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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319화 (319/1,055)

0살부터 슈퍼스타 319화

아늑하게 꾸며진 상담실에 의사와 서준, 서은혜가 앉아 있었다. 오늘 서준은 엄마와 함께 심리 검사 결과를 들으러 왔다.

“연기에 대한 집념이 또래들보다 강하지만 그 집념이 서준 학생의 성장에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고 있고, 본인도 좋은 쪽으로 소화하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조금 긴장하고 있던 서은혜가 물었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기대감이 완전히 같다고 했을 때,”

의사의 말에 서은혜와 서준이 귀를 기울였다.

“어떤 아이는 그 기대에 보답하려고 노력합니다. 부모의 기대심이 아이가 움직일 수 있게 동기를 유발하는 거죠. 하지만 어떤 아이는 같은 양의 기대감이라도 부담감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 아이에게는 부모의 무관심이 좀 더 효과적이죠.”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서준 학생에게 연기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연기를 한다는 것을 정말로 즐겁게 생각하고 있고 더 많은 연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 덕분에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세계를 겪게 되죠.”

오.

거의 족집게 같은 의사의 말에 서준과 서은혜가 감탄했다.

“욕심도 많고요.”

“하하.”

의사의 말에 서준이 정곡을 찔린 듯 웃고 말았다.

“스트레스 지수도 낮고 진로에 대한 걱정도 거의 없습니다. 그 이외의 다른 문제도 없어서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서준 학생도 부모님도 지금까지처럼 지내면 괜찮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세요.”

의사의 말에 서은혜와 서준이 활짝 웃었다. 똑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의사도 따라 빙그레 웃고 말았다.

“아, 선생님.”

“네?”

“잠시 시간 있으시면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서준의 말에 의사가 눈을 끔벅거리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상담이 일찍 끝나서 다음 학생의 약속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직은 서준의 상담 시간이었다.

“10분쯤 시간이 비네요.”

“감사합니다!”

가방을 열고 꼼지락대고 있는 서준이 무엇을 할 건지를 아는 서은혜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상담실을 나섰다. 휴대폰을 꺼내는 모습이 상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이민준에게 알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서준이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서준이 대본을 분석하는 동안 궁금했던 걸 적어온 노트였다.

‘책이나 다큐멘터리만으로 공부하는 건 한계가 있었지.’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했던 말 때문에 서준은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캐릭터 조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쩌면 작품을 구상한 감독님도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까지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점이 중요한 걸.’

막막한 갈림길에서 안전하지만 먼 길을 가느냐, 조금 험하지만 짧은 길을 가느냐.

그 하나를 정하는 데도 캐릭터의 자라온 시간이 필요했다.

캐릭터가 과거에 큰 사고를 겪었다면 안전한 길로 갈 테고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짧은 길로 갈 테니까.

영화라는 짧은 순간만 사람들에게 비치겠지만 모든 행동의 원인인 캐릭터의 역사는 깊고 넓었다. 좀 더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위해서 서준은 오늘도 노력하고 있었다.

서준이 노트 가장 위에 적힌 질문을 읽었다.

“폐소공포증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폐소공포증요?”

고개를 갸웃하던 의사는 곧이어 쏟아지는 질문들에 아득함을 느꼈다.

그렇게 1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서준이 활짝 핀 얼굴로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대단하네.”

서준의 질문에 답을 해주느라 목이 탄 의사가 머그잔에 든 물을 마시며 감탄했다. 어쩐지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서준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절절하게 느낀 것 같았다.

상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은혜가 서준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서준아. 궁금한 건 다 물어봤어?”

“아니. 시간이 너무 짧았어. 그리고 연기하는 것도 못 보여드렸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패닉 상태의 변화를 직접 보고 조언해 주셨으면 했는데 말이야. 시간이 너무 짧았어.”

패닉 상태에 따른 증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서 정신과 의사도 인정할 만한 확실한 기준점이 필요했다. 일반인이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증상이라도 전문가가 보면 엉망진창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시간에 흐름에 따른 환자들의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는 않거든. 환자를 많이 만나본 의사 선생님들은 그 변화 순서를 잘 알 테니까 꼭 물어보고 싶었어.”

