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86화
다들 서준이 설명하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서준이 자라, 박도훈이 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현성’이라는 캐릭터가 다리가 되어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근데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야?”
윤혜인이 놀란 기색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모창이나 성대모사 같은 거예요.”
서준의 말에 모두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창이나 성대모사도 어떤 인물의 노래와 유행어를 분석하고 연습해서 따라 하잖아요. 발성, 목소리, 노래할 때의 타이밍, 강약조절 같은 거 말이에요. 그리고 엄청 잘하는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들으면 모르는 정도고요.”
서준의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 시작한 예능 중에 그런 예능이 있었다. 모창을 하는 일반인들과 가수를 숨겨두고 가수를 찾는 예능이었다.
“근데 목소리가 달랐잖아?”
“목소리 빼곤 다 같았죠. 아무래도 제가 연기해야 하는 건 도훈이 형의 이현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이현성의 어릴 때니까요.”
“이현성만 되는 거야?”
“아뇨. 최유원도 되는데 아직 연구 중이라서…… 이현성도 이 대사 외에는 아직 연습을 더 해야 해요.”
볼을 긁적이며 웃는 서준의 모습에 모두 감탄했다.
겨우 6부작에 입봉 작가와 입봉 피디, 게다가 분량이 적은 아역이었지만 이서준은 아역 하나도 소홀히 연기하지 않았다. 이래서 그토록 멋진 연기를 보여주나 싶었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서준의 연기가 끝나고 다시 리딩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미완성으로 내뱉는 서준의 연기는 아까보다는 임팩트가 덜했지만, 그 속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현성의 느낌에 다들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본 리딩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공희찬 피디의 말에 회의실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어깨가 다 뻐근해.”
“리딩 때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다들 긴장을 풀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서준이 이 정도로 본격적으로 연기하니 리딩이 재개된 후부터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메라가 꺼지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대본을 정리하고 있던 서준에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보람이 물었다.
“그 아역 연기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줄 수 있어?”
정보람의 물음에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서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방법은 시간이 좀 걸려서 다른 방법을 가르쳐 줄게.”
서준이 하는 방법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분위기와 연기를 그대로 담아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방법으로 웬만한 배우들로서는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었다.
‘보람이가 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잘될 거라는 확신도 없지.’
연기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냉정한 서준은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다른 방법?”
“성인역하고 아역의 공통된 버릇을 만드는 거야. 걸음을 걸을 때 오른쪽 발부터 걷는다거나 웃을 때 입을 가리고 웃는다거나. 아니면 박수를 치면서 웃을 수도 있지. 좋아하는 반찬을 먼저 집어 먹는 것도 가능하고. 물론 모든 바탕은 배역인 ‘김서연’이 할 것 같은 행동이어야만 해.”
정보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소소한 게 티가 날까?”
“그러니까 시청자들의 눈에 들어오면서도 자연스러운 버릇을 생각해야지.”
“……어렵겠네.”
정보람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같은 버릇이라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니까. 머리를 매만지는 버릇이 있다고 해도 빠르게 쓸어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세 번 천천히 쓸어넘기는 사람도 있으니까.”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세세하다. 이 정도로 관찰해야 조금 전과 같은 ‘완벽한 이현성 주니어’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윤혜인이 정보람을 바라보았다.
“해볼까?”
“네?”
“저쪽에서 저렇게 대단한 연기를 펼칠 생각인데 이대로 묻힐 수는 없잖아. 뭐든 해봐야지. 안 그래?”
윤혜인의 말에 정보람이 환하게 웃었다.
“네!”
“그럼 바로 캐릭터 분석해 보자. 유 작가님! 나중에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히 괜찮죠!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윤혜인의 말에 유청아 작가가 환하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이 작품을 위해서 노력한다는데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회의실을 나와 1층 로비로 가던 중 박도훈이 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밥 먹고 갈래?”
“네. 좋아요.”
강태영이 부럽다는 눈으로 박도훈과 서준을 번갈아 보았다. 그 짠한 눈빛에 박도훈이 웃고 말았다.
“태영 씨도 같이 가실래요?”
“감사합니다! 아,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태영이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네! 형!”
눈을 반짝이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강태영의 모습에 서준과 박도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MBS 특별기획 ‘봄이 돌아왔다’, 대본 리딩!]
[MBS 대본 리딩 인터뷰 모음!]
[‘봄이 돌아왔다’ 주연 배우들! 강태영은 어디?]
[MBS 대본 리딩 영상, 메이킹 필름으로 방송 예정!]
