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34화
오늘 촬영을 모두 끝내고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베어라운드에서 마련해 준 작업실로 향하던 제프리 감독은 아주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프리 로덕스.
또래 친구들보다 체력이 약했던 터라 집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했던 소년은 훌쩍 자라 자신이 바라는 대로 영화감독 지망생이 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안전형이 제일 좋죠.”
그건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비슷한 부류의 지망생들을 위해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강의였다.
강단에 선 영화감독이 대답했다.
어떤 종류의 시나리오가 제작사나 투자사의 관심을 받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물론, 소심한 제프리 로덕스는 조용히 강의만 듣고 있었다.
“클리셰가 왜 클리셰일까요? 재미있지 않은 요소라면 금세 사라졌겠죠. 그 오랜 기간 클리셰라는 이름으로 남겨질 정도로 대중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 클리셰의 작품은 삐끗하지만 않는다면 투자한 만큼 회수할 수 있어서 투자사들도 제작사들도 관심을 가집니다.”
영화감독이 강의실을 빼곡히 채운 지망생들을 바라보았다. 영화, 드라마, 연극 등 각자 목표하는 작품이 다른 지망생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많은 지망생 중 얼마만큼이 메가폰을 잡고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중 얼마만큼이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제작사와 투자사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투자금 회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에게는 차갑고 냉정한 조언이었다.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 이상의 흥행이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게 자주 일어나는 상황은 아닙니다. 특별한 재능 있는 감독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제프리 로덕스가 침을 삼켰다.
자신은 그렇게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 무서워졌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도박 같은 일입니다.”
이제야 살갗까지 와닿은 것 같았다.
정말로 영화감독이 된다면 영화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대중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주제를 고르고 매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정신없이 빠져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끝이 아니죠.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들을 고르고 캐스팅하고. 투자사와 제작사를 신경 써야 하는 데다가 촬영 동안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영화감독이 지망생들을 둘러보자 강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그걸 모두 고려해서 만들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게 영화입니다. 그렇게 되면 몇백억이 홀라당 사라져 버리죠. 할리우드 영화라면 몇천억이 될 겁니다.”
몇백억. 몇천억.
제프리 로덕스는 꿈도 꿔보지 못한 액수에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처음 실패를 하면 그다음의 조건은 더 어려워집니다. 경력에 실패작이 딱 찍히죠. 자, 생각해 보세요. 제작사의 앞에 이력서가 놓입니다. 실패한 영화감독, 의욕이 가득한 신인 감독, 흥행 감독. 몇백억을 투자하는 제작사의 입장에서 누구를 고를지 아시겠습니까?”
주위를 둘러본 영화감독이 말을 이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제작사와 투자사의 목적이 투자금 회수라고 한다면 그런 작품은 어떻게 만드느냐. 대중이 좋아하는 클리셰에 약간의 특별함을 넣어주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죠. 그러니까 제작사와 투자사가 원하는 시나리오는 너무 튀지 않는 안전형일 겁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강의였다.
그다음 강의가 ‘자신의 예술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는 영화감독의 강의일 만큼 다른 의견을 가진 감독들의 수많은 강의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제프리 로덕스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안전형……!”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게 가장 싫은 제프리 로덕스는 몇백억씩이나 되는 투자금을 그대로 날려버릴까 봐 걱정이 가득했다.
“……이거 너무 적지 않냐?”
“충분…… 하지 않을까?”
독립영화를 만들 때도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영화보다는 안전한 클리셰에 특별함을 한 스푼을 넣어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투자금도 아끼고 아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이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첫 번째 상업영화도 투자금을 전부 회수했다. 안정적으로 감독 생활을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그 영화감독의 말이 제프리 로덕스의 가슴 속에 콕 박혔다.
제프리 로덕스는 두 번째 상업영화, [생존자들]도 재난물의 클리셰에 특별함을 하나 넣어 만들었다. 그리고 제작사에 시놉시스를 뿌리고 그중 한 군데인 베어라운드와 계약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상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본 수정으로 악명 높은 데이비스 가렛이 출연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생각지도 못했던 서준 리가 캐스팅되지 않나.
그 덕분에 촬영도 하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작비도 늘었지.’
처음 보는 막대한 투자금에 눈 딱 감고 지른 세트장은 지금 봐도 감탄스러우면서도 아찔했다. 이 영화가 망하면 그 많은 투자금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베어라운드가 마련해 준 자신의 작업실에 도착한 제프리 감독이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계약금으로 산 신형 노트북이지만 왜 이렇게 느리게 켜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존자들]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제프리 감독은 대본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데이비스 가렛의 안정적인 연기에 안심했다.
‘……아니.’
완전히 켜진 노트북 화면에 적힌 [생존자들] 파일에 제프리 로덕스가 솔직하게 제 마음을 토해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캐릭터’를 연기해 봐. 대본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제작사가 허락하고 감독님까지 허락하는 이런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 말이야.]
자유롭게.
그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데이비스 가렛이 말한 그 단어는 배우들뿐만이 아니라 제프리 로덕스의 마음도 울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말이야.’
무의식중에는 그 말을 듣고 연기할 배우들에게 조금 기대를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대본대로 촬영하는 배우들의 촬영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다.
