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314화
“준은 내레이션도 잘하네요.”
“아무래도 현장에 같이 촬영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함께 ABS 방송국에 들른 킹즈 에이전시 직원의 말에 안다호가 말했다. 오늘은 서준이 촬영했던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녹음하는 날이었다.
유리 벽 너머 녹음실 안에서 대본을 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서준의 목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발음이 좋았다.
[혹등고래는 여름에는 추운 극지방에서 머물고 겨울에는 번식을 위해 열대나 아열대의 바다로 이동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극지방으로 이동할 때 낙오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시죠?”
“네. 모레 귀국할 예정입니다.”
오늘 녹음으로 할 일이 모두 끝난 안다호뿐만 아니라 휴가 일정이 끝난 서준과 부부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일이 많을 것 같네.’
서준의 휴가 중에 보지 못했던 대본들도 밀려 있을 터였고 시타를 했던 그 날 이후 야구 경기의 시타 제안과 축구 경기의 시축 제안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사무실에 쌓여 있을 일거리를 생각하던 안다호에게 킹즈 에이전시 직원이 말했다.
“최근에 들어온 대본들은 바로 보내겠습니다. 야구 관련 대본이 많이 들어왔더라고요.”
“하하. 한국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화제가 되면 그 주제로 한 대본이나 시놉시스가 밀려 들어오게 마련이었다. 자주 겪어본 일이라 이젠 요령도 생겨 그다지 버겁지는 않았다.
‘그중에 서준이의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안다호가 녹음실 안의 서준을 바라보았다.
[혹등고래의 수명은 45년에서 100년으로…….]
진지한 얼굴로, 가끔 텔레비전 화면에 우리와 로키가 비치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서준은 내레이션 녹음을 완료했다.
* * *
서준과 부부, 안다호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일주일 후.
서준이 참여한 다큐멘터리가 방송할 날이 다가왔다.
[오늘 저녁, SBC 배우 이서준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방송 예정!]
[SBC, 다큐멘터리 1부 ‘지금 우리는’ 오늘 방송!]
[다큐멘터리 2부 ‘바다에 있다’ 다음 주 방송 예정!]
-SBC 5일 전부터 징하게 홍보하네. 어차피 볼 건데ㅎㅎ
=얼마나 신나겠어ㅋㅋ 소문으로는 다큐 사자마자 광고도 완판이라던데.
=SBC 방송 시간도 옮겼어ㅎㄷㄷ
-1부가 서준이 나오는 거지?
=ㅇㅇ 근데 2부도 서준이가 내레이션해서…… 둘 다 봐야지.
-언제 시작하려나! 광고 기네.
-이서준 출연이니까ㅎㅎ
-오. 시작한다.
[ABS 다큐멘터리 1부 : 지금 우리는]이라는 제목이 뜨며 화면이 밝아졌다.
다큐멘터리 1부 ‘지금 우리는’의 시작은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마이드만 비치를 찍고 있던 관광객의 영상을 그대로 내보내고 있었다. 수영하는 사람들, 매트 위에 느긋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 푸르른 바다와 내리쬐는 햇살.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폭풍전야ㅋㅋ
-재난 영화의 시작은 꼭 이렇더라ㅋㅋ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곧 긴장감 도는 음악과 함께 도롯가에 차 한 대가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CCTV 화면인 듯 화질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서준이야?
-이서준인 듯!
누군가 건네준 모자를 꾹 눌러쓰고 CCTV 화면 밖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영상이 바뀌고 관광객의 영상 속에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소년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시청자들도 알 수 있었다.
-……와. 차 타고 가다가 본 거야?
-속도로 보면 진짜 고민도 없이 내린 것 같은데?
[엄마, 고래!]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헐떡이는 고래가 보였다. 모두 휴대폰으로 고래를 찍거나 주춤거리는 가운데 친구로 보이는 두 소년의 이야기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에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고래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다들 정말 좋으신 분들이다ㅠ
-이거 라이브로 봤는데 다시 봐도 눈물 나네ㅠㅠ
그 중심에 있는 건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소년이었다. 옷이나 신발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물을 뿌리고 고래의 상태를 살폈다. 간간이 보이는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직 고래를 구하는 데 집중한 서준의 얼굴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멋지네.
