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27화
“컷. 오케이.”
제프리 감독의 오케이 소리가 세트장을 울리자 혼돈으로 가득 찼던 세트장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스태프들이 다음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엑스트라들을 처음 위치로 보내고 조명과 카메라를 확인했다.
전체적인 장면을 촬영했으니 이제 배우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찍기 위해 카메라가 세트장 위로 올라갔다.
미리 짜둔 동선대로 카메라가 움직일 예정이라 엑스트라들은 조금 전 움직였던 동선대로 움직이면서도 자신들의 사이를 파고들어 서준 리에게 도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무시해야 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조금 전과 같이 자신의 자리에 섰다. 제프리 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고,
콰아아앙!!
스피커에서 폭발 소리가 들렸다.
* * *
촬영을 끝내고 세트장에서 내려온 서준이 제프리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다음 장면은 어디서 촬영하나요?”
“여기서 합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제프리 감독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은 폭탄 테러에 무너지는 쇼핑몰과 거기에 놀라 대피하는 사람들을 찍을 예정이었다.
‘근데 여긴 너무 깔끔하지 않나?’
부서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하고 깔끔한 세트장 내부에 서준은 CG로 대체하나 싶었다.
그사이 엑스트라 담당 스태프들이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엑스트라들을 세트장에서 내려보냈다. 김종호와 다른 배우들도 이동하자는 말이 없자 고개를 모로 꼬았다.
“/여기서 크로마키 설치하고 찍는 것 같아요./”
“/그래?/”
어리둥절해하는 배우들을 보던 제프리 감독이 웃으며 세트장에서 물러난 사람들을 확인하고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아무도 없는 세트장 위로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이 올라갔다. 배우도 하나 없는데 세트장에 오르는 다섯 대의 카메라들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세트장 위로 올라간 다섯 대의 카메라가 찍는 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었다. 큰 기둥, 넓은 벽, 상품이 진열된 진열장 등.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에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자리를 잡은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을 보던 제프리 감독이 조감독에게 무어라 말했다.
“‘남쪽 상점가 붕괴 5’ 촬영 시작합니다!”
조감독의 목소리에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 초록색의 크로마키는 하나도 설치되지 않았는데 촬영이라니.
그때,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이 서 있던 세트장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서준이 두 손을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낸 사람이 서준만이 아니었다. 김종호도 한국계 배우들도 허어, 감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촬영감독과 스태프들은 예상한 움직임이라는 듯 잘도 균형을 잡고 있었다.
변화는 흔들리는 바닥뿐만이 아니었다.
새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벽에 검은색 실선이 생겼다.
그 실선을 시작으로 멀쩡했던 벽과 천장, 기둥이 질서없이 금이 생겼다. 균열에서부터 생겨난 금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지진에 땅이 갈라지듯 쩍쩍 벽이 갈라지고 그 경계선에 있던 바짝 마른 페인트 부스러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심상치 않은 균열을 시작으로 세트장의 가장 끝 부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쩡하던 벽이 반 토막이 나고 굳게 서 있던 기둥이 옆으로 기울었다. 바닥의 흔들림에 진열대가 힘없이 굴러갔다.
연신 감탄하던 서준의 시선이 세트장의 바깥쪽에 설치된, 세트장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기계들로 향했다.
마치 공장에서나 볼 법한 기계 팔들이 세트장의 일부분을 붙였다가 떼어내는 것처럼 움직이며 세트장의 일부분을 분리해 바닥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폭발의 잔재’들이 불규칙하게 세트장 이곳저곳에 쌓이니 현실감을 더했다.
“진짜처럼 보여도 특수소재라 무게는 가볍습니다.”
제프리 감독의 말에 서준이 감탄했다. 부서진 기둥도 그 사이로 보이는 철근들도 진짜처럼 보이는데 진짜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전 장면들도 여기서 찍었습니다.”
물론 촬영마다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순서도 방향도, 낙하물의 크기도 무게도 다르게 했다.
