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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28화 (328/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28화

생존자들의 조감독이 시계를 한 번 보고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배우들은 전부 세트장에서 내려온 상태였고 세트장은 다시 미술팀 스태프들의 손에 복구 중이었다. 빠른 속도긴 하지만 촬영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한 번 더 찍을 만큼 넉넉하진 않겠는데.’

잠시 시간을 계산하던 조감독이 제프리 감독에게로 다가갔다.

“제프리 감독님.”

“예?”

조감독이 제프리 감독에게 무어라 말하자 제프리 감독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중간하게 촬영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끝내고 내일 촬영을 준비하는 편이 좋았다. 세트장이 이런 식이라 한 번 촬영하는 데 시간이 다른 때보다 많이 걸려 일부러 촬영 기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다행이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죠.”

제프리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움직였다. 세트장을 복구하던 미술팀 스태프들은 그대로 계속하고 다른 스태프들은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세트장 복구를 기다리며 서준에게 어느 발음이 더 낫냐고, ‘가라고’의 여러 버전을 물어보던 김종호가 제프리 감독의 말에 눈을 끔벅이다가 문득 무언갈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

이 갑작스러운 퇴근이 특별한 일은 아닌 모양인지 놀란 건 김종호뿐인 것 같았다.

촬영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엑스트라들과 다른 배우들도 칼 같은 퇴근에 익숙한 듯 분장을 벗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할리우드 스타의 매니저, 안다호도 예상이나 한 듯 익숙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김종호의 매니저 김상우는 돌아가는 상황에 쩌억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니, 정말 이렇게 간다고?

“오늘 수고하셨어요.”

“내일 봐요!”

한국계 배우들도 서준과 김종호에게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향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하던 김종호가 허허 웃고 말았다.

“촬영 시간은 칼같이 지킨다더니…… 서준아. 지금은 계속 찍어야 하는 느낌 아니었어?”

감독의 코멘트가 있었으니 한국이라면 ‘느낌이 좋다’, ‘흐름 끊지 말고 가자’며 한 번이라도 더 찍었을 터였다. 김종호가 촬영할 때도 그렇게 분위기를 타서 촬영 시간이 늘어난 적이 많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오늘 늦게까지 촬영하면 내일 일정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배우분들 컨디션도 나빠질 수도 있는데 아역 배우들도 많고요. 여긴 그런 쪽에선 더 철저하거든요.”

“아. 그러네.”

김종호가 고개를 돌렸다. 촬영장을 떠나는 엑스트라 배우들 중 간간이 서준에게 인사하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서준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게다가 이제 첫 촬영이라서 시간도, 일정도 넉넉하잖아요. 정해진 스케줄대로만 찍으면 되니까 이런 점에서는 여기가 편하긴 해요. 쉴 땐 쉬고 촬영할 땐 열심히 촬영하고요.”

서준의 말에 김종호는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긴. 오늘 찍을 걸 내일 찍는다고 연기력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진 것 같았다.

“그래. 연습 시간이 늘어서 좋긴 하네.”

“그럼 우리도 가요. 종호 삼촌.”

서준의 말에 김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숙소에서 서준과 충분히 ‘가라고’의 발음을 연습하고 킹즈 에이전시 직원과 보디가드들에게까지 체크한 김종호의 대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가라고--!!/”

김종호의 거친, 그러나 가슴 절절한 목소리와 함께 스태프가 마지막 기계를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방벽이 내려오는 것처럼 폭발로 무너진 잔해물이 서준과 김종호, 재은 주의 시야를 가렸다.

미술팀 스태프들이 준비해 놓은 먼지가 바람에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뿌연 먼지 구름 사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서준 리의 모습이 눈에 아플 듯 박혀왔다.

그냥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현우’가 받았을 충격이 어느 정도 일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모두 숨을 죽였다.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조용하던 촬영장이 단번에 시끌벅적해졌다. 저번 촬영보다 더 떠들썩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스태프들도 있었다.

“……마지막에 ‘go’가 들린 건 내 기분 탓인가?”

“아니. 나도 들었어. 다른 한국어는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GO--!!’

라는 절규가 담긴 아버지의 외침이 귀에 쏙쏙 박혔다.

분명 이해할 수 없는 한국어 대사인데 김종호의 외침은 스태프들과 엑스트라들의 마음을 절절히 울렸다.