그때, 멀리서 씨 세이브의 보트가 나타나고 환호성이 퍼졌다. 보트의 등장에 서준이 그제야 웃는 모습도 작게나마 보였다.
모두의 관심이 고래와 씨 세이브에게 쏠렸을 때, 여러 영상의 끝에서 가장 영웅이라고 불릴 만한 두 소년이 자리를 뜨는 모습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화질이 좋지 않은 CCTV 영상 속에서 고래가 바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차에 오르는 두 소년의 모습도 나왔다.
[서준 리였어!]
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저때 진짜 놀람ㅎㅎ
-진심ㅋㅋ 라이브로 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리지름ㅎ
서준 리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흘러나왔다.
출연했던 드라마와 영화, 수상내용까지.
-이렇게 보니 장난 아니네.
-이거 미국 ABS 다큐 아님? 한국 드라마도 나오네?
-내의원Naeuiwonㅋㅋㅋ
화면이 둘로 나뉘며 멋지게 차려입고 상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서준 리의 모습과 물에 흠뻑 젖어도 고래를 구하기 위해 진지한 얼굴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서준 리의 모습이 대비되어 나타났다.
-진지한 서준이도 멋지네!!
-다큐 좋다ㅠ 캐릭터가 아닌, 연기하지 않는 ‘이서준’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게ㅠㅠ
-222 그 ‘이서준’이 너무 멋짐ㅠ
-오늘도 이렇게 푹 빠져 버리구요ㅠㅠ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졌다.
차에서 내리는 소년이 화면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서준 리입니다.]
그 인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다.
서준은 씨 세이브에 관해 설명을 듣고 센터를 소개받고 저마다 사연이 있는 동물들을 만났다.
구조팀 팀장 케이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진지한 얼굴로, 때로는 조금 슬픈 얼굴로 유리 벽 너머를 바라보는 서준 리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만들었다.
-많이 먹어ㅠ 몰리ㅠㅠ
-아. 어제 수족관 가서 돌고래쇼 봤는데ㅠ 미안하다ㅠ
케이트가 바다관을 소개했다.
돌고래 로키의 등장에 다큐멘터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로키 귀여워!
-물 다 튀었어ㅋㅋ 담당자는 익숙한 것 같은데ㅋㅋ
-센터 공식 ‘장난꾸러기’ㅋㅋ
로키의 구역 옆자리는 서준 리가 구했던 새끼 혹등고래의 자리였다.
새끼 혹등고래는 서준을 알아보는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청자들도 서준을 알아보는 듯 우우웅 노래까지 부르는 새끼 혹등고래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케이트의 권유로 서준이 새끼 혹등고래의 이름을 정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구할 수 있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 그러니까 ‘우리’가요.]
[좋네요. We. 우리.]
-헐. 한국 이름이었어?
-뜻도 좋음ㅠ
-우리라…… 그래서 제목이 ‘지금 우리는’이었구나.
-미국 제목도 /Now URI(We) is/임ㅎ
센터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데 우리와 로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바다관에 설치해 놓은 카메라에 우리의 구역으로 첨벙! 넘어가는 로키의 모습이 찍혔고 그 모습이 그대로 방송되었다.
로키의 탈출에 피식피식 웃던 시청자들이,
[우리랑 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로키. 넌 우리 꼬리 한 방이면 끝이야.]
서준의 진지한 어투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덩치로는 쨉도 안 됨ㅎ
-서준이도 진지하게 말하는 게 웃겨ㅋㅋ
-누가 탈옥돌고래ㅋㅋ래ㅋㅋ
둘째 날은 서준이 어린 동물들과 다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이 나왔다.
서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새끼 거북이들과 서준의 손동작 한 번에 배를 뒤집는 물개. 그리고 제자리에 옴짝달싹도 하지 않던 바다사자까지 움직이는 서준의 능력에 씨 세이브 팀원들이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얼른 동물들을 치료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준이 천직은 사육사가 아니었을까?
-배우에 야구선수에 사육사까지. 못하는 게 없네ㅋㅋ
-나도 잘 키워질 자신이 있는데……!
-22 말 잘 들을게요!
-씨 세이브 팀원들도 놀란 표정으로 손은 빠르게 치료하는 게 웃김ㅋㅋ
-할 일은 잊지 않는 프로ㅋㅋㅋㅋ
셋째 날.
