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32화
몇 시간 전.
서준은 안다호와 함께 촬영장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일찍 오는 배우의 인사에 다들 웃으며 반겨주었다.
“오늘 촬영 잘 부탁합니다. 준.”
“걱정 마세요! 열심히 할게요!”
제프리 감독과 베어라운드의 기획팀장, 그리고 스태프들과 인사를 한 서준이 세트장 쪽으로 향했다.
“와아…….”
이번 세트장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트장인지라 구경할 맛이 있었다.
‘아니네.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보기는 힘드니까…… 영화 같다고 해야겠지.’
무너진 건물의 잔재들로 동굴을 만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무너진 벽과 천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잔재가 동굴을 만들고 있었고 위험해 보이는 철근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거기에 돌과 돌 사이사이마다 얼마 전에는 번쩍이는 새 상품이었을 것이 분명한 상점의 물건들이 돌더미에 눌려 찌그러져 있었다.
“꼭 개미굴 같지 않아요, 다호 형?”
좁았다가 넓었다가 규칙성 없이 이어진 동굴은 마치 개미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네.”
서준의 말에 안다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벽이 유리 벽으로 된 개미굴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몇몇 길이 막힌 곳은 배우들이 직접 길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고, 거기에 여러 방향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세트장을 여러 부분으로 자를 수도 있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세트장을 점검하는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바빴다.
“1번 파트 움직여봐!”
“1번 파트 이동! 뒤로 물러서!”
한 스태프의 지시에 주위에 있던 스태프들이 뒤로 물러서자 세트장의 한쪽이 덜컹 움직였다. 천천히 세트장의 일부가 잘라낸 케이크 조각처럼 따로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1번 파트 이동 완료!”
“2번 파트 이동 시작합니다!”
스태프들은 떨어지는 먼지들은 무시하고 차례차례로 2번, 3번 세트장을 움직였다.
“……변신 로봇 같네요.”
서준의 감상에 안다호도 동의하듯 킬킬 웃고 말았다.
잠시 세트장을 구경하던 서준이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배우들을 반겼다.
* * *
촬영을 시작하기 전.
데이비스 가렛은 자신의 대본을 한번 훑어보았다.
요즘은 많이 뒤틀기도 하지만 재난물에도 클리셰가 있었다.
재난물에서 가장 의지가 되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캐릭터.
그런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 캐릭터.
사고를 쳐서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캐릭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캐릭터.
그중에서 데이비스 가렛이 맡은 레이먼드 위시는 주인공 격인 캐릭터로 쇼핑몰 탈출에서 지도자 격인 역할이었다.
‘총에 맞지도 않고 맞아도 죽지 않고 치명적인 상처에도 움직이며 끝내 모두를 구하고 영웅이 되는 그런 캐릭터랄까.’
[생존자들]의 편집도 레이먼드 위시가 가족들과 함께 ‘갤러리아 몰’에 방문하면서부터 진행되다가 중반부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4명의 과거를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거기서 서준 리가 맡은 이현우는 정신적 충격으로 제때 움직이지 못하는 민폐 캐릭터였고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는 주인공의 조력자. 그리고 이안 위버는 꼭 구해야 하는 ‘재난 속 희망’을 상징하는 캐릭터였다.
그냥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그 역할들이 데이비스 가렛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 이유는 그게 가장 안정적이면서 인기가 많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데이비스 가렛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에도 데이비스 가렛은 평면적인 레이먼드 위시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간간이 미묘한 행동을 드러냈다. 무시할 정도의 미약한 움직임.
‘누가 알아보면 좋겠는데…….’
즉흥 연기도 어울려줄 수 있는 상대 배우가 있어야 이뤄지는 법이었다.
어우러지지 않는 즉흥 연기에 데이비스 가렛은 자신이 생각했던 캐릭터의 전부를 보여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 * *
데이비스 가렛과 함께 촬영한 것도 벌써 2주가 넘어간다.