‘준이야 충격적으로 잘했지만 말이야.’
조금의 아쉬움과 조금의 안도감이 들었을 때,
악명 높은 데이비스 가렛이 움직였다.
자신의 대본과는 전혀 다른 대사와 움직임. 캐릭터의 성격.
거기에 서준까지 ‘안정적인’ 자신의 대본을 벗어나 연기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제프리 로덕스는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짜릿한 전기가 등을 따라 머리털까지 삐죽 서는 것 같았다.
두 배우의 멋진 연기에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자신의 ‘안정적인’ 대본이 너무 속이 시원했다.
자유롭게.
제프리 감독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두근두근 신나게 뛰는 심장을 그대로 느끼며 마우스를 쥐었다.
모니터 한쪽에는 [생존자들-원본] 파일이 켜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생존자들-수정] 파일이 켜져 있었다.
“……좋아.”
제프리 감독이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새하얀 바탕에 커서만 깜빡거렸다.
텅 빈 화면에 손이 근질근질했다.
제프리 감독은 오늘까지 촬영했던 내용을 차례차례로 떠올리며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클리셰가 뭐냐.
안전형?
안전하다가 답답해 죽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다……!”
타닥타닥.
모니터의 불빛에 반사된 제프리 로덕스 감독의 눈이 번들거렸다.
제프리 감독이 작업실에 있다는 소리에 잠시 들른 베어라운드 직원이 이히히히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광기에 휩싸인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
* * *
이틀 후.
베어라운드 본사 회의실.
제프리 감독의 요청으로 촬영이 하루 미뤄졌던 터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준과 배우들의 앞에 종이뭉치가 내밀어 졌다.
[생존자들-수정2]
종이뭉치를 내민 제프리 로덕스 감독은 초췌해 보였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하며 핏발이 가득한 눈동자, 입술까지 바짝 말라 터져 있었다.
이틀 만에 변한 얼굴에 배우들이 놀라 얼굴로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밤새우셨어요?”
“네. 조금. 괜찮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환하게 웃는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얼마 전까지 제프리 감독은 소심한 데다 유약해 보였고 지금은 그때보다 초췌해져 더 약해 보였다. 근데 분위기가 달랐다.
제프리 감독을 살펴보던 서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눈빛 때문인가?’
어쩐지 익숙한 눈빛이다.
“오호.”
데이비스 가렛과 밀란 첼런, 바네사 올슨도 달라진 제프리 감독의 분위기를 느꼈다.
“좋은 이야기가 나왔나 보네요.”
지금까지의 제프리 감독에게는 희미하게만 보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고집하는 감독들의 눈빛이었다. 그런 고집이 항상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제프리 감독에게는 필요한 마음이었다.
많은 감독들을 봐왔던 밀란 첼런의 말에 제프리 감독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네. 부디 여러분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제게 수정 권한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감독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데이비스 가렛에 제프리 감독이 끄응 앓았다.
“그럼 읽어볼까요?”
서준의 말에 모두 자신의 앞에 놓인 대본을 펼쳤다. 앤드류 워커도 서준의 옆자리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대본을 읽어나갔다.
“오호…….”
“……으음.”
의미를 알 수 없는 배우들의 모습에 초조해진 제프리 감독이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까지 수정이라니.
대형사고도 이런 대형사고가 없었다.
부디 세트장이 많이 바뀐 게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기획팀장도 제프리 감독의 대본을 펼쳤다.
‘……촬영분까지는 쓰실 예정인가 보네.’
이틀 전 촬영분까지는 그대로 쓸 예정인지 앞부분은 짤막한 줄거리로 적혀 있었다.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획팀장이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대본을 다 읽은 사람은 서준과 데이비스 가렛이었다.
대본을 덮은 데이비스 가렛이 턱을 긁적거렸다. 왠지 미안한 표정이었다.
“……내가 원인인 건가?”
데이비스 가렛의 말에 서준이 웃고 말았다.
제프리 감독님이 대본을 뒤집어 엎은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데이비스 가렛의 즉흥 연기가 발단이니 아예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데이비스 가렛도 서준과 똑같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리 감독님. 순한 줄 알았는데…… 그냥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야. 감쪽같이 속았네.”
“하하. 그러게요.”
새로운 대본 속에서 제프리 감독은 폭주하고 있었다.
“어때?”
데이비스 가렛이 서준을 보며 물었다.
서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전 마음에 들어요. 찍어보고 싶어요.”
“나도 마음에 들긴 해.”
밀란 첼런과 바네사 올슨도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 워커는 달랑달랑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멍하니 대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배우의 대사도 조금씩 바뀐 상태였다.
“이 정도라면 금방 외울 수 있지만…….”
바네사 올슨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서준과 두 배우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 시선의 끝에는 베어라운드 기획팀장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배우들의 좋은 반응에 활짝 웃고 있던 제프리 감독의 시선도 기획팀장에게로 향했다. 배우들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던 터라 미처 기획팀장의 모습은 살피지도 못했다.
그리고 제프리 감독은 놀랐다.
대본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획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이런 모습의 기획팀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팀장님?”
제프리 감독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고 고개를 든 기획팀장은 입만 벙긋벙긋거리다 겨우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건 안 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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