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81화
“조연 섭외는 다 됐어요.”
조연출 김단비의 보고에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비의 시선이 공희찬 피디의 손 쪽으로 향했다. 딱딱한 글씨로 적혀 있는 종이.
“어? 이서준 배우 계약서 왔어요?”
“응. 방금 왔어.”
“이제 진짜 확정이네요! 그러고 보니 4부작에서 6부작으로 연장됐다고 알려드렸거든요. 다들 좋아하시던데 의아해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렇겠지. 입봉 피디 작품이 갑자기 늘어났으니까.”
조연의 대부분이 이서준을 섭외하기 전 섭외한 조연 배우들이었다. 모두 4부작에 입봉 피디라는 말에도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고심해서 섭외한 터라 공희찬 피디는 그 배우 그대로 가기로 했다.
“이제 남은 배역이 뭐가 있지?”
“여주하고 여주 아역도 정해졌으니까. 남주A, 남주B만 남았어요.”
공희찬 피디가 의아한 듯 김단비를 바라보았다.
“……남주A 아직 승낙한 사람 없어?”
“김태인 배우한테 넣어봤는데…… 안 한다고 하더라구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고요.”
4부작의 주인공이었던 남주A.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4부작 드라마라 출연할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뭐, 스케줄이 있다고는 하는데…… 급이 안 맞는다는 거겠죠.”
김단비의 말에 공희찬 피디는 좋아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주B가 생겨서 어떻게 설명하나 싶었는데…… 설명할 필요도 없었네. 차라리 잘됐어. 이서준 배우 이미지에 맞는 배우로 바꾸자.”
공희찬 피디는 나이대가 맞는 배우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역이 확실히 정해지니 성인 배우의 이미지는 금방 잡혔다. 공희찬 피디가 남주A, 남주B 1순위부터 적어 내려갔다.
“네! 근데 이제 이서준 배우가 출연하는 걸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펜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던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그러면 승낙할 확률도 높겠지. 자, 이거.”
“넵!”
공희찬 피디가 준 배우 목록을 들고 자리로 달려간 김단비가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조금 이어지다가 누군가 받았다.
“아! 박도훈 배우 소속사죠?”
* * *
“헐! 팀장님!”
배우 박도훈의 소속사.
배우 1팀 직원이 전화를 받고 있는 1팀 팀장을 불렀다. 한창 영화 제작사 캐스팅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1팀 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왜?”
“박도훈 배우한테 섭외 들어왔는데…….”
잔뜩 흥분한 직원의 얼굴에 1팀 팀장이 더욱 얼굴을 구겼다.
지금 받고 있는 영화 제작사의 전화도 박도훈의 캐스팅 건이었다. 그것도 무려 대작의 향이 풀풀 나는 영화의 주연! 그 어떤 조건의 캐스팅이라도 이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이서준 배우가 섭외됐대요!”
……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팀장과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김단비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잠시만요.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팀장이 얼른 전화를 끊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서준 배우 작품이라고?”
“네! MBS에서 드라마 하는데 이서준 섭외했대요.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답니다!”
“MBS면…… 오영철 작가 드라마? 아니, 그건 로코라서 아역 배우가 들어갈 자리가 있나?”
“아, 그거 아닙니다.”
“오영철 작가가 아니라고? 그럼 뭐야?”
“특별 기획이요. 4부작 드라마 있잖아요.”
직원의 말에 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입봉 피디랑 입봉 작가라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하나는 엎어져서 CP가 맡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스릴러였던가?”
“그래도 그 스릴러 작가는 제법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거기에 CP가 연출하기로 해서 이서준이 하기로 한 건가?”
“그러게. 그런 건가?”
그 말에 직원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스릴러가 아니라 로맨스래요. 입봉 작감 거. 그리고 4부작이 6부작으로 늘었대요.”
“그거야 이서준이 나오면 당연히 늘려야지. 6부작밖에 안 늘린 게 신기할 정도니까. 근데 입봉 작감이라…….”
1팀 팀장이 고민에 빠졌다.
