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80화
1월 말.
MBS 드라마국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규민 피디와 교체된 김진명 CP는 스릴러 ‘내일’의 촬영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교체된 연출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의아한 듯했지만 급하게 진행되는 촬영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국장과 다른 CP들은 6부작으로 늘어난 분량에 기뻐하면서 가장 좋은 편성을 위해 골몰했다.
“일단 월요일은 진명이 거를 넣고 화요일은 희찬이 걸 넣죠.”
“그러면 월요일이 2주 일찍 끝나는데…… 마지막 주에 5화, 6화를 방송할까요?”
그 말에 국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서준이 나오면 한 편으로도 일주일은 내내 화제가 될 텐데 그렇게 하면 화제가 일주일이나 줄어들잖아. 일주일에 한 편씩 방송하는 편이 나아.”
“그럼 월요일에 특별 편성이나 메이킹 필름을 넣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또 입봉할 피디를…….”
그 말에 국장과 CP들이 끄응 앓았다.
“오영철 작가 작품 방송하려고 4월에 입봉 피디 걸 넣었는데 이젠 또 이서준 작품 방송하려고 입봉 피디를 넣는다고? 이건 뭐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그렇다고 메이킹 필름을 2주나 방송할 수는 없어 국장과 CP들이 비어버린 2주의 시간을 채우려고 고민했다.
* * *
그사이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는 긴장한 얼굴로 코코아엔터 3층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커피로 목을 축이던 공희찬 피디가 조금 초췌해 보이는 유청아 작가를 흘깃 보고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 작가님.”
“아니요. 괜찮아요.”
뒤늦게 공희찬 피디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이틀 동안 마음고생을 했던 유청아 작가가 활짝 웃었다.
“공 피디님 잘못도 아니고 이서준 배우도 나오기로 했으니까요! 게다가 6부작!”
미안함이 가득한 공희찬 피디의 모습에 유청아 작가는 일부러 더 활발하게 말했다. 그렇게 보이는 건 쉬웠다. 진짜로 기뻤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앞으로 큰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드라마는 공 피디님뿐만 아니라 제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힘든 일 있으면 같이 해결해야죠!”
“네. 알겠습니다.”
공희찬 피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배우 이서준과 매니저 안다호였다.
드디어 만나는 배우의 모습에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가 눈을 빛냈다. 서준도 드디어 만나는 작가와 감독의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피디님.”
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자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도 꾸벅 인사를 했다. 한눈에 봐도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 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서준과 안다호는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출연 계약서도 작성할 겸 미팅을 하기로 했다.
“여기, 출연 계약서입니다.”
공희찬 피디가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안다호에게 건네주었다. 계약서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피는 안다호의 모습에 공희찬 피디는 괜히 침만 삼켰다.
그런 사건이 있어서 MBS에서 최대한 서준에게 좋은 쪽으로 쓴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계약서이니만큼 함부로 사인할 수는 없었다.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던 안다호가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검토하고 내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넵.”
안다호와 공희찬 피디가 무거운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출연 계약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준과 유청아 작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하고 있었다.
“여기 1화, 2화 대본이에요.”
유청아 작가가 가방에서 대본 두 개를 꺼내 서준의 앞에 놓았다. 대본의 등장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벌써 나왔네요.”
“술술 나오더라고요. 나머지 대본도 금방 나올 거예요.”
조금 긴장한 것 같은 유청아 작가의 모습에 서준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유청아 작가가 마음속으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말 편하게 하세요. 작가님.”
“그, 그럴까…… 요?”
서준의 말에도 유청아 작가는 더욱 긴장한 목소리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안다호가 계약서를 챙기자 공희찬 피디도 미팅에 합류했다. 1화, 2화 대본을 읽으며 배우와 작가, 피디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막극에서 4부작으로 바꾸면서 넣은 요소가 있는데 그게 서준이가 나오는 과거 부분이야. 과거 부분을 넣으면서 현재 부분까지 이야기가 풍부해졌어.”
