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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295화 (295/1,055)

0살부터 슈퍼스타 295화

송유정은 오늘도 다른 날과 같이 임예나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서준이가 신고 나온 운동화 완판이라며?”

-응. 짧게 짧게 나오는데도 다들 잘도 찾아서 산다니까. 나도 오프라인 판매점 돌아다녀서 겨우 샀어.

“얼른 물건 좀 풀렸으면 좋겠다.”

-나도 몇 켤레 더 사고 싶은데 언제 풀리려나.

아직 광고가 나오는 MBS 채널을 튼 송유정과 임예나가 떠들었댔다.

“아직 시작 안 했지?”

그리고 송유정의 엄마.

“응. 아직 멀었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영업에 성공한 프로 영업러 임예나가 휴대폰 건너에서 인사했다.

“엄마. 예나 서준이 운동화 샀대.”

“정말?”

송유정의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4월부터 5월이 된 지금까지 방송된 ‘봄이 돌아왔다’는 대단한 홍보 효과를 보여주었다.

첫 방송부터 완판된 물건들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이서준이 신고 나왔던 운동화가 그랬다. 대비하고 있던 운동화 브랜드에서도 입을 쩍 벌릴 화력이었다.

“운동화는 엄청 빨리 품절됐다고 뉴스에도 떴던데…….”

-에헤헤헤.

임예나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광고들이 훌쩍 지나갔다.

“시작한다!”

다시 보기로 너무 돌려봐서 익숙해진 오프닝 화면이 지나가고 봄이 돌아왔다 마지막 화가 시작했다.

* * *

-너 애인 생겼어?

“아니?”

출근 준비를 하던 김서연이 엄마의 말에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유성진과 함께 다른 사람이 떠올라 버렸다.

“갑자기 애인은 무슨!”

-목소리가 밝아져서. 너 엄마랑 이렇게 길게 통화하는 것도 되게 오랜만이잖아.

현관 쪽으로 향하던 김서연이 몸을 멈칫했다.

-전화만 하면 축 처진 목소리로 항상 별일 아니다, 괜찮다, 일이 바빠서 끊어야겠다, 라고만 하고.

“그건…… 진짜 바빴으니까 그러지.”

-지금은 안 바쁘고?

바쁘다.

다른 때보다 더 바빴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어쨌든 지금이 더 보기 좋네. 누가 우리 딸을 이렇게 바꿔놨는지 궁금하니까 얼른 소개해 줘. 아빠도 궁금하대.

“아, 애인 없다니까!”

웃음기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에 김서연도 웃고 말았다.

“그러네.”

언제부터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었을까.

김서연의 시선 끝에 노란색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

* * *

“잠시 쉬었다 합시다.”

촬영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도중, 최유원 감독이 쉬는 시간을 가졌다.

환하게 웃고 있던 모델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촬영장 한쪽을 향했다. 김서연이 모델들에게 콘티 설명과 촬영 중 부족했던 부분을 알려주었다.

급하게 섭외된 모델은 요새 뜨고 있는 아이돌그룹으로 기획3팀 회의에서 나온 많은 콘티 중 광고주가 다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로 촬영이 끝나서 다행이에요. 새 모델들도 잘해주고. 대행사분들도 다들 열심이시고.”

“그러게.”

스태프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최유원 감독의 시선은 김서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최유원 감독의 시야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자신처럼 김서연을 바라보고 있는 이현성 팀장이었다.

기획팀 직원 하나가 이현성 팀장을 불렀다. 이현성 팀장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아이돌들에게 설명하고 있던 김서연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현성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눈빛에 민감한 최유원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 * *

촬영이 재개되었다.

촬영을 하고 있는 아이돌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얼굴로 촬영장을 바라보고 있는 이현성 팀장을 볼 수 있었다.

김서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현성 팀장이 고개를 돌렸다. 지레 놀란 김서연이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어쩐지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김서연은 어쩐지 이 눈빛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샤프심과 종이가 닿는 소리가 들리고 창을 통해 따스한 햇볕이 비췄다.

유성진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김서연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다 고개를 숙였다.

김서연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어려운 듯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유성진을 웃으며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서로가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시선이 마주쳤다.

아아.

첫사랑이었다.

* * *

“그럼, 오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조심히 가세요!”

“비 맞지 마시고요!”

성공적으로 촬영을 끝낸 기획3팀과 촬영진의 회식이 끝났다.

“서연 씨.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도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최유원 감독이 밝게 웃는 김서연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감독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최유원 감독을 시작으로 하나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김서연에게 물었다.

“대리님. 뭐 타고 가세요?”

“아, 이 앞에서 버스 타고 가려고요.”

“그럼 저랑 같이 가죠.”

이현성 팀장의 말에 김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김서연과 이현성 팀장이 나란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비가 내렸다.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고 술도 몇 잔밖에 마시지 않았다. 제법 멀쩡한 정신으로 이현성 팀장과 걸어가던 김서연은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도서관에서 유성진과 공부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각자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김서연이 먼저 버스를 탔다.

“김서연!”

“어? 왜?”

비가 와서 창문을 열지 못했다. 사람들도 꽤 있었고 스피커에선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유성진의 부름에 열여덟의 김서연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유성진이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노란 우산이 바람을 막기 위해 기울어졌다.

곧 노란 우산이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 아래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숨을 멈추고 만 김서연은 소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버스 엔진 소리나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목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유성진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내일 학교에 가면 물어봐야지. 뭐라고 했는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그 모습을 끝까지 보던, 두 뺨이 상기된 열여덟의 김서연이 작게 웃었다.

