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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35화 (335/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35화

“……이건 안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호함이었다.

기획팀장의 거친 목소리에 제프리 감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감독이 원하면 건물도 폭파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했던 기획팀장이 아니었던가.

데이비스 가렛의 수정도 순순히 받아들였던 기획팀장이라 제프리 감독은 그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획팀장이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서준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기획팀장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 난감함과 어색한 분위기에 의욕적으로 불타오르던 제프리 감독의 기세가 반쯤 줄어들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기획팀장이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니 대본을 읽는 사이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기획팀장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흥행이 안 됩니다.”

흥행.

막대한 제작비를 쓰는 만큼 수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제작사 아닌가.

이 자리에서 제작사를 대표하는 기획팀장인 만큼 반대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서준은 물론이고 다른 배우들도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많은 작품을 봐 온 만큼 눈앞에 있는 이 대본이 그렇게 흥행성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여기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관객 하나가 있지 않나.

놀란 표정으로 대본을 다시 읽는 앤드류 워커의 모습에 서준이 쓰게 웃었다.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이걸론 흥행은 힘들겠지.’

흥행이 어렵다는 건 촬영을 위해 고생한 스태프들, 배우들, 그리고 베어라운드 직원들에게도 나쁜 소식이었다. 그걸 알면서 이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서준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대본을 바라보았다.

“……배우들이 있으니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프리 감독의 시선이 배우들에게로 향했다.

그곳엔 둘째가라면 서러울 티켓 파워를 지닌 배우들이 있었다.

영원한 히어로, 레드본의 데이비스 가렛.

가장 사랑받는 빌런, 진 나트라의 서준 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밀란 첼런.

제프리 감독의 애타는 눈빛에 가장 영향력 있는 데이비스 가렛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희를 믿어주시는 건 좋지만…… 아무리 대단한 배우라도 작품이 받쳐주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감독님.”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읽은 제프리 감독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반짝 빛나고 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대본은 괜찮다고…….”

“그거야 배우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난감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밀란 첼런의 말에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흥행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서준까지 그렇게 말하자 제프리 감독이 낙담한 얼굴로 앞에 놓여 있던 [생존자들-수정2]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머릿속이 먹구름이 낀 듯 막막해져 왔다.

‘……역시.’

역시 그냥 안정적인 대본으로 갈 걸 그랬다.

그 영화감독의 말이 맞았던 거였다.

“아…… 그렇군요…… 네…… 아, 죄송합니다. 괜히 촬영 시간만 낭비했네요.”

완전히 기가 죽은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배우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약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기획팀장도 한숨을 내쉬려다가 삼켰다.

“그럼 내일 촬영은 원래 수정본대로…….”

제프리 감독의 폭주는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다.

대본을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감독판은 어떨까요?”

감독판.

디렉터스 컷.

제작사의 의도가 담긴 영화(일반판)와는 달리 개봉 이후 감독의 의도에 맞게 재편집한 영화.

흥행을 위해서든, 영화 관람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든,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서든 제작사의 의도에 따라 편집되고 삭제되는 영화를 감독의 의도대로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서준의 말을 천천히 되새기던 배우들이 반색했다.

보통 감독판은 전부 촬영한 후 편집에서 제작사의 의견과 감독의 의견이 부딪혀 정해지는 것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거 괜찮은 것 같은데?”

“감독판이라면 딱히 흥행이랑 상관없으니까.”

배우들의 반응에 제프리 감독이 눈을 끔벅였다. 기획팀장도 서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감독판이요?”

“네. 감독판이니까 제프리 감독님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요?”

밝은 표정으로 말한 서준의 시선이 기획팀장에게로 향했다.

“제가 실무는 잘 모르지만요.”

조금 민망한 듯 웃는 서준의 모습에 기획팀장이 생각에 잠겼다.

“감독판이라…….”

기획팀장이 입을 열자 모두 귀를 기울였다.