대작의 향이 풀풀 나는 영화지만 그건 개봉해 봐야 아는 것이었다. 제작비가 엄청 들어가도 망하는 영화는 있으니까. 하지만 이서준 배우가 출연한다면 일단 화제는 될 거다.
‘게다가 이서준 배우가 찍어서 흥행 안 된 게 없지.’
흥행 100%.
고작 중,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찍은 실기 시험 영상까지 어마어마한 화제로 만들어내는 슈퍼스타였다.
팀장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시놉시스부터 받아. 도훈이한테도 주고. 뭐, 도훈이는 당연히 한다고 할 것 같지만. 근데 이서준 무슨 역이래?”
“어…… 그게…….”
지금까지 의기양양하던 직원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 * *
“아역이라니!”
“우리 서준이가 아역이라니!”
단골이 된 고깃집.
박도훈과 서준이 새로운 작품을 함께 찍는다는 소식에 이지석과 김종호, 박도훈과 이다진, 그리고 서준까지 다섯 배우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지석과 이다진이 놀라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김종호도 같은 마음이었다.
미리 소속사에서 듣고 온 박도훈과 당사자, 서준만 태평한 모습이었다. 물론 박도훈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엄청 놀랐다.
“서준이가 아역하는 거 처음이지 않나?”
김종호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더 끌리긴 했어요. 오버 더 레인보우 찍은 다음부터는 아역 배역 자체가 안 들어왔거든요.”
“하긴. 누가 아카데미 상 받은 배우한테 아역 자리를 내밀겠어.”
이지석의 말에 이다진이 감탄했다.
“그 작가님하고 피디님도 대단하시네요.”
“역시 뭐든 도전해 봐야 하는 법인가 보다. 진짜 섭외될지는 그 두 사람도 몰랐겠지.”
김종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신기하네. 서준이가 누구의 아역을 맡다니. 난 연극부터 해서 아역은 해본 적이 없는데…… 종호 형도 그렇고. 다진이랑 도훈이는 아역 했지?”
이지석의 물음에 이다진과 박도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몇 번밖에 안 해봤는데 도훈이 오빤 엄청 했잖아요.”
“나야 뭐, 어렸을 때부터 했으니까.”
“그렇지. 옛날에는 과거 부분이다 싶으면 거의 도훈이였어.”
김종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독이 돼서 슬럼프도 겪었지만요.”
이젠 농담으로 꺼낼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 박도훈이었다.
“그래. 이겨냈으니 됐지!”
김종호와 이지석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고기가 익고 식사를 하면서도 다섯 배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주제는 이번에 박도훈과 서준이 촬영하는 드라마 ‘봄이 돌아왔다’였다.
“그래서 남주A 분위기도 남주B의 분위기도 완벽하게 따라 할 생각이에요.”
상상도 못 한 서준의 말에 네 배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대로만 되면 그것보다 확실한 아역 연기는 없겠지만……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게. 이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까지 연기하는 거잖아. 완전히 창작하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다.”
이다진과 김종호의 말에 이지석과 박도훈도 동의했다.
서준이 생각해 낸 캐릭터라면 시청자들도 모르는 캐릭터라서 원래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있는 인물을 연기하는 거라면 사소한 버릇 하나에서 다른 사람인 티가 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배우 본연의 이미지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서준이 넌 그것까지 담아낼 생각이지?”
“네. 그래야 시청자분들이 이질감을 안 느낄 테니까요. 외모야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사람마다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이지석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서준이라고 제 뛰어난 외모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배우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고, 서준은 그 누구보다 객관적이었다.
“서준이가 잘생기긴 했지.”
김종호의 말에 세 배우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봤지만 볼 때마다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빛나는 외모였다. 호르몬이 날뛰는 시기에도 잘 자란 동생의 모습에 이다진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맞아요. 목소리도 좋고. 키도 크고.”
“이 얼굴로 아역을 하면 성인역 배우도 웬만큼 멋져야 하겠는데?”
