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73화
MBS 드라마국.
박민규 피디와 이번 4부작 프로젝트를 맡은 CP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민규 피디가 보여주는 종이에 CP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유쾌하게 웃었다.
“대단한데? 벌써 배우를 모으고 있어? 희찬이는 아직 작품도 못 정했다던데.”
CP가 배우 목록을 훑어보며 눈에 띄는 이름들을 말했다.
다들 주연급은 아니었지만, 연기파 배우들이었다. 작품만 좋다면 피디의 입봉작에 흔쾌히 얼굴을 비칠 것 같으면서도 연기도 뒤떨어지지 않는, 박민규 피디가 꽤 오래전부터 이 작품을 준비한 것 같아 CP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때우기 용인 프로젝트였지만 생각보다 잘 진행되는 상황에 CP는 흡족했다. 그래서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열심히 하는 피디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도움 필요할 때 말하고.”
“예!”
CP가 자리를 뜨자 박민규 피디도 실실 웃으며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몸을 숨기고 듣고 있던 조연출 김단비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 * *
“박 선배. 벌써 배우 섭외하고 있대요!”
막 조명감독과 이야기를 끝낸 공희찬 피디와 그 옆에 있던 조연출 최현우가 고개를 들어 헐레벌떡 뛰어오는 김단비를 바라보았다.
“쟨 잘도 이것저것 알아오네.”
“그러게 말입니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헉헉 숨을 몰아쉬는 김단비를 보던 공희찬 피디는 문뜩 궁금해졌다. 박민규라면 어떤 배우들을 선택했을까. 공희찬 피디가 턱을 매만졌다. 공희찬도 나름대로 대본을 보며 조사한 배우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희찬 피디가 문뜩 대본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들 떠올렸다.
‘……설마.’
심각한 표정의 공희찬 피디를 눈치채지 못한 최현우가 입을 열었다.
“누구 있던데? 탑급 있어?”
“그 정도는 당연히 없지!”
최현우의 물음에 김단비는 자신이 들었던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한 명 한 명 이름이 나올 때마다 공희찬 피디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며칠 전에 공 선배 거 가져간 것치고는 잘 골랐는데?”
김단비에게서 배우들의 이름을 듣던 최현우가 CP처럼 감탄했다. 남의 대본이나 뺏는 쓰레기 같은 피디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제법 능력은 있는가 보다.
“그치? 배역도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찰떡같지 않아? 아니지, 아니야. 박 선배가 잘되면 안 되지! 선배! 우리도 빨리 대본 찾…….”
감탄하던 김단비가 정신을 차리고 공희찬 피디를 바라보았다.
“……선배?”
공희찬 피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 * *
대본도 정해지지 않아 세 사람은 이른 시간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공희찬 피디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김단비와 최현우는 맥주와 저녁거리를 사서 공희찬 피디의 집으로 향했다.
맥주를 마시던 김단비와 최현우가 공희찬 피디의 이야기에 입을 쩌억 벌렸다.
입을 뻐끔 뻐끔거리던 김단비가 겨우 말을 뱉었다.
“미친 거 아니에요?!”
이리저리 박민규를 욕하던 김단비가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선배는 왜 그렇게 중요한 걸 책상 위에 올려놓은 거예요.”
“……그러게. 왜 그랬지?”
공희찬 피디도 속이 쓰려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우울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최현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배 잘못은 아니지. 누가 그걸 뺏어갈 거라고 생각을 하냐.”
“그건 그렇지만…… 화가 나서 그러지. 대본에 배우까지. 자기 손으로 하는 게 뭐가 있냐! 박민규!”
“선배. 배우 목록 말고 또 뭐가 있었어요?”
최현우의 말에 공희찬은 기억을 더듬었다. 대본과 배우 목록, 그리고,
“촬영장이랑 드라마에 꼭 필요한 소품들이랑 가장 잘 찍어줄 촬영 감독님하고 조명 감독님…….”
공희찬 피디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김단비와 최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끝이 없는 말에 저도 모르게 맥주를 들이마셨다. 꿀꺽꿀꺽 마시던 김단비가 테이블 위에 맥주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건 그냥 기획서 하나 넘겨준 거잖아요!”
김단비의 말에 최현우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더니…….”
“진짜 촬영만 하면 될 정도로 다 해놓고…….”
