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85화
서준은 요즘 박도훈과 강태영의 작품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극 같은 장르는 대사 특성상 어조부터 다르다 보니 보지 않았고 ‘봄이 돌아왔다’와 같은 현대물 위주로 찾아보고 있었다.
박도훈은 이스케이프 촬영 후 새 영화에 들어갔다. 그 영화는 이스케이프가 개봉한 후에 흐름을 타고 개봉, 흥행했다. 박도훈은 그 이후 거의 1년의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고 강태영은 바로 몇 달 전 드라마 하나를 끝냈다.
지금 현재의 연기력과 가장 비슷할 박도훈의 영화와 강태영의 드라마를 많이 돌려보았지만 서준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캐릭터니까.’
박도훈이 연기하는 남주A 이현성.
강태영이 연기하는 남주B 최유원.
서준이 원하는 건 두 배우가 연기하는 두 캐릭터였으니까.
그렇다고 두 배우의 예전 작품 감상이 아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여러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마다 배우만의 표현법이 남아 있을 때가 있었다.
다리를 절뚝거린다거나 독특한 발걸음(성격이 급해 발걸음이 빠르다 등)을 지정하지 않는 이상, 걷는 모습 같은 작은 곳에서 배우의 버릇이 묻어나오고는 했다.
‘아니면 슬퍼하는 장면이라거나.’
같은 슬퍼하는 장면에서도 배우마다 표현법이 달랐다.
박도훈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조용히 슬퍼한다.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며 들끓는 가슴만 두드릴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조용한 슬픔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강태영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폭발하듯 울음을 터뜨린다. 갈기갈기 찢긴 울음소리가 시청자들의 귀를 통해 가슴에 박힌다. 귀에 먹먹하게 남아 있는 감정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물론 캐릭터 성격마다 다르긴 하지만.’
작품 속 캐릭터가 붕괴하지 않게, 연기하는 캐릭터의 성격에 따라 표현 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상세한 지문이 아니라면 대체로 저랬다.
그렇게 이런저런 작품을 관찰하는 동안 서준은 박도훈과 강태영의 연기 스타일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박도훈과 강태영이 연기하는 ‘이현성’과 ‘최유원’을 본 적이 없으니 그 느낌과 분위기를 담아내 연기하는 게 어려웠다.
서준이 두 배우를 분석해서 떠올린 ‘박도훈이 연기하는 이현성’과 ‘강태영이 연기하는 김유원’은 그저 서준의 상상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자리도 바꿔달라고 했지.’
보통 주요배역이 피디와 작가의 근처에 앉은 데다가 여주, 남주 그리고 아역까지 있는 상황이니 구분을 위해서 여주인공 따로 남주인공 따로 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서준의 예상대로 원래 자리는 강태영의 옆자리였다고 들었다.
‘저기 앉으면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어.’
대본 리딩이라 몸의 움직임도 못 보는데 표정까지 보지 못하면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다.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잘 보이는 박도훈과 강태영의 얼굴에 서준이 히죽 웃었다.
역시 바꾸길 잘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박도훈의 차례가 시작되었다.
역시, 서준의 생각대로 박도훈이 연기하는 이현성은 상상과 달랐다.
공백기 1년 동안 실력이 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연기는 재미있다. 잘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더 나은 실력으로 짜잔, 등장한다.
서준의 빛나는 눈동자가 박도훈의 움직임을 훑었다.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이현성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미세한 움직임.
꿈틀거리는 눈썹.
가늘어지는 눈동자.
움찔거리는 입꼬리.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박도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사를 치는 단어 사이사이.
마침표가 찍히고 다음 대사를 말하는 틈.
숨을 내쉬는 타이밍.
박도훈이 연기하는 이현성의 어투.