-대본 리딩했구나!
-근데 강태영은 어디 감?
=22 안 왔나?
=ㄴㄴ 너무 일찍 왔대. 기자들보다 일찍 와서 인터뷰를 못 함ㅋㅋ
-강태영 이해됨ㅋㅋ
=왜?
=강태영 새싹임. 찐 새싹ㅎㅎ
=초딩 때부터 새싹. 새싹부터 카페에 게시글도 있음.
-ㅋㅋㅋ성덕이냐ㅋㅋㅋ
=그러게.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설마 너무 기대돼서 일찍 간 거야?
=이해된다. 나 같으면 하루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듯.
=222 텐트 치고 기다림ㅎ
-메이킹 필름! 재미있겠다!
=서준이 대본 리딩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내의원 메이킹 필름은 엄청 귀여웠는데ㅎㅎ 또 보러 가야겠다.
-이번에도 귀여우려나.
=이젠 경력이 있어서 멋있을 듯.
=22 몇 명 빼고는 서준이가 제일 경력 많은 거 아님?
=333 강태영보다도 오래 연기했으니까.
* * *
‘봄이 돌아왔다’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실내 세트장에 촬영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막 세트장 안으로 들어선 강태영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활짝 펴진 얼굴로 바로 서준에게 달려갔다.
“안녕. 서준아!”
“안녕하세요. 형.”
서준이 웃으며 강태영을 반겼다.
“오늘 태영이 형, 촬영 없지 않아요?”
“그래도 공 피디님 첫 촬영이니까 와봐야지. 공 피디님, 엄청 긴장하시던 것 같더라. 그래서 우황청심환 드리고 왔어. 서준인 어때? 연습은 잘돼 가?”
“형이 연습하는 모습을 봐서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촬영할 때의 연기가 가장 중요하니까 오늘부터 촬영 내내 보러오려고요.”
“그래?”
이제 촬영하는 날마다 서준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강태영이 활짝 웃었다. 그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서준이 웃고 말았다.
“그럼 촬영 끝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갈래?”
“네. 좋아요.”
“둘 다 일찍 왔네?”
익숙한 목소리에 서준과 강태영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촬영할 박도훈이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도훈이 형.”
“여기 앉으세요.”
박도훈이 웃으며 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서준이가 촬영 내내 와서 우리 연기 본대요.”
“그래? 엄청 긴장되는데?”
박도훈의 엄살에 서준과 강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박도훈의 시야에 이야기를 나누는 윤혜인과 정보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려운가 보네.”
“그렇겠죠. 버릇을 신경 쓰면 감정 연기가 안 될 테고 감정연기에 빠지면 버릇 설정을 알맞게 연기하기 힘들 테니까요.”
“도훈이 형이랑 나는 서준이가 알아서 해줘서 편한데…… 좀 아쉽네.”
박도훈도 강태영의 말에 동의했다. 아역과 함께 만들어가는 배역이라니, 배우로서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연기였다.
“근데 어쩔 수 없지.”
서준이 ‘이현성’, ‘최유원’을 섞어서 연기하는데 박도훈과 강태영이 어중간하게 끼어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될 테니까 말이다.
“다음에 아역이 있는 역할을 할 때 도전해 봐야겠어.”
“그러게요. 힘들긴 하겠지만 좋은 연기가 나올 것 같아요.”
박도훈과 강태영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노력하는 사람이 좋다.
그게 연기자라면 더욱 좋은 서준이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 최현우의 말에 촬영장이 다시금 바빠지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봄이 돌아왔다’의 현대 부분의 촬영이 이어지고,
드디어 서준의 첫 촬영 날이 되었다.
서준의 첫 번째 촬영장은 버스정류장이었는데 일부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을 골랐다. 버스정류장에 카메라를 설치하기 위해 스태프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멀리서 버스 차량이 한 대 왔다.
버스 번호를 확인한 조연출 김단비가 외쳤다.
“버스 왔습니다!”
“조명 설치하겠습니다!”
“카메라!”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춰 서고 버스 안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이 올라탔다. 빠르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의 눈도 바빠졌다.
“옥에 티는 없어야 합니다. 벌써 플러스랑 계약까지 했다고 난리라서 말입니다.”
“찍혀도 편집할 때 지울 수 있지 않나요?”
유청아 작가의 물음에 공희찬 피디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안 보이는 건 편집 때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나중에 모니터하면서도 계속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유청아 작가가 눈을 번뜩이며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인생 첫 작품이며 플러스+를 통해 해외로 나갈 작품이었다. 평생 자신의 경력에 남을 드라마를 티 없이 만들고 싶었다.