김단비는 그렇다 치고 최현우까지 이러니, 공희찬 피디은 그저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속이 쓰리다 못해 난도질당한 것 같았다. 설마, 대본뿐만이 아니라 그걸 다 가져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긴 이제 촬영 들어갈 텐데……우리는 아직 작품도 못 고르고.”
김단비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던 최현우가 공희찬 피디에게 물었다.
“조명감독님은 뭐라고 하세요?”
“단막극 대본이라더라고. 4부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작가한테 연락해 보겠대.”
“단막극 대본을 4부작으로 고치기 많이 힘들까요?”
김단비의 물음에 공희찬 피디도 최현우도 생각에 잠겼다.
“그거야 작가의 역량에 달렸지. 단막극이 너무 완벽하면 늘리지도 못할걸.”
“근데 어떤 작가님이세요? 라디오 드라마 작가님? 시나리오 작가님? 아니면 어디 공모전 합격하셨나?”
박민규 피디가 들고간 대본의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는데 몇 편의 단편 영화를 내본 적이 있는 데다가 작품도 좋았다.
눈을 반짝이는 김단비의 모습에 공희찬 피디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그쪽도 입봉작이라던데.”
공희찬 피디의 말에 새로 딴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김단비와 최현우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히히. 우린 망했어.”
“흐흐. 동감.”
“아니, 아니. 작감 둘 다 입봉작이니까 시청자들한텐 더 신선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신선해서 드라마가 바다로 가겠네요.”
“펄떡펄떡?”
최현우의 말에 김단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아예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다. 낄낄거리면서 웃는 것 같기도 했고 흑흑 거리면서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후배들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공희찬 피디가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작가를 소개해 준 조명감독이었다.
“네. 감독님.”
정신줄을 놓고 있는 사이에도 ‘감독님’이라는 세 글자는 귀신같이 알아들은 김단비와 최현우가 눈을 번뜩이며 공희찬 피디를 보았다.
-4부작인 거 전해줬는데 수정할 수 있대. 연락처 줄 테니까 잘해봐.
“감사합니다!”
-뭐, 나야 이쪽에도 저쪽에도 빚 만들어서 좋지. 프리라 영업도 내가 해야 되거든.
프리랜서 조명감독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공희찬 피디도 웃고 말았다. 실력이 좋아 여기저기서 불러대는 통에 따로 영업하지 않아도 되면서 자신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이런 핑계를 대는 모습이 정말 고마웠다.
“다음에 식사 한번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그래. 나 소고기 좋아해. 잘되면 소고기 사라고.
“예!”
-아, 말하는 거 깜빡했는데 소은진 작가 보조 작가야.
“……네?
-단막극이야 소은진 작가랑 최민성 피디도 좋다고 했는데 4부작은 모르겠네. 그래도 기본 실력이 있으니까 아주 망하진 않을 거야. 대박 나면 한우다?
조명 감독이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숨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단비와 최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된 건가?”
“글쎄. 단막극은 좋은데 4부작은 모르니까…….”
“일단 대본을 읽어봐야지.”
그렇게 말한 공희찬 피디가 조명감독이 알려준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공희찬 피디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유청아입니다!
* * *
다음 날.
조용한 카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온 공희찬 피디는 옆에 놓여 있는 음료도 마시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희찬 피디의 손에는 소은진 작가의 보조작가, 유청아 작가가 메일로 보내준 대본이 들려 있었다.
바로 어제 작가와 통화를 했는데 밤새 읽고 분석한 듯 대본은 벌써 너덜너덜했다.
“역시 단막극용이라 한 편으로 완벽해.”
퇴고를 많이 한 듯 유청아 작가의 대본은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공희찬 피디가 턱을 매만졌다.
‘이 상태로 이야기만 넣어서 늘리기에는 에피소드가 부족할 것 같고. 새 요소를 넣어야 한다는 건데…….’
억지로 새로운 등장인물을 넣기엔 이 단막극이 아까웠다.
‘어쩐다.’
어제 김단비와 최현우와 함께 유청아 작가가 보내준 대본을 읽고 분석해 봤지만 도통 생각나는 게 없었다.
공희찬 피디가 끙끙 앓고 있을 때, 딸랑, 카페의 문이 열렸다.
초췌해 보이는 유청아 작가가 카페 안을 둘러보다 대본을 읽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계산대에서 음료를 주문한 유청아 작가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공희찬 피디님?”