“기둥이나 벽 같은 큼직한 것들은 이렇게 기계로 움직이고 진열장들은 밑에 레일을 설치해 놓았으니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분 같은 작은 소품들은 카메라 앵글에 찍히지 않게 스태프들이 던지거나 굴릴 겁니다. 촬영 때도 바닥이 흔들릴 예정이니 잘 기억해 두세요.”
그것도 폭탄이 터진 곳과 가까운 곳은 강하게 흔들리도록, 먼 곳은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게 움직일 예정이었다.
제프리 감독의 설명에 서준과 김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트장 끝부터 일정 구역까지의 세트장이 무너져내렸다. ‘남쪽 상점가 붕괴 5’의 촬영이 끝난 후의 세트장은 진짜 폭탄에 무너진 듯한 모습이었다.
오오!
촬영이 끝나자 숨죽여 감탄하던 사람들이 참았던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과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하는 서준 리의 모습에 베어라운드의 기획팀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벌써 4번이나 봤지만, 마음에 드는 반응이었다.
“CG 작업도 할 예정이지만 최대한 현실감 있게 만들어봤습니다.”
‘진짜 건물을 터뜨리는 쪽이 더 쉽고 빠를 것 같았지만.’
하지만 다시 복구하고 재촬영할 수 있다는 점에선 지금 세트장이 더 나았다.
이 세트장을 만들기 위해 고생했던 기획팀장과 미술팀 스태프들이 놀라는 서준 리와 배우들의 모습에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메이킹 필름 카메라에 담겼다.
“이제 저 위에서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세트장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정말 재미있겠는데요!”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진짜 무너지는 세트장이라니!’
초록색 크로마키가 가득한 세트장에서도 멋지게 연기할 수 있겠지만 이런 장치가 있는 세트장에서 연기하는 건 더 좋았다. 당장 연기하고 싶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다른 배우분들도 좋아하시더라고요. 세트장 복구 전에 리허설을 하고 촬영하겠습니다. 배우들과 가까운 곳은 CG 처리를 하겠지만, 그 이외에는 이 효과를 사용할 예정이라서 동선을 확실하게 지켜주셔야 합니다.”
“네!”
그사이 천천히 세트장이 복구되었다. 기계들을 작동시켜 바닥에 내려놓은 기둥과 벽을 다시 바로 세우고 진열장들을 원래의 위치에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소품들까지 치우자 벽에 간 금만 없으면 원래의 세트장처럼 보였다.
서준과 김종호는 멀쩡하게 돌아간 세트장에 다시 한번 탄성을 내뱉었다.
“/이래서 할리우드, 할리우드 하는구나./”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요. 종호 삼촌./”
감탄도 잠시.
서준과 김종호, 한국계 배우들은 다시 작동되는 세트장 위에서 동선을 확인했다.
동선이 비교적 단순한 다른 엑스트라들도 담당 스태프에게 동선을 몇 번이고 주의받았다.
동선을 모두 확인한 후 세트장의 ‘완전 복구’가 시작되자 미술팀 스태프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작동했던 기계들을 거꾸로 작동시켜 큰 기둥과 벽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고 굴러갔던 진열장과 소품들을 제자리로 옮겼다. 금이 가 페인트가 떨어진 벽에는 빨리 마르는 특수 페인트를 덧칠했다.
마지막으로 부서진 소품들을 예비용으로 교체하고 붕괴하면서 생긴 먼지들을 말끔하게 청소하니 다시 처음의 세트장으로 돌아왔다.
“/대단하네……./”
불과 20분.
멀쩡하게 돌아온 세트장에 서준과 배우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 * *
“레디, 액션!”
콰아아앙!
다시 한번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에 이현우는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엄마 아빠가 떠올랐다. 이 상황이 무서워 의지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구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엄마 아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엄마, 아빠……!”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이현우는 남쪽 게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그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이현우가 달려가는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굉음이 들려온 곳이 남쪽 게이트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연기가 슬그머니 퍼져 나오고 쿵쿵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퍼졌다.