“살수차 왔습니다!”
김단비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명 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있던 조연출 최현우에게 물었다.
“쟤 이제 감 좋다, 나쁘다 이야기 안 한다며?”
“네. 크게 한 번, 아니, 세 번쯤 데여서요.”
박규민 피디에게 작품을 빼앗긴 게 한 번, 이서준이 출연한다는 소식이 두 번, 그걸 박규민 피디에게 또 한 번 빼앗길 뻔한 게 세 번.
“아아. 박규민?”
“……어떻게 아셨어요?”
조명감독의 말에 최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안 퍼진 거 아니었나?
“박규민이 맡았던 스릴러 있잖아. 내일. 그쪽에는 아는 사람은 다 알던데? 뭐, 그래도 몇몇 안되긴 하지만. 소문에 민감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와…… 진짜 좁네요. 이쪽은.”
박규민이 지인들에게 말한 게 퍼져 나간 것 같았다.
‘하긴 비상구에서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
“잘됐네. 쟤 잘못은 아닌데,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원망하게 되더라고. 저번에 조명 기계 쓰러졌을 때는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으니까.”
“아, 강태영 배우가 맞을 뻔했죠?”
최현우의 말에 조명 감독이 진저리를 쳤다.
“바로 전 작품에서 대박 난 배우가 차기작 찍다가 다쳤으면 난리 났을걸. 다행히 공 피디가 구해줘서 망정이지. 공 피디 그때 좀 다쳤지?”
“네. 근데 금방 나았습니다.”
“내가 그게 고마워서 유 작가를 소개해 줬는데…….”
조명 감독이 배우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여주인공 역의 윤혜인, 정보람. 남주인공역의 박도훈, 강태영.
“이렇게 대박이 날 줄이야.”
그리고 할리우드 스타 이서준이 그곳에 있었다.
* *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 최현우의 목소리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움직였다.
단역 배우들이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서준은 우산을 다잡았다. 버스에 앉아 있던 윤혜인은 ‘김서연’의 감정에 몰입했다.
“레디,”
공희찬 피디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난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첫 촬영 날 때보다 더욱 긴장한 것 같았다.
유청아 작가도, 스태프들도 숨을 죽이고 촬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촬영 때마다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게 일이라 무뎌질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레디, 소리에 살수차가 작동을 시작했다. 하늘에서 인공 비가 내렸다. 버스와 버스정류장이 비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액션!”
비가 내리는 날.
김서연은 버스를 타고 있었다.
주말까지 출근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사를 욕했을 테지만 이젠 화를 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런 무기력한 날에 비까지 내리니 더욱 기분이 우울해졌다.
인도 쪽 창가 석에 앉은 김서연은 생기 하나 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산을 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무채색으로 보였다.
어둠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해졌다.
빗소리마저 지워지는,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였다.
김서연이 탄 버스가 버스정류장에 섰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와 여자가 보였다. 버스 문이 열리고 우산을 접은 여자만 버스에 올랐다. 아직 어려 보이는 것이 학생인 것 같았다.
여학생이 창밖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버스 밖에서 우산을 쓴 남학생이 빈자리에 앉기 위해 버스 뒤쪽으로 걸어가는 여학생을 따라 움직였다. 여학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김서연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여학생이 김서연의 앞자리에 앉았다. 뭐가 그리 행복하고 재미있는지 두 학생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헤어지는 게 아쉬운 듯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 반동에 흔들리는 남학생의 샛노란 우산이 김서연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순간, 무채색의 세상에 우산 끝부터 노란빛이 번져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옆으로 들어오는 비를 막기 위해 남학생이 우산을 기울였다. 기울어진 우산 때문에 김서연의 시야에서 남학생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다.
무엇 때문일까.
김서연은 우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학생의 모습을 가렸던 노란색 우산이 천천히 김서연 쪽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우산을 중심으로 무채색의 세상에 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말이라 평상복이었던 남학생의 옷이 교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서연은 어디선가 본 교복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천천히 우산이 들렸다.
노란빛 우산을 잡고 있는 팔이 보였다.
먹먹하던 귀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방을 메고 있는 어깨가 보였다.
버스유리창에 부딪힌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김서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뺐다.
노란 우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미끈한 턱이.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이.
상기된 뺨이.
오뚝한 코가.
그리고 햇살보다 따스한 눈동자가 보였다.
노란 우산 아래.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년이 방금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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