“킴이 한국에서 대단한 배우라던데 진짜인가 봐.”

“너 몰라? 이스케이프에 나왔던 형사잖아.”

드문드문 들리는 스태프들의 말에 세트장에서 내려온 김종호와 서준이 마주 웃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서준과 김종호가 모니터링을 하는 사이, 미술팀 스태프들의 손에 세트장은 마법같이 복구되었다. 이번에는 배우들의 표정을 확연히 볼 수 있는 클로즈업 샷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서준의 앞과 김종호, 재은 주의 앞에 레일이 설치되고 카메라까지 준비되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눈 바로 앞에 카메라 렌즈가 있는데도 서준과 김종호의 연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재은 주도 금세 몰입했다.

제프리 감독은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는 배우들의 눈빛에 침을 삼키고는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 * *

“조심해서 가세요. 종호 삼촌.”

“회사에 들어온 스케줄만 보면 안 가고 싶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종호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할리우드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매니저 김상우가 전해주는 스케줄에 김종호가 질려 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방송사는 다 돌아야 하고 잡지랑 신문도 엄청 있더라.”

“하하. 쉬엄쉬엄하세요.”

어제로 김종호의 촬영은 모두 끝났다.

할리우드에 오기 전까지 몇 달을 기다렸는데 촬영은 너무 빨리 끝났다. 여행보다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 즐겁고 설렌다는 게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은 김종호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짧게 나오는 역할이라 예상은 했는데도 조금 아쉽네.”

“다음에 좋은 작품 있으면 같이 찍어요. 삼촌.”

서준의 말에 김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 영화만 찍을 것도 아니었다. 다음에 또 다른 할리우드 영화로 이곳에 돌아올지도 몰랐다. 익숙해지기 전에 떠나는 숙소 주위를 쭉 둘러본 김종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서준이 너도 남은 촬영 잘하고. 한국에서 보자.”

“네. 조심해서 가세요. 상우 삼촌. 종호 삼촌.”

서준은 김상우와 김종호를 꼭 껴안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친한 한국 배우와 할리우드에서 촬영하는 건 서준도 처음이라, 짧은 촬영이 많이 아쉬웠다. 그 아쉬움만큼 김종호를 꼬옥 껴안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배우 김종호, 귀국!]

[배우 김종호, 생존자들 촬영 끝!]

김종호의 귀국에 한국이 들썩거렸다.

* * *

이번 세트장은 벽에 붙어 있던 기계들도 다 새로운 위치를 옮긴 상태였다.

세트장이 6칸이 있다면 첫 붕괴로 2개의 칸이 무너졌고 이제 남은 칸은 4개. 그리고 기계들은 그사이 4개 중 2개의 주위에 설치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서준이 안다호에게 말했다.

“다호 형. 오늘은 저기 두 개가 무너지는가 봐요.”

“그러게. 위치를 옮겼네.”

오늘은 또 어떻게 무너질까.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세트장을 구경하고 있던 서준을 누군가 불렀다.

“준. 왔어?”

“안녕하세요. 밀란!”

오늘 함께 촬영하게 된 밀란 첼런이었다.

네 명의 주연 배우 중 가장 먼저 함께 촬영하게 되었다. 일찍 와서 준비하고 있었는지 밀란 첼런의 손에 들린 대본이 눈에 띄었다.

서준은 밀란 첼런의 손을 보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헤헤 웃었다. 서준의 손에는 쿠키가 담긴 상자가 있었다.

“이거 드실래요? 다들 드시라고 사 왔어요.”

“나야 고맙지.”

서준이 내미는 쿠키 상자에 밀란 첼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들과 엑스트라들이 먹을 쿠키는 킹즈 에이전시 직원들이 준비하는 중이었다.

나란히 의자에 앉아 쿠키를 먹으며 가볍게 대사를 주고받던 서준과 밀란 첼런은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스태프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 오늘 촬영 잘 부탁한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카데미 시상식 때부터 기다려왔던 촬영에 서준과 밀란 첼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레디, 액션!”

제프리 감독이 크게 외쳤다.

조그마한 빛도 막아버리는 방벽이 내려앉자 먼지가 일었다. 그 먼지 바람 속 먼지투성이가 된 이현우가 숨도 멈추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폭발이 잠시 멎은 듯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근데 왜.