자신의 숨소리마저 죽인 채, 서준은 박도훈의 연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
대사를 마무리하고 호흡을 고르고 있던 박도훈이 속으로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서준의 뜨거운 시선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날카롭고 제 연기를 하나하나 해체하던 눈빛에 소매에 가려진 팔에 소름이 잔뜩 돋았다.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이 그랬을까. 그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후우.”
박도훈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자신의 분위기를 담아낼 거라고 했던 서준의 말을 박도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준이라면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찰당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뜨거운 눈빛이네.’
말투나 표정 연기 정도는 예상했지만 이 상태로 봐서는 자신이 내뱉는 숨소리마저 연기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고 그래서 열심히 연습해 왔는데…….’
서준이 자신의 연기를 담아내는 모습이 보고 싶으면서도 어쩐지 서준이 자신의 연기에 힘들어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순순히 흉내 내게 할 수는 없지. 더 열심히 해야겠네.’
이기고 지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게 연기였지만 그래서 더욱더 지고 싶지 않은 박도훈이었다.
* * *
‘좋겠다.’
강태영의 자리는 서준의 맞은편 옆, 그리고 박도훈의 옆이라 서준의 시선이 박도훈을 바라보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박도훈의 연기를 서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봐주는 게 부러웠다.
팬으로서도, 연기자로서도 이서준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강태영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전화번호를 교환할 정도로 친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몇 년이나 알고 지낸 박도훈에게는 상대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축 처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열심히 해야지!’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강태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본을 노려보았다.
설마, 자신이 부러워하는 서준의 시선에 박도훈의 팔에 소름이 돋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태영이 이상함을 알아차린 건 첫 대사를 내뱉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온몸의 신경이 순간 곤두선 느낌이었다. 잠시 움찔한 강태영은 대사를 이어나갔다.
“이번 광고 촬영을 맡은 최유원입니다.”
빤히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도 강태영은 대본을 보며 열심히 연기를 이어나갔다. 누가 쳐다보든 지금 중요한 건 연기였다.
같이 연기하는 서준이 실망하지 않도록 대본을 받은 날부터 열심히 연습해 온 연기였다. 속으로 이를 악문, 그러나 밖으로는 철저히 ‘최유원’을 연기하는 강태영이었다.
* * *
‘태영이 형도 잘해.’
박도훈의 연기를 보면서 하나하나 살펴본 서준은 강태영이 연기를 할 때도 하나도 빠짐없이 관찰했다.
친화력 좋은 최유원은 표정도, 감정도 풍부하다. 최대한 절제되어 있던 이현성과는 달리, 실제로도 감정이 풍부한 강태영과 만나니 찰떡같았다.
‘그러면서도 철저히 최유원이네.’
서준의 분석대로 강태영의 연기에선 강태영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감정 이외의 부분에선 박도훈과 서준에 비해 연기 경력이 짧다 보니 묻어나오는 ‘강태영의 버릇’이 꽤 있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서준은 이번에도 강태영이 연기하는 최유원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둥그렇게 웃고 있는 눈.
미소를 짓는 입술.
부드러운 말투.
대사 사이사이의 간격.
그렇게 관찰하니 서준은 저절로 강태영의 표정을 따라 하게 되었다.
조금 전에는 박도훈을, 이번에는 강태영을 그대로 담아내는 서준의 표정에 카메라감독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 * *
강태영의 차례가 되었다.
또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강태영은 비슷한 시선을 떠올렸다.
‘숙제 검사하는 연기 쌤 시선 같네.’
발걸음의 움직임. 손가락 끝, 감정 표현, 숨을 쉬는 타이밍, 시선 처리, 표정까지 하나하나 뜯어보고 분석하는 그런 시선이었다.
마침 최유원이 주위를 둘러보는 장면이었다. 이미 다 외운 대본에서 눈을 뗀 강태영이 최유원인 양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반짝이는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준의 모습에 잠시 좋아하던 강태영은 곧 그 눈빛 안에 들어 있는 날카로움을 알아차렸다. 그 ‘연기 선생님 같은 시선’이 어떤 것인지 강태영은 깨달았다.