“보통이랑은 상황이 다르긴 한데……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짐작일 뿐이라 개봉을 확답할 수는 없지만, 감독판이니까 감독님 마음대로 만드셔도 될 겁니다.”

“개봉을 못 한다면…….”

볼 사람이 없는 것 아닌가.

제프리 감독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서준은 환하게 웃었다.

“개봉 못 하게 되면 플러스에 올리는 건 어때요, 감독님? 제가 플러스 한국 지사장님하고 조금 친분이 있거든요. 한번 여쭤볼게요!”

멀찍이 앉아 있던 안다호가 서준의 말에 피식 웃었다.

부탁이 뭐냐.

‘이서준 출연의’ ‘감독판’ 영화가 있다는 것만 은근슬쩍 흘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 터였다.

거기다 여기 있는 배우들의 얼굴만 봐도 여기저기서 제안이 들어올 테고 어쩌면 기획팀장의 걱정과는 달리 영화관 상영도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럼 감독판으로 가시죠. 감독님.”

“재미있을 것 같네요.”

즐거워 보이는 배우들의 모습에 기획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분. ‘생존자들’도 잊지 말아 주세요.”

기획팀장의 지적에 서준과 배우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감독판이 확정된 건 아니니 ‘생존자들’에 더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감독판이 확정되더라도 말이죠.”

“촬영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서준의 믿음직한 말에 기획팀장도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촬영장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줬던 배우들을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나.

“그리고 제프리 감독님.”

어느새 ‘감독판’ 이야기가 반쯤 확정된 것 같았다.

멍하니 듣고 있던 제프리 감독이 기획팀장의 부름에 놀라 대답했다.

“네, 네?”

“감독판은 가능하면 ‘생존자들’의 촬영본을 이용해 만들어주시고 ‘생존자들’과 다른 장면을 찍을 때는 최대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정해진 일정 내에서 촬영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감독판’만을 위해 촬영 일정을 늘리겠다고 하면 반발이 있을 테니까요.”

기획팀장의 말에 제프리 감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의 일정 내에서 촬영한다고 위쪽에 말하면 아마 긍정적인 답이 올 겁니다.”

감독판을 위해 노력하는 기획팀장의 모습에 제프리 감독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본을 수정해야겠네요.”

“내일 촬영은 못 미룹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의욕이 생긴, 아니, 더 불타오르는 듯한 제프리 감독이 배우들을 모아 내일 촬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부턴 배우와 감독의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안 주시는 겁니까?”

“예?”

뒤로 물러난 기획팀장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획팀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준 리의 매니저였다.

“감독판 때문에 준의 일정이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획팀장님은 그걸 꺼리는 눈치라서 말입니다.”

서준 리의 매니저, 안다호의 물음에 기획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개의 대본을 펼쳐 열정적으로 말하는 제프리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들 중에 저런 유형이 종종 있습니다. 예술가 타입이랄까. 순순히 데이비스의 수정을 허락하셔서 제프리 감독님이 그런 타입인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입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계기로 꽃 피우게 된 모양이었다.

“보통 저렇게 자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건 독립영화 쪽에서 다 분출하고 상업영화를 시작하면서 흥행성과 적당히 타협을 보거든요.”

기획팀장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여러 가지 주제를 여러 가지 시점으로 보여주는 독립영화와는 달리 상업영화는 흥행을 위해서 대부분 비슷비슷한 것과 같은 이유일 터였다.

“물론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면서 흥행까지 얻는 천재적인 감독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죠.”

안다호가 무언가를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프리 감독님은 반대군요.”

“네. 계약 전에 제프리 감독님의 작품을 살펴봤는데 독립영화들도 첫 번째 상업영화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길래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터져 버릴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감독판 대본을 읽었을 때의 아찔함이 다시 떠오르자 기획팀장은 이마를 짚었다.

감독판이라는 방법이 없었거나 제프리 감독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면 [생존자들]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최악의 경우에는 영화가 엎어질 수도 있었다.