김종호와 이다진, 이지석의 시선이 서준의 맞은편에 앉은 박도훈에게로 향했다. 박도훈이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세 배우의 눈이 날카롭게 서준과 박도훈을 오갔다.
“음…… 도훈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그러게요. 도훈이 오빠도 잘생겼으니까!”
“잘 어울리네.”
세 배우의 합격이 떨어지자 박도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서준과 세 배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남주는 누구라고?”
“강태영 배우요.”
“강태영 배우도 괜찮지 않아?”
강태영.
박도훈과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로 이번 ‘봄이 돌아왔다’의 남주B를 맡은 배우였다.
“도훈이 형. 강태영 배우하고 연기해 보신 적 있어요?”
“나랑 비슷한 나이대긴 한데 만난 적은 없어.”
“난 한 번. 드라마 때 만났지.”
“어땠어요?”
눈을 반짝이는 서준과 박도훈의 모습에 이지석이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좀…… 개같아.”
“……개요?”
서준과 박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 * *
몇 시간 전.
배우 강태영의 집.
강태영의 매니저가 소파에 앉아 시위하고 있는 자신의 배우를 바라보았다. 누구 보라는 듯 캐스팅 섭외도 오지 않은 작품의 시놉시스를 들어 보이고 있었다.
[MBS, 가제 ‘봄’]
익숙한 제목에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또 어디서 구했어?”
“오 팀장님한테 구해달라고 했지!”
“너 진짜 4부작 할 거냐? 너랑 이미지 안 맞다고 섭외도 안 들어왔는데?”
“주연이 안 되면 조연이라도 할 거야. 그러니까 한번 물어봐 줘. 남는 자리 없는지.”
강태영의 말에 매니저가 이마를 짚었다.
“왜 그렇게 그 피디님 작품을 하려고 해?”
“피디님이 조연출일 때 나 도와주셨거든. 엄청 좋은 분이시라서 입봉작에 꼭 나가기로 다짐했어. 이 강태영! 은혜는 꼭 갚습니다!”
환하게 웃는 강태영에 매니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좀 얌전해져야 하지 않겠냐?”
“형. 내가 얌전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날인 거야.”
“그래. 네 멋대로 해라.”
저도 모르게 강태영의 말에 동의해 버린 매니저가 포기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막 전화하려고 했던 소속사였다.
고개를 갸웃한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팀장님!!
비명 같은 환호성이었다.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뜨린 매니저가 다시 전화를 귀에 댔다. 밖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강태영도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조금 전에 MBS에서 전화 왔는데요!
MBS라는 소리에 강태영이 눈을 빛냈다.
‘형! 4부작! 4부작! 공희찬 피디님!’
입을 벙긋거리며 말하는 강태영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쉰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아예 스피커모드로 변경했다.
“그거. 조연이라도 자리 없나 물어봐.”
“카메오 출연도 괜찮아요!”
“……카메오도 괜찮대.”
-아뇨! 아니에요! 주연이에요! MBS에서 하는 공희찬 피디님 작품! 주연으로 강 배우 섭외하고 싶대요!
“그거 이미지가 안 맞다고 하지 않았어?”
-새 캐릭터를 넣었답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서준!
비명 같은 환호성과 함께 직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서도 이름 석 자는 확실하게 들려왔다. 매니저와 강태영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이서준 배우가 출연한답니다!
매니저와 강태영이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입을 쩌억 벌렸다.
“허얼! 대애박!”
강태영의 눈이 반짝였다.
“형! 들었어?! 이서준이래! 나 할리우드 배우 보는 거 처음인데! 선물, 선물 준비할까? 서준이는 뭘 좋아하지? 와! 나도 이서준이랑 촬영해 보는구나! 나 진 나트라 엄청 좋아하는데! 물론 그레이 바이니랑 다른 작품도 엄청 좋아하지만!”
어쩐지 보이면 안 되는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게 보이자, 매니저는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꾸욱 눌렀다.
“……우리가 관둬야 하나?”
분명 이서준 배우를 귀찮게 할 자신의 배우를 떠올린 매니저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속마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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