그동안 서준은 촬영을 이어나가며 데이비스 가렛의 행동에서 미묘함을 느꼈다. 레이먼드 위시를 연기하는 데이비스 가렛의 발걸음, 억양, 표정 등. 촬영 중의 레이먼드 위시는 대본에서 느꼈던 캐릭터와는 아주, 아주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현우의 탈을 뒤집어쓴 서준이 앞서 걸어가는 데이비스 가렛을 주시했다.
‘그러니까…….’
봐라.
대피 중 챙긴 손전등을 켜고 사방이 위험한 동굴 같은 곳을 지나는데, 레이먼드 위시의 발걸음에서는 약간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이현우에 몰입해 있는 서준은 살고 싶은 의지 하나 없이, 억지로 끌려가듯 느리게 가고 있고 세 배우도 역할에 맡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는데 레이먼드 위시만이 조급해하고 있었다.
대본에서의 레이먼드 위시는 가끔 사람들을 걱정해 뒤를 돌아보며 확인하는데, 뒤를 보는 레이먼드 위시의 눈빛이…….
‘조금 차갑나?’
그런, 대본에는 보이지 않았던 레이먼드 위시의 모습이 참 묘하고,
재미가 있었다.
‘이게 데이비스가 말했던 즉흥 연기인가.’
대본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레이먼드 위시’의 역사.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으며 어떤 학교를 나왔고 어떻게 군인이 됐는지. 은퇴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제프리 감독이 만들기엔 너무 사소하고 세세한 이야기였지만 캐릭터의 형성에는 빠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서준은 데이비스 가렛이 만든 ‘레이먼드 위시’가 궁금해졌다.
데이비스 가렛은 계속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근데 언제든 뒤집힐 만한 신호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다들 너무 대본에 집중하고 있거나.’
대본을 본 만큼 모두 ‘레이먼드 위시’가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물론 영화 촬영을 위해선 대본을 잘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정해진 미래만큼 긴장감 없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서준은 앞서 걸어가는 ‘레이먼드 위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기로 했다. 오늘 ‘갤러리아 몰’에서 처음 봤고,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
알고 있는 건 이름뿐이고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
그래서 서준은 기억하고 있는 대본을 반쯤 지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현우’가 되었다.
그리고 덜컹.
신호음이 들리고 3초 후 세트장의 바닥이 흔들렸다. 그 격렬한 흔들림에 서준은 대본처럼 웅크리고 앉아 몸을 떨었다. 대본처럼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 이안 위버가 이현우의 옆으로 향했다.
“으…… 으…….”
더 웅크릴 수 없는데도 이현우는 몸을 접듯 구깃구깃 웅크렸다.
어둠.
어둠이다.
흔들림과 함께 찾아온 새까만 어둠이 입을 쩌억 벌리고 엄마와 아빠를 잡아먹고, 끝내 자신까지 잡아먹으러 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공포에 이현우는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숨이 가빠지고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괜찮아?”
“숨. 숨 천천히 쉬어봐요.”
두 사람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무어라무어라 말하지만, 이현우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어둠.
어둠.
“으…… 으…….”
좁고 꽉 막힌 동굴 속.
귀를 긁는 이현우의 앓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게 퇴역군인의 신경을 긁어댔다.
‘해외파병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퇴역한 군인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레이먼드 위시가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미 온몸을 울리는 폭탄 소리와 땅을 뒤집는 진동, 붉은 피와 날카로운 비명 등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거기에 이현우의 자잘한 숨소리가 레이먼드 위시의 신경을 긁었다.
신기하게도.
레이먼드 위시는 잭슨 밀러와 신시아 린드버그의 목소리가 더 큰데도 불구하고 이현우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가장 거슬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귀를 떼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럼에도 레이먼드 위시는 참는다.
이현우가 어린 민간인임을 기억하고 약자임을 기억한다.
그렇게 참고,
참고, 참다가,
터져 버렸다.
“조용히 못 해!”
놀란 세 배우의 얼굴이 데이비스 가렛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고 그 끝에 몸을 웅크려 흠칫 떠는 존재가 있었다.