그래서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서준이었다.

“그럼 은찬이한테 부탁해서 다른 정신과 선생님 찾아볼까?”

“괜찮아!”

의사에게 전부 질문하지 못했던 것치고는 밝은 표정의 서준이 말했다.

“선생님이 전화번호 주셨어.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래.”

아직 물을 게 많아 보였던 서준의 열정에 저도 모르게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준 의사였다.

“……내 무덤 판 게 아닐까 모르겠네.”

그래도 잘 대답해 주면 사인 하나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사심이 새어 나온 의사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 다음 상담을 준비했다.

* * *

서준과 안다호는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금요일인 오늘 학교를 조퇴하고 미국으로 가 주말을 미국에서 보낸 다음, 일요일 저녁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월요일은 푹 쉬고 화요일부터 학교에 갈 계획이긴 한데…… 안 힘들겠어?”

서준의 옆자리에 앉은 안다호가 물었다. 서준의 의견이 아니었다면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건강검진도 엄청 건강하다고 나온 걸요.”

안전벨트를 푼 서준이 걱정 어린 매니저의 표정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 건강의 비결이 궁금하긴 해.”

“하하하.”

안다호의 농담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다호도 서준을 따라 빙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베어라운드에서 2주 후에 1차 오디션이 있을 거래. 1차는 영상 오디션이고 2차는 미국에서 볼 거라더라. 공고는 오디션 공고 사이트에 오늘 업로드되고. 김종호 배우 소속사에도 전해뒀어.”

안다호는 ‘김종호’의 이름을 말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변에 기자는 없겠지만 어떻게 말이 새어 나갈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다호 형.”

“꼭 붙었으면 좋겠다. 왠지 한국 배우를 할리우드에서 본다니 기분이 이상하네.”

“저도요. 제가 다 떨려요.”

* * *

호텔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서준과 안다호, 그리고 중간에 합류한 킹즈 에이전시 직원들이 베어라운드로 향했다.

“마린사랑은 분위기부터 다르지 않아요, 다호 형?”

“그러게. 이쪽이 좀 더 차분한 것 같네.”

몇 번 들렀던 마린사의 회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라 서준과 안다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린사가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개성이 강한 느낌이라면 베어라운드는 차분한 색으로 꾸며져 단정한 분위기였다.

“반갑습니다!”

로비에 말을 전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생존자들]의 기획과 제작을 총괄하고 있는 베어라운드의 기획팀장이 서준 리와 매니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획팀장과 인사를 나눈 후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기획팀장이 회의실의 문을 열자, 조금 왜소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은 생존자들의 제프리 로덕스 감독님이십니다.”

“서준 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프리 로덕스입니다.”

서준과 제프리 감독이 악수를 나누었다.

마주 잡은 제프리 감독의 손이 조금 차가운 걸 보니 꽤 긴장한 것 같았다.

“그럼 두 분은 여기서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매니저님은 이쪽으로…….”

기획팀장과 안다호가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 다른 회의실로 향하고 이 회의실에는 서준과 제프리 감독, 그리고 서준의 보호 자격인 킹즈 에이전시 직원만이 남아 있었다.

킹즈 에이전시 직원은 배우와 감독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서준은 회의실 테이블 위에 있는 간식거리와 대본을 살펴보고 제프리 감독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던 제프리 감독이 자신의 시선에 움찔 떠는 모습이 보였다.

서준이 선기를 풀어내며 빙그레 웃었다.

“대본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프리 감독님.”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 제프리 감독이 후우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저도 리의 작품 정말 잘 봤어요.”

“준이라고 불러주세요. 감독님.”

“그래요. 준.”

스르르 풀리는 분위기에 제프리 감독이 긴장을 풀고 물었다.

“데이비스 가렛 배우와 연기하는 건 어려울 텐데 괜찮아요?”

“에반하고 리첼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조금 걱정은 되는데 한편으로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프리 감독은 조용히 서준 리를 살폈다.

