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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36화 (33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36화

“아. 자유롭게.”

데이비스 가렛이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준과 배우들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해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오전 촬영 후 점심시간.

[생존자들]의 배우들과 감독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어떻게 갑자기 ‘감독판’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됐냐는 데이비스 가렛의 질문에 제프리 감독이 조금 민망해하면서 요즘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아직 어린 앤드류는 전혀 이해 못 하는 듯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지만, 배우들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세 배우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바네사 올슨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럴 때가 있죠. 진짜 끌리는 작품인데 도저히 흥행할 것 같지 않은 작품이요. 지금도 조금 꺼려지는데 신인 때는 오죽하겠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얼굴을 알려야 하는 바쁜 신인 때였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려 다음 출연 기회의 가능성이 큰 흥행작에 출연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가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요.”

그 말에 다들 동의했다.

데이비스 가렛이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근데 그 말은 감독님께 한 말은 아닌데 말입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그냥 그 말이 마음에 박히더군요.”

제프리 감독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제 해석도 꽤 괜찮지 않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데이비스와 준이 별말 없이 대본을 따라 연기하는 장면도 늘었잖습니까.”

밀란 첼런의 말에 바네사 올슨이 작게 웃었다.

“그럴 때는 촬영이 끝나면 왠지 두 사람 다 분해 보이기도 하던데요.”

어쩐지 조금 찔렸다.

데이비스 가렛과 서준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마주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감독님은 처음 보니까요. 보통은 내 말을 그저 받아들이거나 아예 반발하는데 감독님이 먼저 대본을 수정해서 들고 오고 의논하고 또 수정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감독님이 저보다 캐릭터 해석을 잘하시면 조금 울적하긴 해요.”

서준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보통은 대본 그대로 연기하는 게 배우인데 말입니다. 이런 촬영은 처음이네요. 제 대사는 바뀐 게 많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맞아요. 전 이런 거 못 해요.”

밀란 첼런의 말에 바네사 올슨이 두 손을 들었다. 냠냠 점심을 먹으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앤드류도 잠시 생각하더니 번쩍 두 손을 들었다.

“저두요!”

아직 어린 배우의 귀여움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목표가 하나 생겼습니다.”

“목표요?”

제프리 감독의 말에 식사를 마친 배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비스와 준이 단 하나의 글자도 수정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프리 로덕스 감독의 눈이 번들거렸다.

오.

배우들이 놀란 표정으로 제프리 감독과 데이비스 가렛, 서준을 번갈아 보았다.

제 앞에 던져진 도전장에 데이비스 가렛이 눈을 번쩍였다.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감독님.”

“알고 있습니다.”

감독과 영화배우가 다시 만나기 위해선 감독의 시놉시스가 제작사의 선택을 받아야 했고 그다음에는 영화배우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거기에 첫 시도부터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는 어려우니 몇 번이고 도전해야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프리 감독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 다 평생 연기를 하실 거지 않습니까? 저도 평생 영화를 만들 테니까요. 시간은 넉넉하지요.”

그 말에 데이비스 가렛이 한 방 먹은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유쾌하게 웃었다.

“네. 그렇네요. 그럼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마주 보며 웃는 데이비스 가렛과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서준만 멋쩍은 얼굴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음. 난 원래 대본대로 연기하는데…….’

이번 [생존자들]이 특별한 경우일 뿐이었다.

‘즉흥 연기가 재미있긴 했지만 다른 작품에선 데이비스처럼 받아줄 상대역은 거의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애드리브를 넣는다고 해도 ‘생존자들의 촬영’처럼 할 생각은 없는 서준이었다.

‘뭐. 그래도…….’

“저도 기대할게요. 감독님.”

완벽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제프리 감독이 만들어낼 작품이 궁금하니 괜히 제프리 감독의 의욕을 꺾지 않게 조용히 있기로 한 서준이었다.

‘좋은 대본♪ 좋은 대본♪’

어쩐지 콧노래가 나왔다.

* * *

‘감독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로 [생존자들]의 세트장은 확 바뀌어 있었다.

“시간이 안 되면 돈으로……!”

그렇게 말한 제프리 감독이 기획팀장에게 요구하고 기획팀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이전 촬영보다 2배로 늘어난 카메라가 세트장을 둘러쌌다.

그중 반은 개봉판을, 나머지 카메라들은 감독판을 찍는 카메라였다. 물론 편집 때 바뀔 수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카메라라니…… 익숙해지질 않네.”

“그러게. 배우들은 잘도 집중하던데 말이야.”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도 조금 생소한 광경이었다.

“세트장에 올라가면 안 찍히는 곳이 없을 것 같은데?”

배우가 서는 곳은 물론이고 서지 않는, 그저 배경인 곳까지 카메라가 비추고 있었다. 그러니 미술팀으로서는 전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복구할 수밖에 없었다.

“세트장 하나씩 더 만들고 있다는 거 들었어요?”

“하나 더?”

“네. 무너지면 복구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하나 더 만든대요. 이쪽에서 촬영하고 복구하는 동안 저쪽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거죠. 완전히 똑같이 만든다고 미술팀 스태프도 더 고용했대요.”

“……그거 세트장만이 아니라 기계도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까요. 기계도 벌써 다 구했대요.”

“이야…….”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의 속도였다.

* * *

“레디, 액션!”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조용함이 지하에 내려앉았다.

아니.

여기가 지하인지 지상인지도 모르겠다. 어떨 때는 평지처럼 걸었고 어떨 때는 오르막처럼 기어올랐다. 그리고 어떨 때는 조심히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저 북쪽.

