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16화
“반갑습니다. 가렛.”
베어라운드 기획팀장이 데이비스 가렛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다음, 조금 긴장한 듯한 제프리 감독과 인사를 나눈 데이비스 가렛이 웃으며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세 사람은 가볍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기획팀장이 데이비스 가렛에게 대본 하나를 건넸다.
그러자 데이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내신 대본은 읽어봤습니다만…… 혹시 수정된 부분이 있습니까?”
“네. 조금 있습니다.”
제프리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이비스는 대본을 빠르게 훑었다.
미리 표시해 둔 모양인지 노란색 형광펜으로 그어진 대사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데이비스 자신에게 들어온 배역의 대사가 대부분인 것은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데이비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 소문 들으셨나 보네요. 하긴 베어라운드 쪽에서도 말해주셨을 것 같고.”
제프리 로덕스 감독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팀장이 데이비스에게 말했다.
“그럼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데이비스 가렛은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수정된 부분을 중심으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팔랑팔랑 대본이 넘어가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회의실에 가라앉은 긴장감에 제프리 감독은 손을 덜덜 떨었고 기획팀장이 커피로 목을 축였다.
데이비스 가렛은 함께 일하기 어려운 배우로 손에 꼽힌다.
쉐도우맨의 주연배우 에반 블록이 대본을 중심으로 감독의 생각을 파악하고 철저히 연구해 한 치에 오차도 없이 대사를 내뱉고 대본과 어울리는 연기를 한다면, 레드본의 주연배우 데이비스 가렛은 감독보다도 더 캐릭터를 파고들어 철저히 연구해서.
‘……대본을 갈아엎게 만들지.’
기획팀장은 대본을 읽으며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데이비스를 보고 속으로 긴장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신호 같지만 그렇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에반 블록이 철저히 대본분석파라면 데이비스 가렛은 즉흥적 연기파.
에반 블록이 분석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세한 동작들을 계획해서 연기한다고 하면 데이비스 가렛은 온전히 그 배역이 되는 메소드 연기를 보여준다.
‘옛날에는 그걸로 고생을 좀 했다고 했지.’
메소드 연기는 깊게 들어가는 만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배역에 빠져들어 나오지 못해 결국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한 배우도 있었고 그 심각함을 알아 메소드 같은 연기방식을 피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비스 가렛은 꽤 성공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속에 있는 비슷한 이면을 찾아 그 성격을 중심으로 배역을 파악한다.
예를 들면 가족을 대할 때의 마음과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착하고 성실한 성격의 캐릭터라면 다른 배역을 가족을 대할 때처럼 대하고, 날이 서고 경계심 많은 성격의 캐릭터라면 낯선 사람을 볼 때처럼 대한다.
본인의 원래 성격을 극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우러나오면서도 깊게 파고들지 않아 배역에서 빠져나오기도 쉽다.
기획팀장이 마시고 있던 커피가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촬영할 때의 데이비스 가렛은 대본과 다른 대사를 뱉을 때가 많았다. 자신이 생각한 캐릭터라면 대본에 나와 있는 대사와는 다른 대사를 내뱉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정답이니까 감독들도 어쩔 수가 없지.’
마린사의 흥행역사를 만들어준 레드본1이 그 결과였다.
‘대본을 전부 갈아엎었다고 했지?’
처음의 대본에서 살아남은 대사를 찾는 쪽이 더 빠르다고 들었다.
제작사의 기획팀장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갈아엎은 대사들이 줄거리에 어울리는가, 애드리브의 영향으로 줄거리가 바뀌면서 계획해 둔 일정과 준비해 둔 촬영장소에 영향은 없는가, 그렇게 길어진 촬영 기간으로 투자금은 얼마나 더 필요할 것인가.
연쇄적으로 일어난 문제 더미를 떠올린 기획팀장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다 참았다.
‘수정한 대본이 가렛의 마음에 들면 좋을 텐데…….’
데이비스 가렛의 사고로 미뤄졌던 레드본2.
레드본2의 대본은 그나마 반만 수정됐다고 한다. 레드본1을 거치면서 데이비스 가렛이 생각한 캐릭터의 성격을 파악한 덕분이었다.
‘그것도 시리즈의 장점이지.’