씨 세이버를 타고 바다로 향하는 서준의 모습이 나타났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서준의 화보 같은 한 장면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씨 세이버 위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다 지시를 내리는 구조팀 팀장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의아함도 잠깐이었다.
씨 세이브가 잠수한 곳에 그물에 엉킨 고래 한 마리가 있었다. 무사히 고래를 구조하고 배에 오르는 잠수팀 팀원들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이래서 프로인 모양;;;
-진짜 아무 전조도 없지 않았나? 바닷속이 보이는 건가?
다시 평화로운 풍경이 비쳐,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이드만 비치! 돌고래 수십 마리가 좌초됐대요!]
팀원의 말에 다시 씨 세이버가 빠르게 움직였다.
-나 이거 라이브로 봤음!
-나도. 56마리던가? 모래사장 위에 돌고래가 엄청 올라와 있던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더라.
구조팀 팀장 케이트의 부탁에 보트에 오르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씨 세이브의 보트가 해변에 도착했다. 텔레비전 화면에 새까만 돌고래 수십 마리가 헐떡이는 모습이 비치자 웃고 있던 시청자들도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오…….
씨 세이브는 해변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돌고래들을 붙잡아 바다로 돌려보냈다.
서준의 모습을 중심으로 돌고래를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방송되자 그 자리에 있었던 시청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글을 올렸다.
-그때 있었던 사람들 다 놀라고 있음ㅋㅋ
-준이었다고?! 못 봤는데?!×100 ㅋㅋㅋ
-역시 이서준ㅎㅎ 워킹맨 때도 봤지만 일코 장난 아님ㅎ
화면이 어두워지고 마지막 날, 이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우리하고 로키와 헤어지는 날이에요.]
서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조금 더 일찍 왔어요. 더 오래 보고 싶어서요.]
옷을 갈아입은 서준이 로키의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키와 우리의 구역을 바다와 가장 가까운 구역으로 바꿨다는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로키를 걱정했다.
-탈출하는 거 아니야?
-로키라면 가능한 이야기닼ㅋㅋ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가기야?
-연쇄탈옥돌고래ㅠㅠ
다행히 우리와 놀고 있는 로키의 모습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우리와 로키에게 흠뻑 빠진 시청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나왔다.
새하얀 길 끝 홀로 앉아 있는 서준의 옆 모습과 우리가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
그 뒤로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은 새파랬고 점점이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개와 늑대의 시간.
서준처럼 보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모습.
뒤늦게 영상을 발견한 피디는 이 장면을 하나의 편집도 없이 그대로 넣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등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적막감이 흘렀다.
서준의 손이 천천히 ‘우리’에게로 뻗어 나갔고 그 모습에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시청자들도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어? 어!, 하는 목소리와 함께 무겁던 분위기가 일순 탁, 풀렸다.
화면이 위로 향했다. 갑자기 바뀐 화면에 의아하기도 잠시 시청자들이 입을 쩌억 벌렸다.
-헐? 이게 여기도 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목격됐다더니…… 이게 진짜 처음인가?
서준의 바로 위, 지구를 한 바퀴 돈 고래 구름이 있었다.
-왠지 친근한 느낌ㅎ
-22 많이 봐서 그런가?
잠시 고래 구름을 보여주던 화면이 바뀌어 우리와 로키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모습이 비쳤다.
촤아아악!
우리의 멋진 브리칭과 그 모습을 따라 하는 로키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웃고 있다ㅠㅠㅋㅋ
-둘 다 건강해져서 다행임ㅠㅠ
-앞으로 다치지 마!
우우웅!
삐이이!
브리칭 이후에도 몇 분이나 씨 세이버의 근처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던 우리와 로키가 천천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흠뻑 젖은 모습으로 우리와 로키를 배웅하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바닷속이라 보이지 않는데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서준의 검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듯 보였다.
[혹등고래는 바다의 수호자라고 불립니다.]
나지막한 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격이 온순해서 바다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곤경에 빠진 동물들을 돕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다에서 위험에 빠졌다면 혹등고래가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커다랗게 자란 우리와 로키가 여러분들을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바다. 우리가 살지 않는다고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끼 혹등고래 우리가 있고 장난꾸러기 돌고래 로키가 있습니다. 새끼 거북들이 살 곳이며 몰리가 돌아갈 집이기도 합니다.]
[바다의 환경은 사람들의 환경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도 바다에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서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바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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