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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29화 (32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29화

클로즈업 샷 촬영을 위해 서준은 분장을 점검했다.

“오른손 내밀어 주세요.”

“네.”

미술팀 스태프가 서준의 손목에 장치를 둘렀다.

이 장치는 열 개의 손가락에 일정한 압력을 가하면 손목부터 연결된 얇은 관에서 붉은색의 액체가 흘러게 하는 장치였다. ‘이현우’가 돌덩이를 만지고 치울 때마다 여기서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붉은색 액체, 피가 든 주머니를 소매로 손목을 가리면 보이지 않는 위치에 두른 미술팀 스태프는 다섯 개의 아주 가는 관을 서준의 다섯 개의 손가락 끝에 연결했다. 그리고 서준의 피부색과 같은 색의 테이프를 이용해 관을 붙였다.

“여기 한번 눌러주시겠어요?”

미술팀 스태프의 말대로 서준은 테이블 위에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차례로 꾹 눌렀다. 일정한 압력이 가해지자 관을 통해 붉은 액체가 테이블 위에 묻어나왔다. 미술팀 스태프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잘 나오네요. 이번엔 왼손이요.”

“네.”

서준은 오른손을 누르지 않게 주의하면서 왼손을 내밀었다. 장치의 장착이 끝나고 서준의 머리와 옷도 다시 점검한 후, 곧바로 클로즈업 샷 촬영이 시작되었다.

클로즈업 샷 촬영이 시작되자 촬영장은 다시 한번 침묵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 풀샷 촬영과는 달리 이번에는 카메라 렌즈와 촬영감독, 스태프들이 배우들의 앞에 서 있었다.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지만 서준 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예 카메라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눈앞의 카메라와 스태프를 완전히 무시한 서준은 ‘이현우’의 절망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돌더미를 파고드는 피가 묻은 손과 바짝 힘이 들어간 두 팔, 붉어진 눈가. 엄마 아빠만 중얼거리는 입술.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클로즈업 샷은 제프리 감독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절망. 나락.

비통함과 슬픔.

눈물 하나 흐르지 않는데도 느껴지는 그 마음이, 역설적이게도 이현우가 얼마만큼 가족을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밀란 첼런이 타이밍 좋게 들어왔다.

카메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이현우를 찍었다. 혹시나 다른 길을 통해 부모님이 오셨을까, 바람만 불어도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 희망의 빛이 이현우의 눈동자 안에 있었다.

또 다른 카메라가 이현우의 어깨 위에 올라온 검은 손을 따라 팔, 어깨, 턱으로 올라갔다. 카메라에 비치는 얼굴은 이현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서준 리를 찍고 있던 카메라의 화면에 다시 한번 절망한 이현우의 눈빛이 고스란히 담겼다.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가려져 배우들의 연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스태프들이 은근슬쩍 제프리 감독의 뒤로 가 흘깃흘깃 모니터를 훔쳐보다 이현우의 눈빛에 눈시울을 붉혔다.

* * *

“남쪽 상점가 붕괴 5-2 촬영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서준의 예상대로 새로운 위치에 설치된 기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현우의 피가 선명하게 남아 있던 곳이 무너지는 기둥과 천장에 완전히 파묻혔다. 천장에 설치된 전등들이 깜빡거리다 차례로 꺼졌다. 쿵쿵,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세트장이 무너져내렸다.

세트장 위에 올라가 있던 여러 대의 카메라 렌즈에 그 모습이 그대로 잡혔다.

“꼭 도미노 같네요.”

어차피 무너지는 장면은 후시녹음 할 예정이었지만 서준은 조용히 속삭였다. 서준의 말에 동선을 확인하던 밀란 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렇게 갤러리아 몰의 남쪽 상점가의 5분의 2가 무너져 내렸다.

* * *

“레디, 액션!”

피난 도중 홀로 남은 소년을 발견한 잭슨 밀러가 소년에게로 달려갔다.

잭슨 밀러의 부름에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잭슨 밀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소년의 상태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영어 할 수 있어?”

최대한 부드럽게 묻는 잭슨 밀러에도 이현우의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잭슨 밀러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차갑게 식은 이현우의 두 손을 주물렀다.

성한 곳 없이 깨진 손톱들과 묻어나오는 피, 흙먼지로 엉망진창이 된 소년의 모습에 잭슨 밀러는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잭슨 밀러는 계속 손을 주무르면서 소년이 파헤치던 곳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벽과 기둥은 소년의 미약한 힘에 전혀 피해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단한 벽에 남아 있는 처절한 손자국에 잭슨 밀러가 침음성을 흘렸다.

“일단…… 여기서 피하자. 알아듣겠어? 위험하니까 저쪽으로 가는 거야.”

잭슨 밀러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뒤쪽은 무너진 곳이 없는지 천장에 박힌 전등이 밝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충격을 받은 탓에 몇몇 전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직 대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일 수 있겠어?”

후두둑.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에 잭슨 밀러는 꼴깍 침을 삼켰다. 폭탄이 하나 더 터지거나 아까 터진 폭탄의 영향으로 균형을 잃은 건물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년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잭슨 밀러는 넋이 나간 이현우를 부축해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그 생각과는 달리 이현우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우의 고개가 핏자국이 남은 벽과 그 벽 너머에 있을 엄마 아빠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가, 가요…… 아저씨…… 가세요…….”

“영어 할 줄 아는구나. 얼른 여기서 피하자. 또 폭탄이 터질지도 몰라!”

“나, 난 여기 있을 거예요…… 아저씨…… 아저씨는 가세요.”