역시 슈퍼스타의 마음가짐은 뭔가 다른 걸까.

서준 리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생기가 가득한 뺨에 반짝이는 눈동자, 화사한 분위기까지.

걱정 하나 없는 서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프리 감독은 문뜩 궁금해졌다.

“준.”

“네. 감독님.”

“시간도 있으니까 대본 리딩을 해볼까요?”

이미 서준 리의 작품들을 봤지만, 이 반짝이는 배우의 연기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대본을 보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캐릭터 분석을 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을 테니 그건 고려하고 봐야겠지만.’

어쩌면 거절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제프리 감독의 걱정과는 달리,

“네! 좋아요!”

대본 리딩이라는 마법의 단어는 서준을 활짝 웃게 만들었다.

슈퍼스타의 아우라를 직방으로 맞은 제프리 감독은 어쩐지 후광을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환한 표정의 서준이 테이블 위에 있는 대본을 펼치며 말했다.

“감독님도 보시고 고칠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제프리 감독은 정말로 눈만 깜빡했을 뿐이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 후광을 봤다고 착각했을 정도로 생기가 가득하던 서준 리의 얼굴색이 수프 한 스푼도 먹지 못했던 것처럼 새하얗게 죽어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서준 리의 연기를 보고 있던 제프리 로덕스 감독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 * *

얼마 후.

옆 회의실에서 계약서 작성을 끝낸 안다호와 기획팀장이 다시 돌아왔다.

서준이 회의실로 들어오는 안다호를 보며 웃었다.

“다호 형. 끝났어요?”

“응. 킹즈 에이전시에서 한 번만 확인해 보고 사인하면 돼.”

어쩐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멍한 얼굴로 서준 리만을 바라보고 있는 제프리 감독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기획팀장과는 달리 대본을 손에 들고 있는 서준의 모습에 금세 상황을 파악한 안다호가 웃고 말았다.

* * *

호텔로 향하는 길.

안다호가 서준에게 말했다.

“계약서에 추가사항으로 무리한 촬영은 없다고 해놨어.”

“에반이랑 리첼이 그러던데 데이비스가 그렇게 막 나가진 않는데요.”

“그래도 안전장치는 명시해 놔야지. 미국에선 이게 효과적이니까.”

‘뭐. 다호 형 마음이 편하다면 괜찮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서준에게 안다호가 말했다.

“그리고 캐스팅된 거 다음 주쯤 기사로 나갈 거래.”

“빠르네요.”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대본을 보던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 기사가 먼저 나간 다음 종호 삼촌이 오디션을 보겠네요?”

“응. 그렇지.”

데이비스 가렛과 자신이 나온다는 기사가 뜬다면, 단역 오디션이지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몇몇 있을 터였다.

부디.

“종호 삼촌에게 큰 영향이 없었으면 좋네요.”

* * *

그리고 이틀 후.

서준이 학교에서 수학 수업을 듣는 동안 베어라운드의 예고대로 기사가 떴다.

[배우 이서준, 다시 한번 할리우드로!]

[이번엔 마린사가 아니라 베어라운드!]

[이서준과 함께 출연하는 배우는 레드본, 데이비스 가렛!]

[진 나트라와 데이비스 가렛?! 상상도 못 한 조합!]

-헐! 차기작은 할리우드구나!!

=생각도 못 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할리우드!

=올해 하반기에는 미국이 주 무대인듯ㅎ

-베어라운드? 마린사가 아니라서 신기하네.

-오오! 이서준이랑 데이비스 가렛이랑 같은 영화에 나온다고?

=레드본에 진 나트라라. 이건 어셈블에서도 못 봤던 조합ㅋㅋ

=ㅋㅋ 마린사…… 울고 있는 거 아님?

-데이비스 가렛이랑 서준이가 연기하는 거 처음 아니야?

=22 이런저런 파티로 친분은 있던 것 같던데.

=에반 블록이랑 리첼 힐이랑 아는 사이라서 친하게 지내는 듯.

=촬영 때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근데 무슨 내용이야?

=재난물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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