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88화
오늘 촬영은 없지만 잠시 들른 강태영이 서준의 연기에 탄성을 내뱉었다. 바로 어제 그렇게 웃던 이현성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김서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확실히 현대 부분 찍고 나서 보니까 이현성이랑 똑같네요.”
강태영의 말에 박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역시 우리 서준이! 어제 촬영도 잘했지만, 오늘도 잘해!”
응원봉이 있었다면 소리 없이 격렬하게 흔들었을 만큼 들뜬 표정으로 촬영장을 보고 있던 강태영의 모습에 박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준의 앞에서는 그나마 자제하는 듯했지만 서준이 없는 곳에서는 이리저리 티를 내고 다니는 강태영이었다.
“하긴. 팬들도 알고 있을 정도니…….”
아마 스태프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컷, 오케이!”
그사이 첫 신 촬영이 끝났다.
다시 유성진에서 이서준으로 돌아온, 서준이 한쪽에 서 있는 강태영과 박도훈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박도훈은 작게, 강태영은 거의 팔을 휘두르듯 손을 흔들었다.
서준이 웃음을 터뜨리자, 친구들이 서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오. 박도훈 선배님이네!”
“강태영 선배님도 있어!”
“그러고 보니 강태영 선배님 서준이 팬이시라며?”
“초등학생 때부터 팬이었대.”
서준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봄이 돌아왔다’가 화제가 되다 보니 배우들에 대해서도 하나둘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클릭 수를 늘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기삿거리를 찾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신경도 안 썼던 기삿거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나잇대가 어리거나 연기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배우 중 몇몇은 일반인 시절 ‘할리우드 스타, 이서준’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근데 팬이랑 서준이랑 같이 촬영하게 돼서 엄청 화제가 돼버렸지.”
양주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성덕 강태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몇 개나 났는지 모른다. 덩달아 인터뷰로 서준의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들의 목록이 뜨기도 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서준과 아이들은 조연출의 외침에 다시 촬영을 준비했다.
* * *
교실에서 찍어야 하는 장면들이 많아 오늘 촬영할 분량은 꽤 남아 있었다. 유청아 작가가 대본을 많이 적어 보내서 여러 번 촬영장을 만들지 않고 한 번에 찍을 수 있었다.
‘보통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정선이 달라서 헤매기도 하지만.’
촬영분을 돌려보던 공희찬 피디가 싱글벙글 웃었다. 서준과 정보람이 잘해줄 테니 바짝 찍고 편집에 전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다음 촬영하겠습니다!”
김단비의 말에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배우들도 다시 세트장에 자리를 잡았다. 정보람의 옆자리에 서준이 앉았다.
모두 촬영 준비를 끝낸 걸 확인한 공희찬 피디가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액션!”
유성진이 반장 김서연의 옆자리에 앉고 담임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앞뒤 자리에서 있던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던 아이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유성진에게 다가왔다.
“미국 어디서 왔어?”
“영어 잘해?”
“미국에서 살았으니까 영어는 당연히 잘하겠지!”
“할리우드 가 봤어?”
미국에서 온 전학생이라는 말에 질문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유성진에게서는 한마디의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길어지려던 침묵에 김서연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얘도 오늘 처음이라 긴장했나 봐. 이렇게 몰려오면 나라도 무섭거든!”
김서연의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인 아이들이 자리로 향했다.
그 모습에 김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유성진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교실에 막 들어왔을 때랑 별로 다르지 않았다.
‘왠지 그렇게 친해지지는 못할 것 같네.’
그래도 적응할 때까지는 잘 대해줘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속으로 한숨을 쉬며 첫 수업을 준비하려고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려던 김서연은 유성진의 떨리는 손을 보고야 말았다.
“컷! 오케이!”
* * *
며칠 후.
야외 촬영은 유청아 작가가 모델로 삼은 고등학교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학교 측도 흔쾌히 허가를 내주었다. 대신 방학 때도 수업을 듣는 고등학생들이라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주말을 이용해서 촬영하기로 했다.
“이서준이다!”
“그러게요. 와. 진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촬영 소식을 들었는지 선생님들이 구경 온 것 같았다.
스태프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서준과 정보람, 아역 배우들은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레디, 액션!”
익숙하게 친구들과 급식실로 향하던 김서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 나 성진이랑 먹을게.”
“성진이? 전학생?”
“걔 별로 말이 없던데…….”
“하긴 오늘 전학 와서 같이 밥 먹을 애도 없겠다.”
김서연의 말에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과 헤어진 김서연이 유성진을 데리고 급식실로 향했다. 자신을 따라 어색한 모습으로 급식을 받는 유성진에 김서연이 재잘재잘 입을 열었다.
“급식은 처음이지? 미국 학교 급식은 어때? 진짜로 피자가 나와? 햄버거나.”
“…….”
“우리 학교도 수요일마다 맛있는 게 나오기는 하는데 다른 날은 별로야.”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은 김서연이 웃으며 반찬 하나를 가리켰다. 유성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래도 이건 맛있으니까 먹어봐.”
