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78화
박규민 피디가 떠난 후, 서준과 다시 연습실로 돌아온 안다호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다 말았던 사인을 다시 하기 위해 펜을 든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호 형, 어디 전화하게요?”
“아, 이번 드라마 CP한테. 아무래도 책임자니까 상황 설명도 들어야겠고. 그쪽에서도 알고 있는 건지 물어봐야지.”
박규민 피디의 개인행동인지, MBS의 의견인지 알아야 다음 대처를 할 수 있었다.
‘십중팔구 개인행동이겠지만 말이야.’
안다호의 생각을 이해한 서준이 물었다.
“CP님 전화번호 알고 있어요?”
“서준이가 찍을 드라마 관계자 전화번호는 알아둬야지.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방송국 관계자 전화번호는 거의 다 있어. 워낙 서준이가 출연해 줬으면 한다고 연락이 여기저기서 오거든.”
그 바람에 알고 싶지 않아도 연락처가 매일같이 갱신되고는 했다.
‘이런 대단한 배우인데…….’
이런 대단한 배우를 낮잡아보는 듯했던 박규민 피디의 태도를 떠올린 안다호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전화하고 올 테니까 사인하고 있어.”
왠지 미소가 새까만 것 같다면 착각일까. 색다른 안다호의 모습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CP와 전화통화를 끝낸 안다호가 돌아왔다.
사인한 포토 카드를 상자에 넣고 새 포토 카드 뭉치를 꺼내던 서준이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다호 형. 어떻게 됐어요?”
“CP는 모르는 것 같던데…….”
한껏 당황한 CP의 목소리를 떠올린 안다호가 말했다. 진심으로 깜짝 놀란 듯 기겁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MBS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MBS에서 소속된 피디를 관리하지 못한 것이니까 말이다.
“근데 CP 옆에 국장님이 있던 모양이더라고.”
오,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일이 커질 것 같긴 하지만…… 자기 욕심에 내 배우를 끼워 넣는 건 안 되지.”
이 정도의 액션을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오래오래 연기 활동을 할 서준을 낮잡아 볼 사람들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화내야 할 때 제대로 화내야 호구로 보지 않는 법이었다.
“시작부터 이렇게 엉망진창인 건 처음이네요.”
서준이 한숨을 내쉬자 안다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네가 최대한 좋은 사람들하고 촬영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일이 터질 줄은 몰랐어.”
작품이 많은 만큼 피디도 작가도 많았다. 그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박규민같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자 노력했고 결과를 보여줬던 안다호와 2팀 직원들이었지만 이번엔 운이 안 좋았다.
“누구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다른 작품을 하던 피디가 갑자기 끼어들 줄 그 누가 알았겠나. 서준의 위로에도 안다호의 마음은 무거웠다. 깊은 한숨을 내쉰 안다호의 눈이 번뜩였다.
“MBS에서 어떻게 할지 지켜봐야지.”
다호 형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매니저의 화난 모습에 서준은 신기하다는 듯 안다호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자신 때문에 화를 내는 거라 서준은 작게 웃고 말았다.
다시 펜을 든 서준이 펜 끝으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이거 촬영할 수 있을까요?”
서준은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러면 촬영도 엉망일 것 같았다. 입봉 피디와 입봉 작가인 만큼 어느 정도 부족함은 감수하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엉망진창이 될 줄은 몰랐다.
“당연히 할 수 있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서준이 안다호의 목소리에 안다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매니저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서준이 넌 이거 찍고 싶잖아. 그럼 그걸 이뤄주는 게 소속사와 매니저의 일이야. 그것도 완벽하게 세팅해서 말이지.”
믿을 수밖에 없는 매니저의 모습에 배우도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일단 저쪽에서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볼까.”
후후후.
정 안 되면 유청아 작가를 데리고 다른 방송국에 갈, MBS에서 알았다면 기겁했을 생각을 하는 안다호가 악당처럼 웃었다. 그런 안다호의 모습에 서준이 짝짝 박수를 보냈다.
