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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23화 (32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23화

“전부. 만들면 안 될까요?”

“……네?”

기획팀장이 눈을 깜빡이며 제프리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용감하게 말을 꺼냈던 제프리 감독이 다시 쭈그러들었다.

“……안 될까요?”

그런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기획팀장은 방금 소름 돋았던 감독의 눈빛이 자신의 착각인가 싶었다. 평소와 같은 유약한 제프리 감독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획팀장이 입을 열었다.

“아뇨. 됩니다.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전부’가 어디까지를 말씀하시는 건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생존자들]은 재난 영화로 보통의 재난물이 그렇듯 파괴되는 장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재난 영화의 생명이 화려한 파괴 장면이듯 [생존자들]에도 그런 장면이 나올 예정이었다.

“만약 진짜 건물을 무너뜨리는 장면을 찍고 싶으시다면 한두 군데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쓰지 않는 건물을 사서 겉모습을 비슷하게 리모델링한 뒤 진짜로 무너뜨릴 수는 있었다.

‘물론 한 번 건물을 무너뜨리면 끝이니 한 번에 잘 촬영해야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던 기획팀장이 한 영화를 떠올렸다. 악당이 화려하게 건물을 터뜨리는 장면이 CG가 아니라 진짜 폭발 장면이었던 영화를.

“진짜 건물을 폭파시킨 영화도 있는데…… 알아볼까요?”

기획팀장의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안 쓰는 건물도 찾아야 하고 건물을 계획대로 잘 무너뜨릴 수 있는 전문가도 필요했다. 관공서의 협조도 필요할지도 몰랐다.

“아뇨!”

지금까지 만들었던 독립 영화들과 첫 상업 영화에 그렇게 많은 제작비를 쓰지 못했던 제프리 감독은 ‘할리우드의 스케일’에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제가 만들고 싶은 건 배우들이 연기할 세트장입니다.”

“세트장이요?”

“좀 더 현실감 있게 무너진 벽, 튀어나온 철근, 깜빡거리는 비상구 같은 거 말입니다. 배경의 크로마키를 최소한으로 사용해서 배우들이 정말로 그 장소에 있는 것처럼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말입니다.”

건물 폭파가 아니라요…….

제프리 감독의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하.

기획팀장이 턱을 긁적였다.

어쩐지 아쉬워하는 표정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건물 폭파로 또 한 번 홍보 거리를 만들어내려던 기획팀장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야 쉽죠. 미술팀과의 회의 때 말씀해 주시면 될 겁니다. 물론 배우들의 안전 때문에 겉모양은 그럴듯해도 가볍고 상처 입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그러니까 스티로폼이나 특수소재 같은 재료로 만들어질 겁니다.”

“네. 겉만 잘 꾸며지면 괜찮습니다.”

제프리 감독의 끄덕임에 기획팀장이 대본 그대로 재현될 세트장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뛰어난 실력의 미술팀이 함께하니 그 어떤 곳보다 실제 현장 같은 세트장이 만들어질 터였다.

“그렇게 세트장이 만들어지면 배우들 몰입은 잘 되겠네요.”

초록색 크로마키 앞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그런 세트장에서 연기한다면 더 커다란 시너지를 만들어낼 테고 카메라에 담기는 영상도 생생할 터였다.

기획팀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제프리 감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세트장 바닥 부분에는 흔들리는 기계 장치 같은 걸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오. 그것도 현장감 있어서 괜찮겠네요.”

기획팀장의 감탄에 제프리 감독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자신이 구상했던 세트장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 * *

모처럼의 휴일.

난생처음으로 연예기획사에 들른 의사는 조금 들뜬 표정으로 로비를 둘러보았다.

코코아엔터는 ‘이서준 소속사’라는 걸 동네방네 광고하듯 로비 오른쪽 벽면 가득 배우 이서준이 출연했던 작품들의 포스터들을 걸어두었다. 쉐도우맨1, 악령부터 봄이 돌아왔다의 명장면까지. 이렇게 모아 놓으니 포스터들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서준의 포스터를 한 바퀴 둘러본 의사가 왼쪽 벽면에 걸려 있는 아이돌들의 사진도 구경했다. 브라운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레드크라운까지. 아이돌에 별 관심이 없는 의사도 꽤 들어봤던 이름들이었다.

이렇게 모아보니 소속된 연예인의 숫자만 적을 뿐이지 정말 대단한 회사 같았다.

그렇게 잠시 로비를 구경하고 있으니 서준과 매니저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안녕. 서준아.”

서준과 안다호와 인사를 나눈 의사는 두 사람을 따라 서준의 연습실로 향했다.

“여기가 제 연습실이에요.”

“배우 연습실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서 떨리는데.”

“하하. 그렇게 특별한 건 없어요.”

그런 서준의 말과는 달리 문이 열리자마자 의사는 들어가려던 발을 주춤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연습실은 사방이 카메라였다. 어딜 봐도 카메라밖에 보이지 않아 카메라에 거부감이 없는 의사도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다.

‘카메라 공포증 환자에겐 지옥 같은 곳이겠네.’

멍한 얼굴의 의사를 자리로 안내한 서준이 헤헤 웃으며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새하얀 케이크 상자였다.

“뭘 드리면 좋을지 몰라서 제가 좋아하는 빵집 케이크를 사 왔어요. 여기 진짜 맛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서준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종이가방 하나를 꺼냈다.

“이건 제가 나왔던 작품들 포스터구요. 제 사인도 있어요. 브블 형들이랑 화이트 형들, 레크 누나들 앨범이랑 사인도 있어요.”