‘그전에 감독을 교체하겠지만 말이야.’

미간을 꾹꾹 누른 기획팀장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자신의 예술을 찾은 제프리 감독님은 지금 하고 싶은 게 엄청 많으실 겁니다. 그럴 때는 완성본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엎고 엎는 게 일상이고요. 제프리 감독님이 원하는 그 모든 장면을 찍었다가는 배우들도 스태프도 못 견디겠죠.”

일정이 늘어진다.

그건 2월 말까지 촬영이 계약된 서준 리의 매니저에게도, 앞으로의 일을 모두 계획해 둔 베어라운드에도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마감에 쫓겨야 더욱 실력을 발휘하거든요.”

안다호는 그제야 왜 기획팀장이 일정을 더 늘린다고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갔다.

기획팀장이 흐흐흐 악당처럼 웃었다.

“시간은 촉박하게 돈과 영감은 충분히. 지금의 제프리 감독님에게는 가장 맞는 방법일 겁니다.”

능력 있는 기획팀장은 사람을 다루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베어라운드에서 회의가 열렸다.

흥행이 보장된 대본을 놔두고 새로운 대본이라니.

게다가 그 내용을 읽어보면 영 흥행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감독판’이라는 것에 베어라운드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홍보용으로는 괜찮을 것 같은데?”

“따로 시간을 내서 찍는 게 아니라 지금 촬영 기간 내에 찍는 거라면…… 뭐…….”

“개봉판 촬영에 영향을 끼치진 않겠습니까?”

그 질문에 기획팀장에게 시선이 모였다.

“일단 지금까지 촬영한 [생존자들]의 편집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새하얀 스크린에 어둠이 내렸다.

CG 작업이 필요한 장면을 빼고 배우들이 가장 빛나는 장면들을 모아놓은 편집본이었다.

서준과 데이비스 가렛의 열연에 모두 숨을 죽였다.

이렇게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이 ‘감독판’을 촬영한다고 해서 힘을 빼고 연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부 시사회를 연 다음, 감독판을 영화관에 올릴지 말지 결정합시다.”

기획팀장이 주먹을 꽉 쥐었다.

[생존자들]의 감독판에 대한 승인이 떨어졌다.

* * *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입니다. 감독님.”

스케줄이 더 늘어나지 않게.

기획팀장에게 충분히 이야기를 들은 조감독이 제프리 감독에게 말했다.

그 말에 제프리 감독이 덜덜덜 다리를 떨었다.

베어라운드에서 오는 제작비는 상상 이상인 데다가 배우들의 멋진 즉흥 연기를 보면서 생기는 아이디어도 넘쳐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촬영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죠?”

“3주하고도 2일 14시간 남았습니다.”

분까지 말해드릴까요?

친절한 조감독의 목소리에서 왠지 기획팀장의 심술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3주 2일 14시간도 온전히 촬영만을 위한 3주 2일 14시간이 아니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위한 휴식시간도 틈틈이 있었다.

으아아아아!

촉박한 촬영 일정에 제프리 감독이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시간이 촉박하니 머리를 최대한 짜내어 가장 좋은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장면을 떠올려도 아주, 멋진, 두 배우가 소름 끼치는 즉흥 연기로 뒤집어버리니 새로운 장면을 떠올려야 했다.

머리가 아팠다.

머리가 너무 아픈데…….

재밌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자신은 상상도 못 한 두 배우의 즉흥 연기에 한 방 먹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자신이 내민 대본에 한 방 먹은 데이비스 가렛과 서준 리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대본 그대로 연기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일 촬영에선 누가 이길지 기대가 됐다.

“아. 이건 너무 갔다.”

그런 수정, 수정, 수정 속에서도 두 배우와 감독은 작품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적고도 별로인 대사들을 백스페이스로 전부 지워 버린 제프리 감독은 다시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으흐흐흐.

웃으며 대본을 수정하는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촬영장을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 순하던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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