1편에서 설정된 캐릭터의 성격을 바탕으로 2편, 3편까지 부가적인 설명이 없어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
하지만 이번 영화는 단편이었다.
기획팀장이 옆을 바라보았다. 데이비스 가렛이 대본에 흥미를 보인다는 소식에 열심히 대본을 수정한 제프리 감독의 얼굴은 이젠 거의 새하얗게 보였다.
그동안 데이비스 가렛이 연기했던 캐릭터들을 보고 고심해서 수정했지만, 정답일지는 모르겠다고 말하던 제프리 감독의 모습이 떠올랐다.
‘감독님이 잘 컨트롤하시면 좋겠지만.’
데이비스 가렛의 즉흥적 연기는 그 작품을 탄생시킨 감독마저 자신보다 뛰어난 캐릭터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데이비스 가렛이 마음대로 연기한 촬영본은 속이 쓰려도 쓸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전부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누가 자신이 열심히 만든 작품의 수정을 바라겠나.
그나마 히어로영화 같이 시나리오‘팀’이 있어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간 작품들은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대사 하나 지문 하나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 감독이나 작가들에게 데이비스 가렛은 그다지 반가운 타입의 배우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작품을 ‘빼앗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제프리 감독님은 어떠시려나?’
숨도 쉬지 않고 수정된 대본을 읽는 배우를 바라보는 제프리 감독은 촬영장에서도 네네, 하고 넘어갈 것처럼 보인다.
기획팀장의 마음은 복잡했다.
베어라운드의 제일 큰 목표는 흥행.
회사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으니 티켓파워가 센 데이비스 가렛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스 가렛이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을 쓴 제프리 감독도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대본을 판다고는 하질 않으니…….’
그게 유약한 제프리 감독에게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강경한 모습이었다.
데이비스 가렛의 생각대로 대본이 엎어지든, 제프리 감독의 대본대로 진행되든, 배우와 감독 둘 다 별 탈 없이 촬영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기획팀장이었다.
“좋네요.”
시나리오를 덮은 데이비스 가렛이 입을 열었다.
좋은 대답이었지만 기획팀장과 제프리 감독은 방심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전부’ 갈아엎은 레드본1의 대본을 처음 봤을 때도 데이비스 가렛은 ‘좋네요’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서부터 볼까요?”
데이비스 가렛의 말에 기획팀장과 제프리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옛날.
자신의 대본을 사랑하는 감독과 시나리오 수정 때문에 한바탕 다툰 적이 있는(법정 싸움까지 갈 뻔했다) 데이비스 가렛은 그 이후부터 계약서에 ‘애드리브와 시나리오 수정’에 관한 사항을 꼭 기재하고 있었다.
데이비스 가렛과 기획팀장, 제프리 감독까지 머리를 맞대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미리 규격화되어 있는 베어라운드의 계약서에 데이비스 가렛의 요구와 제프리 감독의 요구가 들어간 것이었다.
제프리 감독의 요구는 평범했다.
촬영 날까지 배역에 어울리는 몸을 만들 것. 그 세세한 수치에 데이비스 가렛이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고생 좀 하겠네요.”
하지만 입금 전, 입금 후가 다른 할리우드 배우라면 익숙한 조항이었다.
이제 이 계약은 데이비스 가렛의 에이전시와 베어라운드 측에서 확인하고 수정한 끝에 성사될 터였다.
긴장감이 흐르던 회의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기획팀장은 굳은 목 근육을 풀었고 제프리 감독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시나리오의 앞부분, 작품에 나올 캐릭터들을 훑어보던 데이비스 가렛이 조금 녹아내린 듯한 제프리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이 배역, 배우 정해졌습니까?”
데이비스 가렛의 물음에 제프리 감독이 다시 긴장한 듯 굳어 대답했다. 계약서를 다시 한번 살펴보던 기획팀장도 고개를 들었다.
“아뇨. 아직.”
“그 배역은 오디션을 볼 예정입니다.”
기획팀장의 말에 데이비스 가렛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배우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네?”
“감독님 마음에 드실 겁니다.”
베어라운드 기획팀장과 제프리 감독이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함께 연기하고 싶었던, 나이는 어리지만, 연기력은 성인 배우들을 압도하는 아역 배우를 떠올린 데이비스 가렛이 빙그레 웃었다.
* * *
“독립영화라…….”