이상을 알아차린 건지 갤러리아 몰에 안내 방송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남쪽 게이트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현우는 거꾸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헤쳐나갔다. 사람들 때문에 달릴 수가 없어 초조해졌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아이가 우는 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도망쳐! 외치는 소리.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다급함이 섞인 목소리가 이현우의 주위를 맴돌았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안함에 숨이 가빠져왔다.
“……엄마! 아빠!”
그렇게 멀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부딪혔다. 부딪히고 발이 밟혀도 아픈지도 모르겠다. 이현우는 그저 부모님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 *
커다란 굉음에 놀란 것도 잠시.
엄마 아빠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에 치이고 밀려도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속도가 사람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빨랐다.
쿠웅!
그들의 앞에 기둥 하나가 쓰러졌다. 놀란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아빠가 그런 엄마를 일으켜 세웠다. 붉은 자국이 바닥에 남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모두 남쪽 게이트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꼭 마주 잡은 거칠지만 커다란 손에 엄마가 정신을 차렸다.
“여, 여보. 현우는? 우리 현우는?”
“괜찮을 거야. 놀이공원은 북쪽에 있잖아. 일단 우리부터……!”
그때.
엄마 아빠의 눈에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홀로 거슬러 오는 아들이 보였다.
길 잃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부부가 있는 곳으로 오던 아들이 부부와 시선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었다.
안도한 아들의 웃음에 부부의 심장은 오히려 덜컹 내려앉았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굉음과 앞에서 달려오는 아들의 모습에 손발이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현우!!”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빠가 외쳤다.
아빠의 고함에 이현우는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로 향하는 발은 멈추지 않았다. 얼른 가서 아빠를 도와서 엄마를 데리고 피해야 했다. 내가 도와야 했다.
천장에서 커다란 무언가 떨어졌다. 그게 가족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들이 무너진 잔재를 기어올라 도망쳤다. 쿵! 또 하나가 떨어졌다. 비명이 들렸다. 금방이라도 그것이 현우를 짓누를 것 같아 사색이 된 엄마는 비명처럼 외쳤다.
“현우야! 이쪽으로 오지 마! 뒤로 가!!”
“어, 엄마…….”
“이현우! 빨리 피해! 가라고!”
엄마를 일으킨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현우에게 손짓했다.
다급한 손짓에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이현우는 멈추었던 발을 다시 내디뎠다. 엄마 아빠와 닿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너지는 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언제 파편이 튀었는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에 엄마가 흐느꼈다. 시뻘건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현우야. 오지 마.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마.
여보. 현우 좀. 우리 현우 좀…….
자신을 보내려고 마주 잡은 손을 푸는 엄마의 손을 꽈악 잡은 아빠가 외쳤다. 땀에 젖은 아빠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현우! 가! 이쪽으로 오지 마!”
엄마 아빠의 뒤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우는 입술을 깨물고 더 빠르게 달렸다.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너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가라고--!”
쿠우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눈시울이 붉어진 아빠와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무너진 기둥에 완전히 가려졌다. 자신의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돌덩이에 이현우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 * *
“킴.”
제프리 감독의 부름에 김종호가 제프리 감독에게로 향했다. 촬영 중 처음으로 감독에게 불린 김종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가라고/’라고 말할 때, ‘고’에 악센트를 줘서 말해줄 수 있습니까?”
외국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어는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서준의 통역에도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김종호가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아까 들어보니까 ‘/고/’가 꼭 ‘GO’처럼 들리더라고요.”
제프리 감독의 말에 서준과 김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미국인의 입장에선 한국어가 외국어라서 다른 말은 못 알아들어도,”
제프리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GO!’, 그 말은 알아들을 테니까요.”
거기에 비통한 아버지의 감정까지 섞인다면 멀게만 느껴지던 한국인 가족의 감정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오호.
서준과 김종호가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꼭 말장난 같네요./”
“/하긴 광고로 많이 나오지./”
달리GO 놀GO.
어디서 본 것 같은 광고 카피 문구가 떠올라 서준과 김종호가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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