생존자들은 나침반의 바늘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길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레이먼드 위시가 가장 앞에 서고 그 뒤를 신시아 린드버그, 잭슨 밀러와 이안 위버, 이현우가 쫓았다.

“……밖에 가족이 있으시잖아요.”

잭슨 밀러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맨 뒷자리로 가버린 소년을 돌아보았다. 맨끝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하던 이현우의 창백하던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돋는 것 같았다.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걱정이 들었다.

잭슨 밀러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이안 위버의 시선도 자꾸만 뒤로 향했다. 이현우와 함께 걷고 싶었지만, 얌전히 잭슨 밀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현우는 멀어질 듯 말듯 생존자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큰 흔들림이 생겼다.

폭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충격이 이곳까지 전해진 듯했다. 불안정하던 주변의 벽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특히.

이현우의 뒤쪽이 심상치 않았다.

“앞으로!”

레이먼드 위시의 목소리에 신시아 린드버그와 잭슨 밀러가 곧장 앞으로 향했다.

마침 뒤를 돌아보고 있던 이안 위버가 무언가에 걸린 듯 넘어졌다. 손을 잡고 있던 잭슨 밀러도 순간 중심을 잃었다. 두 사람이 마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

그와 동시에 잭슨 밀러와 이안 위버의 사이로 기둥이 무너져내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깔릴 뻔했다.

쿵!

쿠웅! 쿵!

무너져내리는 돌무더기 때문에 앞으로 엎어진 이안 위버의 눈앞에 벽이 생겼다. 이안 위버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쌓여가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놀란 이안 위버를 안아 드는 두 손이 있었다.

이안 위버가 고개를 돌렸다. 흔들림에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이현우가 보였다.

이현우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팠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이현우는 제 옆에 있던 온기를 기억했다.

내치기만 하던 자신에게 말을 걸던 아이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아저씨!”

벌써 이현우의 가슴까지 막혀 버린 통로.

벽 너머 다급한 표정의 세 어른이 보였다.

“아저씨!”

이현우와 눈이 마주친 잭슨 밀러가 얼른 손을 뻗었다. 이안 위버는 잭슨 밀러의 손에 이끌려 기둥을 넘었다. 뒤를 돌아보는 이안 위버의 눈에 비친 이현우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이안 위버가 벽을 넘어가고,

쿠우웅!

주변이 무너져내렸다.

이현우와 생존자들을 가로막고 있는 벽도 벌써 이현우의 턱밑까지 올라왔다.

쿠우웅.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입술에 느껴지던 고통도 이현우의 머릿속을 잠식하는 혼돈에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숨이 가빠졌다. 쿵쿵 울리는 소리와 진동이 이현우를 미치게 만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려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로막힌 벽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갈라지고 부서진 손톱과 엉망이 된 자신의 손이 보였다.

차가운 벽 건너.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사라진 것처럼 자신도.

새까만 어둠은 천천히 이현우의 발을 잡아 발목을 타고 다리를 따라 천천히 기어 올라왔다. 진득한 공포가 이현우를 삼켜,

“뭐 하고 있어?!”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떨어지는 흙먼지 속 내밀어진 흙투성이의 손에 이현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현우의 고개가 손을 따라 위로 향했다. 천장이 무너져 가로막힌 앞과 달리 위쪽에 좁은 공간이 생겼다.

패닉으로 시야가 좁아져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틈도 오래갈 것 같진 않았다.

“이리로 나와!”

손의 주인은 잭슨 밀러도 아니었고 신시아 린드버그도 아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레이먼드 위시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보이는 그 불같은 눈동자에 이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레이먼드 위시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

엄마 아빠에게 닿고 싶었던 손이었다.

* * *

“구하네요.”

“하하.”

제프리 감독의 말에 데이비스 가렛이 웃었다.

“나오네요.”

“하하하.”

서준도 이젠 제법 익숙하게 웃음으로 때웠다.

[생존자들]을 촬영하면서 많이 본 모습에 스태프들도 배우들도 어깨를 떨며 웃음을 참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홀로 고립됐을 이현우였다.

‘그렇게 간단하게 될 리는 없나.’

제프리 감독이 팔짱을 끼며 바로 다음 내용을 구상했다.

두 배우의 즉흥 연기는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이마를 짚는 행동도 필요 없었다.

“!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클로즈업 샷 촬영하고 감독판도 촬영하죠!”

제프리 감독의 말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다시 분장을 받는 동안 스태프들이 스튜디오에 마련되어 있던 두 번째 세트장을 준비했다.

“아. 감독님. 마지막에 기둥에 다리가 닿았어요.”

먼지를 털어내는 스태프들의 가운데에 서 있던 서준이 말했다.

낚아챈 물고기처럼 레이먼드 위시의 손에 이끌려 벽을 넘어올 때 무너지는 기둥에 이현우의 다리가 스쳤다.

배우들의 몸에 닿을 수도 있는 세트는 모양만 그럴 뿐이지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타이밍이 늦어 탈출하지 못했더라도 약간의 압박감만 느꼈을 터였다.

서준의 말에 제프리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현우는 다리를 다친 상태고…… 오른쪽이에요? 왼쪽이에요?”

“왼쪽이요.”

“왼쪽. 체크.”

그렇게 상황을 체크한 제프리 감독과 배우들은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 * *

시간이 흘러, 2월 말.

[할리우드 배우 이서준, 귀국!]

[영화 ‘생존자들’ 촬영 종료!]

[베어라운드의 ‘생존자들’ 개봉은 언제?]

생존자들의 촬영을 모두 끝낸 서준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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