하지만 김서연은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유성진은 그대로 떠나버렸으니까.

* * *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유성진의 전학 사실을 알리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김서연이 입을 열었다.

“‘이현성’ 팀장님.”

유난히 이름에 강세가 들어간 것은 기분 탓이 아닐 터였다.

“예?”

“혹시 유성진이라는 이름 아세요?”

김서연의 물음에 발걸음을 멈춘 이현성 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김서연이 이현성 팀장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렸다.

편의점에서 산 두 개의 투명한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 아래에서 이현성 팀장이 웃었다.

비 오는 그날.

버스 밖에서 웃던 그 소년처럼 웃었다.

“오랜만이네. 서연아.”

* * *

김서연과 이현성이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우산을 입구 우산통에 꽂고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현성은 익숙하게 복숭아 음료와 커피를 주문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뭐든지 물어봐.”

“……언제부터 나라는 걸 알았어…… 요?”

“말 편하게 해.”

웃으며 말한 이현성이 기억을 더듬었다.

“첫날 만났을 때, 얼굴이 비슷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이름까지 같아서 신경을 쓰게 됐어. 그러다가 네가 그 김서연이라는 걸 알았지.”

김서연이 이현성을 보고 유성진을 떠올린 것처럼 이현성도 열여덟 살의 김서연을 떠올린 것이리라. 김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왜 나한테 그 일을 맡겼는지 물어봐도 돼? 내가 비슷한 제품 기획으로 퇴짜 맞았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퇴짜맞은 첫 번째 기획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김서연이라면 한 번 실패한 일이라도 잘해낼 테니까.”

“사람은 변해. 벌써 14년이나 지났잖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풋풋한 사랑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활기차고 당차던 열여덟의 김서연은, 많은 시간을 보내고 힘든 일을 겪고 절망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그렇게 초라해져 서른두 살의 김서연이 되어버렸다.

김서연의 말에 쓰게 웃은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 전 기획안은 괜찮았으니까 아무런 참견이 없다면 잘 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현성의 말에 잔을 만지작거리던 김서연은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을 꺼냈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거야?”

김서연은 일요일에 그렇게 헤어지고 월요일에 학교에서 유성진의 전학 소식을 들어야 했다. 둘이서 열심히 공부한 기말고사도 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현성의 얼굴이 흐려졌다.

“내가 한국으로 전학 온 이유랑 비슷해.”

“……그게 뭔데?”

열여덟의 김서연은 유성진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유성진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 어머니는 한국에 계시고 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갔지. 고등학생이 되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한국에, 어머니에게로 날 보냈어.”

아무런 의논도 없는 통보였다.

비행기 티켓을 내미는 아버지에 유성진은 떨리는 손으로 그 티켓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성년자인 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지.”

김서연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꾸욱 참아냈다.

이현성은 어쩐지 그런 기색을 알아차린 듯 작게 웃었다. 이렇게 담담하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그날도 그랬어. 이번에는 어머니가 날 미국으로 보내신 거야. 집에 돌아와 보니 짐은 모두 싸져 있었고 모든 준비도 끝내진 상태였지.”

차가운 어머니의 눈빛에 열여덟의 유성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서연이와 기말고사를 치고 점수를 매기고 고3을 보내고 공부하고 수능을 치고 대학을 가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오래…….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유성진은 울고 말았다.

“너한테 연락할까 했는데…… 내가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국에서의 생활도 좋지는 않았다.

서른두 살의 단단해진 이현성이 말을 삼키고 김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 덕분에 그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어.”

넌 나의 봄이었고.

나는 따뜻한 봄을 알고 있어서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유성진, 아니, 이현성의 눈빛에 김서연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래서 네가 김서연이라는 걸 알았을 때, 네가 옛날처럼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현성은 첫날 보았던 어두웠던 김서연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런 김서연을 옛날의 모습으로 돌리고 싶었다. 활발하고 다정하고 환하게 웃는 열여덟의 김서연으로.

“근데 그것도 내 욕심이더라.”

부모의 욕심으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떠나고, 유성진이라는 이름에서 이현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만 남자가 쓰게 웃었다.

“밝게 살라고 하는 것도 누군가에겐 강요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냥 멀찍이서 도와주기로 했어.”

처음에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정도의 느낌이었다. 14년 전의 기억은 너무 오래되고 감정도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김서연을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늘 촬영장에서 14년 전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좀 더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김서연이 바로 이렇게 물어볼 줄은 몰랐다. 잠시 마른 세수를 하던 이현성이 두 손을 내리고 김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아. 김서연.”

이현성은 쑥스러운 듯 웃으면서도 시선은 김서연에게서 떼지 않았다.

나지막한 부름에 김서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좋아해.”

아.

알 것 같다.

버스 밖에서 유성진이 읊조렸던 말.

그날 듣지 못했던 말.

노란 우산 아래.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년이 방금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연아. 좋아해.’

이현성과 최유원의 모습에서 유성진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을 시작으로 옛날의 추억을 하나둘 떠올린 김서연은 자신의 인생에도 이렇게 행복하고 따뜻했던 나날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바쁘고 힘든 ‘지금’에 파묻혀 행복했던 기억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서연의 인생이 항상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성진의 추억과 함께 돌아본 과거는 김서연이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에서야 할 수 있었다.

“나도 좋아해.”

서른두 살의 김서연이 열여덟 살의 김서연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활짝 웃었다.

김서연의 미소에 이현성도 그날의 소년처럼 환하게 웃었다.

카페의 노란색 차양 아래.

유리창 너머,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힘들었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우리의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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