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77화
“안 팀장님!”
막 서준의 연습실을 나와 1층 회의실로 향하려던 안다호와 서준의 쪽으로 2팀 직원 한 명이 뛰어왔다. 로비 직원이 서준의 일이라 안다호뿐만 아니라 2팀 사무실에도 알린 모양이었다.
빠르게 달려온 2팀 직원이 옆에 서자 안다호가 물었다.
“MBS에 박규민 피디란 사람이 있습니까?”
“네. MBS 소속 피디로 이번에 공희찬 피디와 같이 입봉한다고 합니다.”
박규민이 MBS 소속이라는 건 이미 로비 직원들도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안다호는 다시 확인했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오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할리우드 배우 이서준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브라운블랙, 화이트, 레드크라운이라는 대단한 가수들이 있는 곳이었다.
“‘같이’라면…… 4부작 드라마 말입니까?”
“네. 공희찬 피디와 입사 동기로 이번 4부작 드라마에서 스릴러 장르를 찍을 예정이랍니다.”
2팀 직원의 바나나톡으로 온갖 정보들이 순식간에 모였다. 갑자기 찾아온 방송국 피디에 다른 일을 제쳐놓은 2팀 직원들이 빠르게 이곳저곳 연락해서 박규민 피디에 대해 알아내는 중이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바나나톡을 읽던 2팀 직원이 앞서 걸어가는 안다호에게 알아낸 정보를 알려주었다.
‘오.’
프로페셔널한 매니저와 직원의 모습에 서준이 감탄했다. 자신과 같이 일할 때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서준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이렇게 일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다호 형은 나랑 있을 때는 아예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이니까.’
그렇다고 서포터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챙길 건 미리 다 챙기고 촬영진과 배우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한 걸음 물러서 상황을 살피는 멋진 매니저였다.
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안다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일단 피디들 쪽 평은 좋습니다. 시킨 일은 제때 하고 성실하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안다호의 되물음에 2팀 직원은 바나나톡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뒤따라가던 서준도 귀를 쫑긋 세웠다.
“조연출이나 스태프 쪽에서는 평은 별로랍니다. 특히 보조출연자들과 아역 배우들 쪽 평이 나쁩니다.”
“……그렇군요.”
윗사람에겐 잘하고 아랫사람은 함부로 대하는 사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꽤 쉽게 만날 수 있는 타입이지만 거기에 아역배우가 들어간다면 조금 달랐다. 미간을 찌푸린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 촬영이 있답니다.”
“……촬영이요?”
안다호와 2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서준이 물었다. 2팀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이번에 입봉하는 작품이 내일부터 촬영이래. 이미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다 섭외가 된 상태라서 어째서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준이를 섭외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왜 왔을까요?”
안다호와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안다호가 서준에게 말했다.
“서준이 넌 여기 있어.”
“같이 들어가면 안 돼요?”
“무슨 일로 왔는지도 모르는데 안 돼. 내가 들어보고 전해줄게.”
좋은 이야기라면 몰라도 나쁜 이야기라면 적당히 걸러 서준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진지한 안다호의 표정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하 연습실 가 있을게요.”
“……연습생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고.”
“괜찮아요. 다섯 명 다 우리 학교라면서요. 미리 친구 사귄다고 생각하면 되죠.”
지하 연습실에 있을 미리내 예고 신입생과 재학생들을 떠올린 안다호가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이 지하 연습실로 향하자 비명 같은 환호성을 터뜨린 연습생들과는 달리 안다호와 박규민 피디가 있는 회의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이서준 배우 매니저 안다호입니다.”
“MBS 드라마국 피디, 박규민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한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안다호는 박규민 피디를 살폈다. 갑자기 쳐들어온 것치고는 꽤 당당한 박규민의 태도에 안다호의 눈빛이 싸늘해졌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서준 배우가 저희 방송국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들었습니다.”
안다호는 박규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지 않으며 박규민 피디의 말에 적당히 호응했다.
“아, 네. 그럴 예정입니다. 피디님도 알고 계신가 보군요.”
“네. 근데 그걸 알고 나니, 너무 황당해서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박규민 피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이서준 배우가 겨우 4부작이라니요! 24부작은 돼야죠. 저에게 맡겨주시면 24부작, 적어도 16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 수 있습니다. 7년 만의 드라마 출연이니까 좀 더 오래 얼굴을 비춰야죠!”
“음. 16부작이요?”