내 매니저 멋있다!
* * *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서준이 안 한다는 거야!”
국장실 한쪽에 있던 CP도 얼굴을 굳히고 서 있었다. 국장의 호통에 박규민 피디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24부작으로 늘리면 방송국에 좋을 것 같아서…….”
박규민 피디의 말이 이어졌다. 잠자코 듣고 있던 국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좋지. 방송국에.”
국장의 말에 박규민 피디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국장의 말에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성공했으면 말이야!”
국장의 목소리가 국장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몰라? 반역도 성공해야 혁명이지, 실패하면 역모라는 거!”
국장이 책상을 두어 번 쾅쾅 내려쳤다.
“다른 배우라면 어차피 없는 셈 치면 돼!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그저 4월 한 달을 때우기 위한 기획이었으니까! 다른 배우를 구하면 돼! 근데 이서준이 나온다잖아!”
몰랐으면 모른다.
바로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이서준의 마음에 든 작품을 손에 쥐고 있었고 황금 거위의 발끝만이라도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아예 황금 거위도 못 보게 됐다. 아니, 그 정도면 다행이지, 밉보여서 평생 MBS 출연을 안 할 수도 있었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닐 테지만…….’
국장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걸 위에 알리려니 속이 쓰려 왔다. 바로 조금 전에 이서준의 출연을 알렸는데 바로 뒤집힐 줄이야.
다시 열이 뻗친 국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박규민 피디를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박규민 피디가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말도 없이 코코아엔터로 가! 그쪽에서 얼마나 우리 드라마국을 엉망으로 보겠어!”
세상에.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피디가 그것도 입봉 피디가, 얼마나 코코아엔터를, 이서준을 우습게 봤으면 회사로 쳐들어가 24부작으로 늘려주니 마니 하며 피디를 바꾸라고 했을까.
‘……물론 성공했으면 복덩이가 따로 없는 일이었을 테지만.’
돌아온 건 코코아엔터 팀장의 전화였다.
다른 소속사의 팀장이라면 국장은 신경도 안 썼을 테지만 안다호 팀장은 이서준의 첫 매니저이며 지금까지 어떤 불협화음도 없이 서포터 하고 있는 이서준의 최측근이었다.
“넌 네 거나 잘 찍어! 한 번만 더 이서준의 ‘이’ 자만 꺼내 봐……!”
“……죄송합니다.”
“나가 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박규민 피디가 나가고 국장이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책이 아닌데도 공희찬 피디는 어깨를 움츠리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공희찬 피디를 바라보던 국장이 입을 열었다.
“공희찬!”
“네.”
“진명이랑 가서 사과하고 와.”
김진명.
4부작 프로젝트의 CP며 안다호 매니저의 전화를 받았으며 국장실 한쪽에서 이마를 짚으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남자였다.
“출연은 어쩔 수 없으니까 최대한 우리한테 감정 안 갖게. 박규민 사과받고 싶다고 하면 바로 박규민 부르고.”
“네. 알겠습니다.”
그때 공희찬 피디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국장과 CP가 몸을 움찔 떨었다.
“……뭔데?”
“코코아엔터야?”
국장과 CP의 말에 공희찬 피디가 휴대폰 화면을 봤다.
>김단비 : 이번엔 확실히!
>최현우 : 녹음했습니다!
>김단비 : (비상구 녹음 파일)
>최현우 : 화이팅!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들어 국장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비장해 보이는 공희찬 피디의 표정에 국장과 CP가 안절부절못했다.
“왜? 코코아엔터에서 아예 오지 말래?”
“사과도 안 받아준대?”
“……박규민 피디, 징계 어떻게 됩니까.”
뜻밖의 물음에 국장과 CP가 눈을 끔벅거렸다.