“아, 네. 공희찬입니다.”
“안녕하세요. 유청아입니다.”
둘 다 아직 피디, 작가 이름을 붙여 자신을 소개하는 게 어색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유청아 작가의 눈에 공희찬 피디가 들고 있는 대본이 들어왔다. 제목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신의 대본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 유청아 작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유청아 작가의 음료가 나오고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려드린 대로 방영 날짜는 4월입니다. 월화 10시 드라마고 일주일에 한 편씩 방송될 예정입니다. 같이 방송하는 작품이 있어 아직 월요일 방송일지 화요일 방송일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전화로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유청아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 편이라면 마무리를 잘해야겠네요.”
“네. 한 편 끝날 때 임팩트가 남아 있어야 다음 주 방송까지 시청자를 끌고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유청아 작가가 수첩에 필기했다. 공희찬 피디가 말을 이었다.
“대본 작업은 언제 끝날 것 같습니까?”
“아, 이거 어제 생각한 건데 드라마에 넣어보면 어떨까요?”
유청아 작가가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프린트된 종이를 공희찬 피디가 받아 들었다. 유청아 작가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단막극을 4부작으로 만드는 만큼 새로운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네. 그렇죠. 유 작가님 단막극이 완성도가 높아서.”
공희찬 피디의 말에 유청아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서 넣어봤는데, 급하게 적느라 앞뒤가 안 맞을 수도 있으니 고려해서 읽어주세요. 물론 수정 가능해요.”
이걸 쓰느라 어젯밤을 꼴딱 샜다.
“네. 알겠습니다.”
공희찬 피디는 유청아 작가가 건넨 종이뭉치를 읽어 내려갔다. 유청아 작가의 말대로 급하게 적어 내려갔는지 다듬어지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공희찬 피디는 유청아 작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재미있겠네요. 원래 이야기를 헤치지 않으면서도 시청자들이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새로 넣을 장면들도 많아질 것 같습니다.”
공희찬 피디의 감각이 외쳤다. 이건 흥행할 거라고. 잡아야 한다고.
그 말에 유청아 작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이렇게 할게요.”
“이 배역에는 어떤 배우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공희찬 피디의 물음에 유청아 작가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입을 열었다.
유청아 작가의 말에 공희찬 피디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는 공희찬 피디의 모습에 유청아 작가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물론 그쪽에서 승낙해야 가능하지만요.”
“……네…… 그렇죠.”
공희찬 피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잔을 잡았다.
오늘 차가운 음료를 시켜서 다행이었다. 뜨거운 커피였으면 손을 델 뻔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을 잡으니 잔까지 덜덜덜 떨렸다. 그래도 목이 타서 잔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애써 한 모금 음료를 마신 공희찬 피디가 한마디 겨우 뱉어냈다.
“유 작가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같은 입봉작이라도 탑급 배우들과 많이 작업해 본 소은진 작가의 보조작가라서 그런가. 자신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공희찬 피디는 유청아 작가의 말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왠지, 괜찮을 것 같은 느낌.
아니, 괜찮다 못해 딱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배우들을 구하기가 어렵겠지만…… 입봉작이니까.’
시청률 걱정도 없고 지원도 적당히 해줄 테니 이것저것 다 해보라는 CP의 말을 떠올린 공희찬 피디가 작게 웃었다. CP가 알았다면 공희찬 피디의 멱살을 잡고 미쳤냐고 외쳤을 터였다.
‘이게 단비가 말했던 신선하다 못해 바다로 가는 걸까.’
이 이야기를 듣고 진짜 놀라 펄떡 펄떡거릴 김단비와 최현우가 떠올라 공희찬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이서준 배우를 남자주인공 아역으로 쓰겠다니…… 정말 좋네요.”
“그렇죠?”
유청아 작가가 환하게 웃었다. 소은진 작가마저 미쳤냐고 바라봤는데 공희찬 피디와는 마음이 맞아서 정말 좋았다. 왠지 촬영도 잘될 것 같았다.
좋다고 말한 자신이 어이가 없어 실실 웃던 공희찬 피디가 말했다.
“그래도 섭외될 때까지는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게 낫겠습니다.”
“네. 캐스팅 안 될 수도 있으니까요.”
눈이 마주친 작가와 피디가 결국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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