김서연이 가리키는 제육볶음에 잠시 말없이 바라만 보던 유성진이 젓가락을 들었다.
미국에서 왔다길래 젓가락질을 못 할 줄 알았는데 11자로 잡고 있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손가락도 예쁘네.’
어쩐지 눈이 저절로 가는 손이었다. 자신의 손을 슬쩍 본 김서연이 막 제육볶음을 입에 넣는 유성진에 숨을 죽였다. 오전 내내 신경이 쓰여 계속 봐서 그런가. 무표정한 유성진의 얼굴을 조금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이지만 밝아지는 유성진의 얼굴에 김서연이 씨익 웃었다.
“컷, 오케이!”
* * *
다음 촬영은 학교 운동장이었다. 급식실에서 야외로 촬영 장비를 옮겨 설치하는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서준과 정보람은 대본을 읽으며 각자 맡은 배역의 감정선을 따라갔다. 급식실에서의 감정을 빠르게 정리하고 지금 장면에 어울리는 감정을 이끌어냈다.
지금 찍는 장면은 어색했던 김서연과 유성진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유성진이 반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낼 때였다.
“서준아. 보람아. 준비됐어?”
촬영 준비가 끝나가는 걸 확인한 공희찬 피디가 물었다.
“네.”
“저두요.”
공희찬 피디의 말에 서준과 정보람이 대답했다. 두 배우의 말에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디, 액션!”
유성진이 혼자 앉아 있는 김서연에게로 다가갔다.
“이거 먹어.”
“오! 고마워.”
유성진이 건네준 음료수에 김서연이 환하게 웃었다. 김서연이 제일 좋아하는 복숭아 음료수였다. 김서연과 유성진이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라 운동장을 점령한 학생들과 여기저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소화도 할 겸 산책하고 있던 2학년 1반 아이들이 앉아 있는 유성진과 김서연을 발견했다.
“올. 김서연. 유성진.”
“설마 둘이 사귀는 거야?”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유성진과 김서연을 보며 놀리는 반 친구들의 모습에 김서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부러워?”
“에이. 아니구나.”
그런 김서연의 모습에 김이 샌 친구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꼭 남자애들이랑 있으면 저렇게 물어보거든.”
“너도 그렇고?”
“당연하지! 연애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김서연의 말에 유성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김서연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로를 보며 웃는 소년소녀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이에 아직 희미한 분홍빛 분위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두 배우의 연기에 스태프들이 감탄했다.
“급식실에선 그렇게 어색했는데, 금방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네.”
“그러게요. 이렇게 다 쳐다보는데도 연기가 가능하다니…….”
“그러니까 배우죠.”
오디오에 섞이지 않게 스태프들은 조용히 감상을 내뱉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컷, 오케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공희찬 피디가 외쳤다.
* * *
“다음 촬영은 도서실이래.”
정보람의 말에 물을 마시던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들고 도서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던 정보람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병의 뚜껑을 잠근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힘들어?”
“음. 응. 조금.”
아니라고 할까, 고민하던 정보람은 솔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촬영은 서준이 더 경험이 많아서 조언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보람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촬영 수는 다른 것보다 짧은데 같은 장소에서 감정변화가 많아서 말이야.”
“그건 그래. 학교가 배경이라 한 번 찍을 때 많이 찍는 편이긴 하지.”
게다가 과거 부분은 김서연의 회상으로 이어나가다 보니 다른 촬영보다 짧게짧게 끊어서 가기도 했다.
“데면데면했다가 엄청 좋아했다가 조금 좋아했다가. 조절하기가 좀 힘드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는 정보람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응. 정말. NG도 안 나오고 나랑 합도 잘 맞잖아.”
서준의 말에 정보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하의 이서준이 그렇게 말하니까 안심되네.”
휴, 과장하듯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정보람의 모습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레디, 액션!”
기말고사를 앞둔 어느 날.
미국에서의 수업과 학교 수업이 많이 달라서 유성진은 반장인 김서연과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유성진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미안.”
대학은 수시로 갈 예정이라는 김서연의 말에 자신을 도와주다 내신 성적이 떨어질까, 유성진은 걱정됐다.
“괜찮아.”
축 처진 모습이 귀엽다면 싫어할까.
작게 웃은 김서연이 말을 이었다.
“시험 범위는 여기까지인데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물어봐.”
김서연이 교과서를 펼쳐 유성진에게 시험 범위를 알려주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지한 유성진의 얼굴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참기가 힘들었다.
“이건 내 노트. 나도 영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볼게.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나 수학은 못 하니까 물어봐도 어쩔 수 없어.”
짐짓 비장하게 말하는 김서연의 모습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성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수학은 잘하니까 괜찮아.”
“그래? 그럼 나 좀 가르쳐 주라.”
선생님께 부탁해서 빌린 도서실.
김서연과 유성진이 마주 보고 앉아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샤프심과 종이가 닿는 소리가 들리고 창을 통해 따스한 햇볕이 비쳤다.
유성진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공부하고 있는 김서연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다 고개를 숙였다.
김서연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어려운 듯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유성진을 웃으며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서로가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시선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아.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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