배우와의 계약 직전에 계약이 엎어지는 건 가끔 있는 일이라 징계감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그 원인이 박규민 피디의 개인행동이라 어느 정도 책임은 져야 하겠지만 그렇게 심한 징계는 없을 터였다.
이서준이 출연할 예정이었던 드라마가 박규민 피디의 작품이면 피디를 교체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지만, 박규민 피디의 작품은 다른 작품이었다.
‘그 자식은 왜 남의 드라마에 눈독을 들여서……!’
그래서 일이 더 복잡해졌다.
머리가 아파진 CP가 입을 열었다.
“아직 안 정했는데, 그건 왜?”
“거기에 이것도 고려해 주십시오.”
공희찬 피디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국장과 CP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공희찬 피디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박규민 피디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잘 됐잖아. 넌 네가 준비하던 스릴러하고 난 이거 하고.
-배우랑 스태프들 다 네 목록대로 준비해 놨으니까 바로 촬영 들어가면 돼. 이야. 공희찬. 내 덕분에 편하게 촬영하겠네. 아, 그리고 이거 대본 1화까지 완성됐다며? 그것 좀 넘겨봐. 나도 촬영 준비해야 하니까. 작가 번호도 넘기고.
공희찬 피디의 얼굴과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보던 국장과 CP가 뒷목을 잡았다.
“이, 이게 진짜야?”
“네. 박규민이 하는 스릴러. 제 작품입니다.”
공희찬 피디의 말에 국장은 이마를 짚었고 CP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게 칭찬했던 박규민의 작품이 눈앞에 서 있는 공희찬의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대본부터 배우, 스태프 구성까지입니다.”
“……전부잖아!”
공희찬의 말에 CP가 경악했다. 국장이 쯧, 혀를 찼다.
“이 새끼…… 이거…… 더 경력이 쌓이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놈이네.”
남의 작품을 빼앗고, 또다시 빼앗으려고 탑급이라는 말도 모자란 슈퍼스타의 소속사로 쳐들어가는 개인행동을 하는 입봉 피디.
이제 입봉하는데도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데 더 경력을 쌓으면 어떤 갑질을 할지 몰랐다.
국장과 CP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공희찬.”
“……네.”
두 손을 모으고 있던 공희찬 피디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 작품을 지키고 미래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지르긴 했는데 잘했는지는 모르겠다.
국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박규민 불러와.”
“네.”
국장실을 나와 사무실로 향한 공희찬 피디가 초조한 듯 다리를 떨고 있는 박규민 피디를 불렀다. 또다시 부르는 국장에 박규민이 욕설을 내뱉고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국장실로 향했다.
박규민을 뒤를 따라가던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돌렸다. 긴장감 흐르는 사무실 한쪽에 조연출 김단비와 최현우가 서 있었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공희찬 피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현우와 김단비가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나이스!”
“근데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었네.”
“그러게. 잃은 게 너무 커. 이서준 배우 직접 보고 싶었는데!”
김단비의 말에 최현우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펜을 내려놓은 서준이 스트레칭을 했다. 오후 내내 사인했는데도 포토 카드가 든 상자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근데 포토 카드 진짜 많네요. 오늘 다 못하겠어요.”
“천천히 해. 팬미팅까지만 하면 되니까.”
서준의 앞에 오렌지 주스를 놓은 안다호가 웃었다.
“팬미팅에 오는 팬분들도 드리고 추첨 형식으로 못 오는 팬분들도 드릴 거거든. 해외 팬분들도 말이야.”
한국에서 팬미팅을 하는 만큼 외국 팬들은 오기 힘들 터였다.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많이 해야죠! 다호 형. 포토 카드 더 만들면 안 돼요? 부족해 보이는데!”
신이 난 듯한 서준의 모습에 안다호가 웃었다.
“전부 다 드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룰루랄라 사인을 할 준비를 하는 서준과 새로운 포토 카드를 꺼내려던 안다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서준과 안다호의 눈이 마주쳤다.
기시감을 느낀 안다호가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몇 시간 전 봤던 로비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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