유청아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과거 부분을 추가하면서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그걸 4부작에 넣기엔 분량이 넘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들어냈는데 이렇게 쓰게 됐네.”
“시놉시스 재미있었어요. 대본도 기대되던데요.”
서준의 말에 유청아 작가가 활짝 웃었다.
4부작의 내용은 원래 이랬다.
일에 지친 30대의 여자주인공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린다.
풋풋했던 첫사랑. 그 소년과 비슷한 남자주인공을 만나고 남자주인공의 행동에 그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결국 남자주인공과 이어진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6부작으로 분량을 늘리면서 유청아 작가는 캐릭터를 하나 더 넣었다.
“일명 진짜 남주 찾기!”
유청아 작가가 신이 난 듯 말했다. 서준과 공희찬 피디도 미소를 지었다.
또 다른 남자주인공의 등장이었다. 이 캐릭터의 행동에서도 첫사랑의 소년이 떠올라 여자주인공은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한다.
누가 내 진짜 첫사랑의 소년일까?
“여기선 헷갈리게 연기를 해야 해. 서준이라면 잘할 거야.”
“남주A의 분위기와 남주B의 분위기를 반반씩 섞어서 연기해 주면 되는데…… 어려울까?”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다. 새로운 연기를 하게 돼서 정말로 즐거운 듯 서준이 활짝 웃었다.
4부작으로 갔으면 온전히 남자주인공의 분위기만, 아역에서 성인으로 물 흐르듯 이어지게 연기해야 했는데 6부작으로 늘어나면서 더 재미있는 연기를 하게 되었다.
“시청자들도 착각할 만큼 남주A가 강조되는 부분에선 남주A의 분위기를, 남주 B가 강조되는 부분에선 남주B의 분위기를 내주면 좋겠는데…….”
자신 말하고도 어려운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끝을 흐리는 공희찬 피디와는 달리 서준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서준의 모습에 공희찬 피디도 유청아 작가도 눈을 빛냈다.
역시, 연기파 이서준 배우는 믿음직했다.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캐릭터도 분석해야겠지만 성인역 배우분들의 연기도 관찰해야겠네요.”
“배우?”
캐릭터가 아니라?
서준의 말에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성인역을 연기할 배우분들하고, 제가 분석한 캐릭터 해석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날까? 같은 캐릭터잖아.”
유청아 작가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여러 촬영장을 돌아다니고 배우 오디션의 일을 돕기도 했던 공희찬 피디는 서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네. 생각해 보면 배우 오디션 때도 같은 지정 대사라도 배우마다 강조하는 부분이나 의도한 부분이 조금씩 다르긴 했어.”
“그래요?”
유청아 작가의 물음에 공희찬 피디가 천천히 설명했다.
“네. 하나의 배역을 뽑는 오디션이라도 배우들의 수만큼 캐릭터 분석들이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입니다. 아예 다른 적은 거의 없지만 미세한 부분부터 눈에 띄는 부분까지, 배우마다 캐릭터 분석도 다르거든요. 그런 해석 중에 감독과 작가의 의도와 같은 배우를 선택하고는 하죠.”
놀라는 유청아 작가의 모습에 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캐릭터 해석에 따라서…… 그러니까 만약에 남주A분이 1을 연기한다면 저는 1이 아닌 2를 연기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 두 연기의 차이가 1만큼 생기겠죠. 해석이 많이 달라서 2가 아니라 3, 4…… 아니, 9를 연기한다면 8만큼의 차이가 생길 거예요. 그렇게 되면 드라마 속에서 아역과 성인역의 분위기 차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어요.”
1과 2라면 비슷하긴 하지만 아직 1이라는 차이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성인 배우와 아역 배우의 캐릭터 해석이 완전히 똑같다면, 두 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터였다.
“전 그런 세세한 차이점까지 없애고 싶어요.”
맡은 배역을 최대한 완벽하게 연기하고 싶은 배우가 눈을 빛냈다.