이제 턴은 넘어갔다.
서준 리냐.
이현우냐.
그에 따라 데이비스 가렛의 즉흥 연기도 바뀔 터였다.
“으…… 으…… 아아아……!”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린다.
고통이 가득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하하.
이거다.
데이비스 가렛은 등골이 오싹오싹해질 정도로 기뻤다. 첫 즉흥 연기부터 이렇게 멋지게 어울려주는 배우는 드물었다.
발작하는 이현우의 모습에 데이비스 가렛은 속으로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즉흥 연기를 멋지게 받아주는 배우와의 연기를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 * *
레이먼드 위시의 외침에 서준은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즉흥 연기에 즐거워졌다.
하지만 서준은 그 즐거움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이현우처럼 생각하고 이현우처럼 행동했다.
아니.
이미 이현우였다.
* * *
레이먼드 위시가 거친 걸음으로 이현우에게로 향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세 배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레이먼드 위시가 웅크려 있는 이현우의 어깨를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든 후 멱살을 잡고 으르렁거린다. 레이먼드 위시의 손에서 떨어진 손전등이 빙그르르 돌자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흩어져 어지러워졌다.
“입 닥치라고! 누군 멀쩡해서 이러는 줄 알아?!”
“흑…… 흡…….”
레이먼드 위시의 큰 목소리에 이현우의 숨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레이먼드 위시의 손에 멱살이 잡힌 이현우의 고개가 힘없이 달랑달랑 움직였다.
억지로 마주친 이현우의 눈이 죽어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선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며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 하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레이먼드 위시의 성질을 긁었다.
가족과 함께 일상을 보내며 잊었다고,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진득한 트라우마가 배 속에서부터 벌레처럼 우글우글거리며 올라오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 위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데이비스 가렛이 만든 캐릭터와 서준 리가 만든 캐릭터가 격렬하게 부딪히며 불꽃을 만들어냈다.
아주 뜨거운 불꽃이었다.
* * *
앤드류 워커가 바네사 올슨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 떨리는 작은 손에 바네사 올슨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이상했다.
무서웠다.
근데,
……대단했다.
앤드류 워커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데이비스 가렛과 서준 리, 두 사람만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 두 사람 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저 레이먼드 위시와 이현우 같았다.
금방이라도 제 몸까지 불태울 것 같은 레이먼드 위시와 이미 죽어버린 이현우의 텅 빈 시선이 오고 갔다.
보통의 촬영장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에 모두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두 배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길어졌다면 몰입이 깨져 두 배우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촬영을 멈추거나 눈도 깜박하지 않고 모니터를 뚫어지라 보고 있던 제프리 감독이 컷을 외쳤을지도 모르는 아까운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데이비스 가렛과 함께 촬영한 적이 있는 배우가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두 배우의 즉흥 연기를 보고 있던 밀란 첼런이 정신을 차렸다.
언제고 터질 줄 알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이야.
그것도 캐릭터 성격을 바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밀란 첼런도 이 소름 돋게 멋진 장면을 쓰지 못하는 장면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재촬영해도 두 사람은 잘하겠지만.’
속으로 작게 웃었다.
밀란 첼런은 자신이 데이비스 가렛이나 서준 리 같은 즉흥연기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만두세요!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를 팽팽 굴려 대본에 있는 대사 중 적절한 것을 당겨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또 ‘레이먼드 위시’의 대사라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잭슨 밀러의 말에 돌아가려던 눈깔을 바로 잡은 레이먼드 위시가 훅훅 거친 숨을 내쉬다 이현우를 내팽개쳤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이현우가 바닥에 쓰러지고 먼지가 풀썩 일었다.
놀란 앤드류 워커가 뛰어갔다. 그사이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한 신시아 린드버그도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현우에게로 달려갔다.
잔잔하던 생존자 무리에 불안한 바람이 불었다.
* * *
침묵이 가라앉은 촬영장.
가까스로 컷을 외친 제프리 로덕스 감독은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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