코코아엔터 배우 이서준 전담팀에 독립영화를 찍고 싶다는 배우의 요청이 들어왔다. 전담팀인 만큼 배우가 원한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그 즉시 2팀이 움직였다.
영화와 관련된 학과들의 상영회 같은 행사는 없는지, 독립영화 제작을 위해 올라온 공고는 없는지 알아보고 독립영화 영화제들에도 관심을 쏟았다.
연말이 가까워져 서울, 부산, 대전 등에서 독립영화제가 열리게 되면서 독립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때문에 배우를 원하는 곳도 늘었다.
“연극만 찾아다니던 때가 있어서 아예 막막하진 않네요.”
연극 ‘거울’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작품들을 골라내는 것뿐만 아니라 ‘장르’도 만족시켜야 했다.
그 말에 2팀 직원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거 결국 우리가 찾은 게 아니라 서준이가 책을 찾아서 각색해서 무대에 올린 거라서 말이죠.”
“상상도 못 했던 발상이었죠.”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말이 그렇게 확실하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직원의 혼잣말에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 다들 침묵했다.
“그래도 뭐, 우리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죠. 아예 범위를 넓혀서 책이나 다른 장르의 작품들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심히 찾아봅시다!“
“네!“
배우에게 어울리는 좋은 독립영화 작품을 찾아주려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2팀에게 안다호의 연락이 온 건 불과 몇 시간 뒤였다.
* * *
“오늘까지는 장르 구분 없이 가지고 왔어. 내일부터 독립영화 시나리오들을 들고 올게.”
“네!“
서준이 자리에 앉아 안다호가 들고온 상자 안에서 시놉시스 하나를 꺼냈다. 안다호는 서준의 맞은편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첫 시놉시스는 드라마였다.
서준은 줄거리를 읽고 캐릭터 소개를 읽었다. 2팀에서 적어놓은 감독과 작가의 이력을 읽으며 그중 보았던 드라마를 떠올렸다.
일단 작가.
이 작가의 최신작은 안타깝게도 용두사미였다. 그것도 꽤 초반부부터 무너졌다. 물론 작가에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겠지만, 이 시놉시스를 보면 줄거리에 비해 캐릭터 설정이 빈약해 보이니 작가 실력이 뛰어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감독.
그동안의 드라마를 떠올리면 연출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번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캐릭터 간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지만 감독의 지금까지 연출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사이에 실력이 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까지 파악하는 건 아무리 서준이라도 무리였다.
첫 시놉시스를 옆에 놔둔 서준이 다음 시놉시스를 꺼냈다. 그사이 안다호는 노트북으로 독립영화에 대해 찾아보고 있었다.
독립영화의 감독은 성격이나 촬영 방식,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보니 상업영화 감독들에 대해 알아볼 때보다 많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서준이를 함부로 대하진 않겠지만…….’
뒤에서 무슨 말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항상 좋은 사람들만 있지는 않으니 2팀에서 더욱 철저하게 서포트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으으음…….”
서준의 목소리에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안다호가 고개를 들었다.
대본 하나를 붙잡고 자신과 대본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보는 서준이 보였다. 낯선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서준아?”
“으음. 그게 말이죠. 다호 형…….”
이게 하고 싶다, 저게 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거침없이 말하는 서준답지 않았다.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서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독립영화 찾는 거 미뤄도 될 것 같아요.”
“응?”
독립영화를 찾아달라고 말한 지 하루 만에 번복한 서준도 민망한 듯, 눈을 끔벅이는 안다호의 시선을 피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영어로 적힌 대본.
하루만 늦었어도 독립영화 대본들에 밀려 보지 못했을 상업영화 시나리오였다.
거기다 제작사도 메이저라 서준이 없어도 촬영은 진행됐을 터였고 뒤늦게 대본을 보고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을 수도 있었다.
‘뭐, 그렇게 내가 못 찍은 작품이 더 있겠지만…….’
2팀에서 찾을 독립영화 작품 중에 이것보다 더 좋은 작품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타이밍이다.
서준은 이미 이 대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서준은 하루만 늦었어도 보지 못했을 대본이 어디로 사라질까 품에 소중히 껴안고 고개를 들어 간절한 눈빛으로 안다호를 바라보았다.
“저…… 이거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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