서준의 말에 의사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듯 서준의 작품을 재미있게 봤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준 모양이었다.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포스터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잘 걸어둘게.”

케이크에 사인된 포스터까지 받으니 책임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의사도 이제는 알았다. 지금 서준이 하는 질문들이 모두 서준의 차기작 [생존자들]에 필요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자신의 의견이 할리우드 영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니…… 자신의 인생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근데 나는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괜찮겠어?”

“네. 그냥 선생님이 보기에 과장된 부분은 없는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증상이 심화하고, 극복하는 모습도 연기할 건데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봐주시면 돼요. 진짜 환자처럼요.”

서준의 말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준이 의사 쪽으로 시선을 두고 연습실 중앙에 자리를 잡자 안다호가 카메라를 조작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 렌즈가 서준을 향했다. 배우라서 그런지 카메라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 말이 스위치가 된 듯 연습실의 분위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연습실 천장에 박힌 조명은 밝았는데 서준이 서 있는 곳만 어둠이 깔린 것 같았다.

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넓은 연습실이 아니라 꽉 막힌 곳에 있는 듯 옴짝달싹도 못 했다.

곧 서준의 손이 허공을 짚듯 움직였다. 일정했던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에는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서준의 시선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어지럽게 허공을 맴돌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의사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참았다.

모두 자신과 서준이 이야기했던 증상인 데다가 배우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매니저가 묵묵히 있으니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모조리 연기라는 의미였다.

‘근데…….’

진짜면 어떻게 하지?

패닉 상태인 듯 숨을 가쁘게 헐떡이는 서준의 안색이 창백했다.

‘저게 연기라고?’

그 순간 서준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서준은 제멋대로 떨리는 손발을 끌어모아 웅크렸다. 손발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번저나갔다. 제멋대로 떨리는 모습이 서준의 의지대로 만들어진 떨림이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거친 숨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서준의 숨소리가 메아리처럼 연습실을 맴돌다 의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결국, 오른쪽 다리를 달달 떨며 참아내고 있던 의사가 벌떡 일어나 서준에게로 달려갔다.

“서준아!”

“네?”

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창백하던 서준의 안색이 확 변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생기가 가득한 서준의 얼굴에 의사는 할 말을 잃었다.

“어…… 떨림이 너무 과했어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서준의 물음에 의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연기 천재라고 들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연기 천재’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직접 본 이서준의 연기는 차원이 달랐다.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경악한 의사의 얼굴에 안다호가 볼을 긁적였다.

‘엄청 연기를 잘한다’는 백 마디 설명보다 한 번 눈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 ‘한 번’이 너무 효과적이었던 모양이었다.

* * *

“……완벽해.”

“정말요?”

의사의 말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1시간 사이 조금 지친 듯 보이는 의사도 그 환한 표정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그래.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모르겠지만.”

“그걸로 충분해요!”

이제 서준은 이걸 응용해서 연기하고, 그 연기에 모자라거나 과한 부분이 있다면 제프리 감독님이 설명해 주실 거다.

“선생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영화 나오면 초대권 보내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서준이도 오늘 고생했어.”

“하하. 고생은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진심으로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에 의사는 다시 한번 서준의 검사 결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재능에 그런 집념이라니…… 이젠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안다호의 말에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보다는 서준이가 고생했죠. 오늘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는지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앞으로 배우인 환자들이 오면 좀 더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이쪽도 자신의 직업에 충분히 만족하는 듯 보였다.

* * *

의사가 흐뭇한 얼굴로 서준의 포스터가 든 종이가방과 케이크 상자를 들고 코코아엔터를 떠난 후 안다호가 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집에 데려다줄까?”

“아뇨. 촬영한 거 조금만 보다가 가려고요.”

어차피 집에 가서 또 볼 거지만 처음 찍었던 영상과 마지막에 찍었던 영상은 지금 보고 싶었다.

“그럼 잠시 2팀 사무실에 다녀올게. 킹즈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대.”

“네.”

서준도 안다호도 익숙하게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안다호가 나가고 푹신푹신 소파에 앉은 서준은 금세 자신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의사 선생님께 들었던 조언을 되새기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연기를 훑어보았다.

잠시 후.

2팀에 다녀온 안다호가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이 집중하고 있는 서준을 불렀다.

“킹즈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는데 12월 4일부터 촬영 시작한대.”

오.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11월 말쯤엔 미국에 가야 하겠네요?”

“그래. 그전에 학교에 설명해서 출석 인정도 받아야지. 현장체험학습신청서였지?”

“네. 맞아요.”

“그래도 전에 알아보니까 여울 예중보다 외부 일로 출석이 인정되는 기한 꽤 길더라고. 편하게 촬영해도 될 것 같아.”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아역 배우도 정해졌대.”

“정말요? 누구예요? 몇 살이래요?”

“이름은 앤드류 워커고 9살이래.”

서준은 자신이 예상했던 아역 배우 후보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안에 ‘앤드류 워커’라는 이름은 없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서준이 동그랗게 떴다.

“와아. 이번이 첫 출연 작품일까요? 이게 첫 작품이라면 연기도 잘할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고. 영상화하지 않은 연극무대에 섰을 수도 있지.”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많은 작품을 관람하려고 노력하는 서준도 한국 내의 연극을 전부 보지 못하는데 땅 넓고 사람 많은 미국이라면 더 어려울 터였다.

“얼른 만나고 싶네요.”

앤드류 워커.

서준이 다시 한번 이름을 되뇌었다.

* * *

11월 말.

배우 이서준과 배우 김종호가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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