안다호의 반응이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박규민 피디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제 곧 성인이 되는데 이미지 변신도 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볼 사람만 보는 영화보다는 대중성이 강한 드라마가 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죠. 아역 배우 중에 아역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서 성인 배우로 성장하지 못한 배우도 많지 않습니까. 아, 물론 이서준 배우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안다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배역도 남주 아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연도 아니고 남주 아역이라니…… 지금까지 주연을 맡아온 이서준 배우한테 아역이라니 말이 됩니까? 누가 고른 건지 참. 제가 작가님께 말해서 다른 캐릭터로 수정해드리겠습니다.”
이서준 본인이 골랐다.
‘다른 캐릭터를 넣으면 아예 작품을 새로 써야 할 텐데?’
잠시 생각하던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4월 방송이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촬영이야 금방 할 수 있습니다.”
박규민 피디의 말에 안다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다호의 속마음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겉과는 달랐다.
촬영‘이야’라는 어투도, ‘금방’이란 단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배우 때문이리라.
박규민에 대한 안다호의 평가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럼 지금 드라마를 맡고 있는 공희찬 피디님은?”
“드라마가 엎어지는 게 하루 이틀인가요. 위에서 바꾸라면 바뀌는 거죠. 공희찬 피디보다는 제가 나을 겁니다. 다 구상해 놨거든요. 이서준 배우가 나오면 멋지게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적당히 맞장구쳐 준 안다호는 박규민 피디를 돌려보냈다. 한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서준의 매니저에 박규민 피디는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막 지하 연습실에서 연습생 형들과 웃고 떠들다 1층으로 올라온 서준이 기쁜 듯한 박규민 피디의 뒷모습을 보고 안다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대요?”
“음.”
안다호의 미소가 진해졌다.
“어쩌다 보니 서준이가 태풍의 핵이 되어버렸네.”
태풍의 핵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데 주변이 떠들썩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서준에게 안다호가 박규민의 속셈을 말해주었다.
“‘봄’을 자기가 연출하고 싶은 거야.”
봄이라면 공희찬 피디가 연출하고 서준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가제였다. 서준이 눈을 깜빡였다.
“저 피디님은 지금 하고 있는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서준이가 없잖아. 입봉작으로 서준이가 출연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어. 그래서 공 피디님 자리를 뺏을 생각인가 봐.”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맘대로 바꿀 수 있어요?”
“여기서 갑은 서준이니까. 서준이가 공희찬 피디보다 박규민 피디가 더 좋다는데 누가 안 들어주겠어. 그것도 경력 있는 유명한 피디도 아니고 이제 입봉하는 피딘데.”
안다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기다 4부작을 24부작으로 늘리면 방송국도 좋을 테고 서준이 너도 분량이 많아져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
그 말에 상황을 이해한 서준이 고개를 돌려 안다호를 보았다.
다호 형. 웃고 있는데 즐겁거나 기뻐서 웃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런 다호 형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서준이가 겨우 분량 때문에 할까 말까 하는 급도 아닌데 말이야. 선심 쓰듯 16부작으로 늘려주겠다고? 우리 서준이는 한 장면만 나와도 시청자들은 엄청 좋아한다고. 게다가 이미지 변신? 서준이가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나? 제일 중요한 촬영은 왜 그렇게 대충이고. 아까부터 묘하게 서준이를 낮잡아 말하는 게 내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은데…….”
낮게 읊조리는 안다호의 모습에 서준이 눈을 끔벅였다.
‘다호 형. 화났나?’
처음 보는 모습이라 낯설면서 신기했다.
* * *
코코아엔터에서 돌아온 박규민 피디가 CP에게 물어 ‘봄’의 시놉시스를 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연출 최현우가 공희찬 피디에게 알렸다. 트라우마가 재발한 공희찬 피디가 떨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고 박규민 피디를 비상구로 불러냈다.
“잘됐잖아. 넌 네가 준비하던 스릴러하고 난 이거 하고.”
코코아엔터에 갔던 이야기를 자랑하듯 늘어놓던 박규민 피디가 피식 웃으며 ‘봄’ 시놉시스를 흔들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에 숨어 있던 김단비와 최현우는 이마를 짚었다. 이번 김단비 저주는 이거였나 보다.
‘너 앞으로 말하지 마라.’
‘……응.’
김단비는 반성했다. 앞으로 촉이니 뭐니,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겠다.
그사이에도 박규민 피디의 말을 이어졌다.