이런 배우는 처음 만나는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서준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안다호야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배우를 보았다.
“작품 속에서는 캐릭터 그 자체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남주A를 맡은 배우가 1을 연기한다면 저도 1을 연기할 생각이에요.”
서준의 말에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이서준 배우라면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완벽을 추구할지는 몰랐다.
공희찬 피디는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듯 깍지를 끼었다. 유청아 작가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배우의 앞에 놓인 자신이 쓴 대본과 서준을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이 배우는 어떤 연기를 펼치려는 걸까.
그 연기에 내 연출이, 내 대본이 모자라지 않을까.
작가와 감독은 눈앞에 앉아 있는 배우가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이제 첫 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피디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희찬 피디와 유청아 작가의 굳은 모습에서 부담감을 읽은 서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현실 부분부터 촬영해 주셨으면 해요. 그래야 제가 성인 연기를 보고 분위기를 연기할 수 있거든요.”
그제야 정신줄을 잡은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현실 부분의 분량이 많아서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촬영할 때 보러와서 익숙해지면 되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서준이 볼을 긁적였다.
“말 편하게 하세요. 피디님.”
그제야 제가 말을 높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공희찬 피디가 당황했다.
“아, 나도 모르게…….”
공희찬 피디의 마음을 유청아 작가도 이해하고 있었다.
‘……말을 편하게 하기엔 너무 대단하잖아!’
나이는 자신들보다 어린데 그 어떤 배우보다 배우 같았다. 이제 아역 배우라고 불리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 대단한 배우가 유청아 작가를 불렀다.
“작가님.”
“네…… 응?”
서준의 부름에 유청아 작가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천천히 익숙해지시겠지, 하고 생각한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직 제목은 안 정해졌어요?”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와 공희찬 피디의 시선도 유청아 작가에게로 향했다. 가제 ‘봄’이라고 부르고 있긴 했지만, 슬슬 제목을 정할 때였다.
모두의 시선에 움찔 몸을 떤 유청아 작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정하긴 했는데…….”
“뭐예요?”
“뭡니까?”
서준과 공희찬 피디의 눈이 빛났다.
“……‘봄이 돌아왔다’예요.”
* * *
완벽하게 준비되어 촬영을 시작한 스릴러 ‘내일’과 달리, 로맨스 ‘봄이 돌아왔다’는 아직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MBS 드라마국 내에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해진 제목을 CP에게 알려준 공희찬 피디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단비가 배우 섭외를, 최현우가 세트장과 촬영장을 맡고 있었지만, 자신도 거들어야 했다.
“그렇게 돼서…… 조명감독님.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박규민의 일은 빼고, 이서준 배우가 6부작에 출연한다는 걸 알려준 공희찬 피디는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휴대폰에서 귀를 뗐다.
-……미친! 이서준이랑 촬영한다고? 아니, 일이 어떻게 그렇게 된 거야?!
분명 얼마 전, 유청아 작가와 공희찬 피디를 연결해 준 게 자신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이거 한우는 내가 사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하. 제가 사야죠. 투쁠로 사겠습니다.”
-나야 지금 쉬고 있어서 당연히 좋지! 당장 갈까?!
유청아 작가를 연결해 준 조명감독을 부르고,
“이서준을 찍는다고? 내가 해도 돼?!”
우직하게 로맨스 한 길만 걸어온 촬영감독이 소식을 듣고 달려오고,
“내가 한다! 미술팀!”
경력 많은 미술감독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이외에도 스태프를 구하는 건 너무 쉬워서, 아니, 오히려 실력 있는 스태프들이 몰려드는 터라 가장 먼저 공희찬팀에 들어왔던 조연출 김단비와 최현우가 공희찬 피디를 붙잡고 엉엉 우는 척을 할 정도였다.
“내보내지 마세요. 선배!”
“저희가 잘할게요!”
“……배우 섭외나 해.”
“넵!”
한바탕 태풍이 지나간 MBS 드라마국은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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