서준이었다.
배우 이서준이 자신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눈빛에 강태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까지 지켜보는 서준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어째서 저 눈빛을 ‘연기 선생님’ 같다고 생각했을까.
저건 강태영의 연기를 잡아먹으려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손에 땀이 배어 나오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한 번 인식하니 계속 신경이 쏠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신경이 쓰여 하던 연기를 멈출 터였지만 강태영은 달랐다.
왠지 더 신이 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강태영은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이서준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이 아니라, 함께 연기하고 싶은 배우로서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배우 강태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
“그럼 10분만 쉬겠습니다!”
공희찬 피디의 말에 다들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말을 많이 한 배우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병과 음료수병을 따서 마셨다. 몇몇은 화장실에 가고 몇몇은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향했다.
서준은 박도훈과 강태영의 연기에서 뽑아낸 것들을 대본에 메모했고 박도훈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을 체크했다.
성공적으로 리딩을 끝낸 강태영은 실실 웃으며 다음 파트를 읽었다.
카메라감독이 공희찬 피디를 불렀다. 녹화된 장면을 몇 번 돌려보던 공희찬 피디가 유청아 작가를 불렀다. 촬영본을 본 유청아 피디가 감탄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공희찬 피디가 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촬영한 거 보니까 도훈 씨랑 태영 씨 연기 따라 하는 것 같던데…… 맞아?”
공희찬 피디의 질문에 근처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태영이 고개를 들어 서준을 보았다.
‘내 연기를 따라 했다고?’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음. 그거 때문이지? 성인역을 그대로 연기하겠다는 거 말이야.”
유청아 작가의 물음에 서준이 입을 열었다.
“네. 도훈이 형이랑 태영이 형의 예전 작품을 봤는데 캐릭터가 달라서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대본 리딩하면서 관찰하는 중이었어요. 음. 저도 모르게 얼굴에 나타났나 봐요.”
집중하고 관찰하느라 몰랐다.
쑥스러운 듯 웃는 서준에 모두 눈을 깜빡였다.
“관찰? 성인역을 그대로 연기하겠다는 건 무슨 말이야?”
윤혜인의 말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도훈이 형이랑 태영이 형의 연기를 제가 그대로 연기한다는 거예요. 아역 배우와 성인역 배우가 다르니까 괴리감이 있잖아요. 그 차이를 연기로 최소화하고 싶어서요. 성인역의 분위기와 연기를 그대로 담아내는 거죠.”
“……그게 가능해?”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도훈이 웃으며 서준에게 물었다.
“어때, 서준아. 조금만 보여줄 수 있어?”
“태영이 형은 아직 좀 분석할 게 남았는데…… 도훈이 형은 어느 정도 가능해요.”
좀 더 많이 보고 분석하고 연습해야 해서 오늘 대본 리딩도 완성도가 낮은 상태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부분은 완벽하게 할 수 있어요.”
서준이 가리킨 건, 서준의 첫 대사였다.
아직 과거 부분이 아니라서 차례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첫 미팅 때부터 서준의 연기를 기대하고 있던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가 눈을 빛냈다. 방금 설명을 들은 다른 배우들도 다르지 않았다.
뜻밖의 상황에 잠깐 멈췄던 카메라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왠지 놓치면 안 되는 장면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지금 한번 해볼래?”
“네.”
공희찬 피디의 말에 서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회의실.
앉아 있는 서준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어디선가 액션 소리가 들린 것 같이, 서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유성진입니다. 미국에서 왔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와 굳은 표정.
들어본 것 같은 말투.
대사가 다른데도 누군가가 저절로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박도훈에게로 향했다. 박도훈도 생각보다 닮은 서준의 연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점은 겨우 목소리뿐.
‘그 말은…… 목소리만 바꾼다면…….’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박도훈과 이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