“배우랑 스태프들 다 네 목록대로 준비해 놨으니까 바로 촬영 들어가면 돼. 이야. 공희찬. 내 덕분에 편하게 촬영하겠네. 아, 그리고 이거 대본 1화까지 완성됐다며? 그것 좀 넘겨봐. 나도 촬영 준비해야 하니까. 작가 번호도 넘기고.”
진정하려고 숨을 몰아쉬고 있던 공희찬 피디가 결국 폭발했다.
“너 이 자식!”
좋은 게 좋다고 생각했던, 호구 공희찬 피디도 이번만큼은 화낼 수밖에 없었다.
멱살을 잡힌 박규민 피디가 인상을 쓰며 공희찬 피디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감정이 격해진 공희찬 피디의 힘이 더 셌다.
잡힌 멱살에 욕설을 내뱉은 박규민이 말했다.
“네가 능력이 안 되니까 그 이서준을 캐스팅하고 4부작밖에 못 만드는 거 아니야. 게다가 아역? 이서준이 아역이라고? 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겠다. 배우를 설득해서 다른 역으로 바꿨어야지.”
“그렇다고 코코아엔터에 쳐들어가냐?!”
“쳐들어가다니. 말이 좀 심하다?”
박규민 피디의 말에 숨어서 듣고 있던 조연출 김단비가 뒷목을 잡았다. 최현우가 열심히 김단비를 진정시켰다.
“삼고초려라고. 삼고초려. 이렇게 정성을 보여서 4부작이 아니라 16부작, 아니지. 24부작으로 분량을 늘리면 배우도 좋고 방송국도 좋을 거 아니야?”
“입 밖으로 내면 다 말인 줄 알지……!”
공희찬 피디가 이를 갈았다.
“봐봐. 이서준 매니저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니까. 7년 만의 드라마 출연인데 4부작보다야 24부작이 훨씬 낫지. 갑자기 급 떨어지게 4부작 출연이면 그쪽 이미지도 안 좋고.”
“미쳤냐?! 이서준 배우가 떨어질 급이 어디 있어!”
공희찬은 미친놈 보듯 박규민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쟤 머릿속에서 이서준 배우는 이미지는 어떤 거야?
어이가 없어 힘이 빠진 공희찬 피디의 손을 떼어낸 박규민 피디가 옷깃을 바로 하며 말했다.
“이서준이 지금까지는 대단한 배우였지. 근데 이제 곧 성인인데 아역 배우는 이미지 변신 제대로 못 하면 그대로 끝인 거 몰라?”
억.
박규민 피디의 말에 공희찬 피디가 뒷목을 잡았다.
“천재 아역 배우로 불리다가 사라진 아역들이 한둘이야? 이서준은 안 그럴 것 같냐? 성인 될 때까지 이제 몇 년도 안 남았어. 할리우드 배우라는 단물이 빠지기 전에 촬영해야지.”
박규민은 이서준이 성인 배우로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예상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박규민의 표정에 화를 내던 공희찬은 어이가 없었다.
“……미친놈.”
박규민을 비상구에 내버려 두고 자리로 돌아온 공희찬은 일단 해결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이서준의 매니저가 좋은 반응이었다니 더 초조해졌다.
‘나도 코코아엔터가 가 봐야 하나? 아니야. 나까지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작가님께 부탁해서 소은진 작가님 편으로 말이라도 전해볼까. 근데 진짜 박규민이 맡으면 어떻게 하지.’
역시.
미친놈이라도 한 대 패줄 걸 그랬다.
끙끙 앓고 있는 공희찬 피디와는 달리 촬영을 며칠 연기한 박규민 피디는 태평했다. 이서준을 데려와서 24부작 드라마를 만들면 드라마국의 영웅이 될 수 있는 데다가 앞으로 꽃길이 펼쳐질 터였다.
그때였다.
“공희차안!! 박규미인!!”
MBS 드라마국 사무실에 국장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해결 방법을 찾던 공희찬 피디와 ‘봄’의 시놉시스를 읽고 있던 박규민 피디가 반사적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국장이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사무실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서준이 안 찍는다고 해-!!”
충격적인 소식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추었다. 심장까지 멈춘 것 같았다. 공희찬 피디와 박규민 피디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지금 당장 국장실로 올라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조연출 김단비와 최현우가 마른 침을 삼켰다.
박규민 피디의 미친 짓이, 김단비 저주의 끝이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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