰을 놔두고 왔다고 이야기하고 몰래 선물을 사러 들어왔는데…… 이렇게 갇히게 돼버렸네요.”

잭슨 밀러의 오늘 하루가 짤막하게 지나갔다.

갤러리아 몰 주차장에서 아차 하고 이마를 짚는 아빠를 보며 여자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설픈 남편의 연기에 아내도 숨을 죽이고 웃었다.

“많이 걱정하고 있겠네요.”

신시아 린드버그가 입을 열었다.

“전 여기서 일해요. 가족들은 집에서 뉴스로 보고 있겠죠. 할머니가 심장이 약하신데…… 많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활짝 웃으며 출근한 신시아 린드버그의 모습이 짧게 비추었다. 유니폼을 입고 친절하게 손님들을 안내하는 모습이었다.

신시아 린드버그의 말에 레이먼드 위시와 잭슨 밀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안 위버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럼…… 이안이랑은 무슨 사이입니까?”

“이안이 혼자 있어서 미아센터로 데려가려고 했죠. 여긴 크기도 크고 하루에 한 명씩은 미아가 꼭 생기거든요. 방송할 생각이었는데…….”

“미아 아니에요. 엄마가 기다리면 온다고 했는데…….”

레이먼드 위시의 등에 업혀 꼭 잡고 있던 이안 위버가 입을 열었다. 등에 얼굴을 푹 묻은 이안 위버의 행동에 자세가 조금 불편해진 레이먼드 위시가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근데 안 올지도 몰라요.”

이안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른들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조금 정신이 든 이현우도 이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이먼드 위시의 등에 얼굴을 묻은 이안 위버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저씨한테서 엄마를 지켜주지 못하니까 미워진 거예요. 아빠가…… 아빠가…… 나한테 엄마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는데…….”

축축하게 젖어들어 가는 등에 레이먼드 위시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왜 이상하단 걸 깨닫지 못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울지 않는 아이가 착하다고?

신시아 린드버그도, 잭슨 밀러도, 이현우도 그걸 깨달았다.

어른인 레이먼드 위시도, 이안 위버보다 큰 이현우도 견뎌내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 작은 아이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나는 혼날 때마다 옷장 안에 있어서 어두운 거 안 무서워요. 엄마는 형처럼 어두운 거 무서워해요. 맨날 아저씨가 때려서 형처럼 아파요.”

이안 위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토해놓았다.

엄마를 닮은 형이 있고 아저씨를 닮았지만, 등을 내주는 어른이 있었다. ‘아저씨’가 오지 못하는 꽉 막힌 ‘지금’이 이안 위버에게 안도감을 줬다.

이현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어둠 속 따뜻한 온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왜.”

“형 때리지 마요.”

“……안 때려.”

레이먼드 위시로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멱살을 잡긴 했지만 한 번도 이현우를 때린 적은 없었다.

“소리도 지르지 말구요.”

레이먼드 위시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귀가 아파서 조금밖에 안 들리는데 형은 잘 들리니까 엄청 무서울 거예요. 나도 어렸을 땐 엄청 무서웠어요.”

아이의 말에 레이먼드 위시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쉬었다 가죠.”

레이먼드 위시는 거칠게 업었을 때와는 달리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이안 위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뭐, 좀 친절한 아저씨라도 남자 어른은 무섭다.

이안 위버는 등에서 내려오자마자 엄마를 닮은 이현우에게로 달려갔다.

툭툭 치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창백한 얼굴도 엄마를 닮은 형이었다. 엄마처럼 아까 구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이안이 좋은 걸까?’

달려오다 주춤거리는 이안 위버를 보며 이현우가 덜덜 떨리는 두 팔을 조금 벌렸다. 이안 위버가 활짝 웃으며 이현우의 품에 안겼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두운 고통 속에 있었을,

조그맣지만 대견한 온기에 이현우는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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