내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온몸의 피가 가신 것처럼 이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악)스라이의 소용돌이-중급이 발동됩니다.]

[(악)스라이의 소용돌이-중급]

절망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종족, 스라이입니다.

생명체의 절망을 흡수해 소용돌이의 크기를 부풀립니다.

주변의 소리를 흡수합니다.

[주의] 소용돌이에 닿으면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절망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종족, 스라이.

바다에 빠져 절망할 때, 스라이족이 나타나 소용돌이를 만든다. 만들어진 소용돌이는 주변의 소리를 흡수해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만든다. 거기서 또 다른 절망이 태어나고 소용돌이는 점점 커지다 주변의 생명체가 죽어 절망할 수 없을 때야 사라진다.

[[(악)스라이의 소용돌이-중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악)스라이의 소용돌이(하급)이 발동합니다.]

서준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하급으로 다운그레이드된 소용돌이는 진득한 절망을 만들어내며 주변의 소리를 모조리 잡아먹었다.

온몸의 피가 가신 것처럼 이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엄마…… 아, 아빠!”

이현우가 두 손을 벌벌 떨며 앞으로 걸어갔다. 거칠거칠한 돌무더기에 손을 올렸다.

어, 엄마. 아빠…….

이현우는 다른 말은 잊은 것처럼 엄마 아빠만 외치며 돌무더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거친 돌조각에 손톱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돌을 파냈다. 이현우의 마음속의 절망처럼 새하얀 벽 위에 새빨간 핏자국이 남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광기마저 느껴지는 서준 리의 움직임에 모두 숨을 죽였다.

[스라이의 소용돌이(하급)]가 흡수한 소리는 서준의 주위뿐이었지만, 촬영장에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능력이 아니라 서준의 연기력이 사람들의 시선과 소리를 빼앗은 것이었다.

스태프는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세트장 위의 서준 리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선 온몸의 신경이 모조리 서준 리의 절망에 홀린 것 같았다. 무거운 이현우의 절망에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고 누구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이현우의 절망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영원한 절망이 계속되려던 그때,

[(선)중급천사의 부채가 발동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 소용돌이에게 먹혔던 소리를 돌려주었다.

“……컷. NG!”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제프리 감독이 외쳤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밀란 첼런이 NG 소리에 아차,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재촬영을 위해 세트장에서 내려오는 서준을 보며 밀란 첼런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준. 그렇게 멋진 연기를 보여줬는데 내가 타이밍을 놓쳤어.”

그런 연기를 두 번 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밀란 첼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에요. 음. 좀 약하게 할까요?”

어깨를 으쓱인 서준이 물었다.

자신의 연기 때문에 NG가 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

밀란 첼런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듣고 있던 제프리 감독이 동시에 외쳤다.

“아니야. 이건 내가 잘못한 거지. 준. 넌 그대로 해도 괜찮아. 이번엔 넋 놓지 않고 타이밍대로 들어가도록 할게. 그러니까 아까 같은 연기를 그대로 해줘.”

변명처럼 급하게 늘어놓는 밀란 첼런의 말에 놀라 눈을 깜빡이던 서준이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 * *

“레디, 액션!”

제프리 감독의 외침으로 두 번째 촬영이 진행되었다.

이현우는 다른 말은 잊은 것처럼 엄마 아빠만 외치며 돌무더기를 파내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망에 사로잡힌 이현우는 제 손에 피가 나는 것도 몰랐다.

아픈 것도 모르고 움직일 수도 없는 커다란 돌덩이들을 손톱이 부서질 정도로 쥐어 잡았다. 새하얀 페인트 위로 새빨간 손가락 자국이 확연하게 남았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보았다.

한 번 봤으니 익숙해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서준 리는 다시 한번 사람을 홀리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밀란 첼런은 서준 리와 함께 절망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때, 따뜻한 바람과 함께 촬영장에 소리가 돌아왔다.

밀란 첼런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촬영장에 뛰어들었다.

“이봐! 정신 차려!!”

피투성이가 된 이현우의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거칠고 뜨거운 손에 이현우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불과 몇 분 전 제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떠올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희망에 심장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뛰었다.

“아ㅃ,”

“빨리 피해야 해!”

아빠가 아니다.

낯선 흑인 남자의 얼굴에 이현우의 심장이 덜컹,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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