이현우는 잭슨 밀러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뺐다. 자신의 손에 남은 핏자국과 이현우를 번갈아 보던 잭슨 밀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긴 위험해. 얼른 밖으로 나가자.”

“전, 전 여기 있을 거예요…….”

여기에 엄마 아빠를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다시 벽으로 향하려는 이현우의 어깨를 잭슨 밀러가 꽉 눌러 잡았다. 뜨겁고 커다란 손에 이현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밖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해야지!”

가족.

패밀리.

그 한 단어에 이현우는 울컥, 핏덩이를 토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을 구하려는 이 착한 남자에게 당장 외치고 싶었다.

내 가족은 여기 있다고!

엄마 아빠가 저 벽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

버럭 화를 내려던 이현우는 걱정 어린 잭슨 밀러의 눈빛에 입만 벙긋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자신을 걱정하던 아빠와 닮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반갑기도 하면서 반대로 온몸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아주아주 뜨거운 불덩이가 뱃속부터 올라와 가슴을 태우고 목을 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뱉어낼 수 없는 불덩이에 이현우는 머릿속까지 익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아.

당장, 당장 가서 엄마 아빠를 도와줘야 하는데……!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하고 싶었다.

피가 나고 깨진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차마 비명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를 내뱉는 이현우의 모습에 잭슨 밀러가 헛숨을 들이켰다.

왜 나만 이쪽에 남은 거야…….

엄마 아빠랑 계속 같이 있어야 했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불규칙하게 뛰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이현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때문이야.

어째서 여행을 오자고 했을까.

그냥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엄마. 아빠. 어디 있어?

왜 나만. 왜…… 왜 나만…….

밀려드는 생각들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숨이 가빠지는 이현우에게 잭슨 밀러가 무어라 소리쳤다. 이현우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현우는 느낄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거야.

커다란 죄책감이 거센 파도처럼 몰려들어 힘들게 이어나가던 숨통까지 막아버렸다.

이현우의 시야가 새까매졌다.

“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온몸을 덜덜 떨며 괴로워하던 소년이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엉망이 된 소년의 모습에 잭슨 밀러는 입술을 깨물고는 소년을 번쩍 둘러업었다.

* * *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외침에 숨 막히던 정적이 깨졌다.

다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얼마나 집중해서 봤는지 어깨에 담이 온 것처럼 뻐근했다.

“……근데 저거 연기 맞지?”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서준과 밀란 첼런이 세트장 밖으로 나오고 미술팀 스태프들이 교대로 세트장 위로 올라갔다.

“……리는 괜찮은 건가?”

다음 촬영을 위해 세트장을 준비하던 미술팀 스태프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가?”

“아니. 아까 전 촬영도 그렇고 이번 촬영도 그렇고…… 감정 연기가 되게 격렬했잖아.”

확실히 상상도 못 한 테러에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멈칫멈칫하는 이현우를 찍었던 이전의 촬영과는 달리 오늘은 부모를 눈앞에서 잃고 나서야 상황을 모두 파악한 ‘이현우’가 절망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그렇게 보는 사람마저 리의 감정에 휩쓸릴 정도로 연기를 잘하면 배우 본인한테도 그 여파도 남을 게 뻔하니까 말이야.”

할리우드의 미술팀 스태프로 일하면서 그런 배우를 한두 명 본 게 아니었다.

격렬한 감정 연기의 촬영이 있을 때의 배우들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촬영이 끝난 후에도 배역에서 벗어나지 못해 예민하게 행동한다.

“하긴. 그런 배우들이 있긴 하지.”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서준 리의 모습은 다시 떠올려봐도 심장이 쿵 떨어졌다.

“……괜찮으려나?”

비슷한 생각을 하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세트장에서 내려온 서준 리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달리, 거기에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모니터링하고 있는 서준 리가 있었다. 조금 전 온몸으로 괴로워하던 ‘이현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밝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며 무어라 무어라 말하는 서준 리의 모습에 다들 허어, 감탄을 내뱉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클로즈업 때는 이쪽을 강조할 예정입니다.”

“그거 좋네요!”

조금 전 촬영이 만족스러웠던 제프리 감독이 전에 없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서준도 방긋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가슴이 거칠게 뛰는 밀란 첼런만 이상한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밀란 첼런이 오렌지 주스로 목을 축이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서준의 눈빛이 흐려질 때는 그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로 위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모습을 떠올리자 식은땀에 손이 축축해졌다.

밀란 첼런이 후우, 숨을 내뱉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촬영하면서 당황하던 자신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 모습이 섞였던 것도 같았다.

‘어째서…….’

자신 같았으면 바로 NG를 외쳤겠지만 그대로 쭉 이어나간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다.

“감독님. 예전에 준의 연기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 네. 첫 미팅 때 보여주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듯 제프리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곧바로 구급차를 부를 뻔했습니다. 그래도 그 뒤에 준의 말을 듣고 보니 오늘 촬영은 조금 알 것 같더라고요.”

“어떤 말인지?”

대답은 옆자리에 앉은 서준에게서 나왔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건 제가 아니라 ‘이현우’라는 거예요. 아파하는 것도 ‘이현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서준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밀란 첼런은 다음 촬영에서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파하는 건 이현우라…….”

서준의 말대로 촬영장에 있는 건 서준 리가 아니라 ‘이현우’였다.

* * *

“안녕하세요!”

오늘만을 기다렸던 서준 리의 빅팬, 앤드류 워커가 활기차게 인사했다. 귀여운 앤드류 워커의 인사에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안녕. 워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류 워커는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다니다,

“안녕. 앤디.”

먼저 와 있던 서준의 모습에 바짝 얼어버렸다.

진짜 인사하던 그 자세로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 앤드류 워커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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