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71화
“그래도 주말은 제법…….”
“그래. 제법 나오지. 근데 일주일에 이틀뿐이잖아. 나머지는 개판이고!”
주말 드라마를 담당하는 CP의 말에 국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CP들을 둘러보며 씩씩대던 국장이 진정하기 위해 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요즘 쉬고 있는 작가, 누가 있지?”
“소은진 작가하고 임혜령 작가, 오영철 작가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는 확실하게 시청률이 보장되는 스타 작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최근 드라마 판에서 가장 시청률을 잘 내는 작가는 소은진 작가였다.
그 말에 국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우리는 소은진 작가 같은 스타작가를 못 데리고 오는 거야?”
“소은진 작가가 함께 일하는 외주제작사, 민들레가 KBC랑 가까운 곳이라서…….”
드라마 제작사, 민들레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는 거의 KBC로 간다. 재수사와 내의원의 기점으로 아예 그렇게 굳어진 것 같았다. 돈을 더 준다면 MBS에도 드라마를 공급하겠지만, KBC에서 잡은 황금 거위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제작비를 던지기에는 드라마가 그만큼 값을 할 보장도 없고.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국장의 머릿속에 한 이름이 떠올랐다.
스타 작가하면 소은진, 스타 피디하면 최민성.
게다가 최민성 피디는 작년 12월 연극 거울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졌었다. 드라마를 홍보하기엔 딱이었다.
‘하지만…….’
최민성 피디는 아예 외주제작사 민들레 소속이었다.
“어후.”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애써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작가는?”
“임혜영 작가는 연락이 안 되고 오영철 작가는 지금 신작을 준비 중이랍니다.”
다들 지금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열심히 알아본 듯 바로 답했다. PD 시절 오영철 작가와 함께 일해본 CP가 가져온 정보에 국장이 물었다.
“대본은 어때?”
“줄거리는 괜찮았습니다. 오영철 작가 특유의 느낌도 잘 났고 시청자를 잡을 만한 매력도 있었습니다.”
그 말에 다른 CP들의 얼굴도 조금 폈다.
“오영철 작가 드라마라면 출연할 배우들도 제법 있겠네요.”
“그러게. 이제 한숨 돌리겠어.”
“오 작가는 우리랑 한대요?”
“네. 원고료만 적당하면 내일이라도 바로 계약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제 대본을 준비하는 중이라, 아무래도 방송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CP의 말에 국장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위에서 하도 닦달하는 터라 마음이 급해, 드라마를 만들 때까지 준비 기간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말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아마…….”
CP가 생각에 잠겼다.
오영철 작가는 손이 빠르니 시놉시스도 대본도 빨리 나올 테고 스타 작가 작품이라 배우들을 섭외하기도 쉬울 터였다. 가장 힘든 건 촬영장이겠지만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니 그렇게 섭외하기 어렵지도 않을 거고.
‘방송 시작하기 전에 몇 화 찍어놓고.’
“아무리 빨라도 첫 방송은 5월이나 돼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5월…….”
3개월하고도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
국장과 CP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오 작가 드라마 5월에 바로 편성할 수 있어?”
“일단 이번에 다다음주부터 방송되는 수목드라마 시간은 힘듭니다. 수목에 넣는다면 6월부터 방송 가능합니다.”
“6월은 늦어. 하루라도 빨리 성과를 내야지.”
국장의 말에 다들 고민에 잠겼다.
“월화 쪽은?”
“지금 하는 작품은 3월에 끝나고 그다음 작품은 4월부터 7월까지 방송할 예정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국장이 입을 열었다.
“월화 이거 다음에 예정된 건 있지?”
“네. 이제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그거 수목으로 옮기자. 그리고 월화에 오 작가 작품 넣고.”
“그럼 월화, 4월이 빕니다.”
말을 하던 CP도, 다른 CP들도 국장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가끔 스케줄이 맞지 않을 빈 시간에 들어가는 짧은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4월 한 달이니, 일주일에 2화씩. 총 8화.
8부작 드라마를 만들면 될 터였다.
“맡은 사람?”
국장의 말에 다들 시선을 피했다.
4월 방송 예정인 8부작 드라마.
대본도 배우도 정해지지 않은 데다가 제작 기간마저 2개월하고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
‘일단 쓸 만한 대본부터 구해야 하는데…….’
‘쓸 만한 게 있으면 벌써 드라마로 만들었지.’
‘8부작 드라마에 나올 배우가 있으려나?’
이런 상황을 잘할 피디가 있을까.
무거운 침묵 속에 국장이 CP들을 살살 달랬다.
“시청률 압박 안 한다. 그냥 적당적당히 만들어도 돼. 예산도 적당히 줄게.”
그래도 침묵이 가득한 회의실.
생각에 잠겨 있던 CP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단막극을 넣는 건 어떻습니까?”
“단막극?”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사라진 후로 점점 줄어들다 현재는 KBC에서만 방송하고 있었다.
“단막극 8개면 동시에 만들 수 있으니까요.”
“나쁘진 않은데…….”
“입봉할 애들도 있고.”
CP들이 제 아래에 있는 조연출들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16부작, 24부작 드라마를 맡기엔 부담감이 크니 단막극 정도면 적당했다.
“근데 8개는 너무 많지 않아? 스태프들도 한정적인데…….”
“2화씩 4개를 만들거나 4화씩 2개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음.”
괜찮을 것 같았다.
국장도, CP들의 마음이 점점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 * *
“또 혼자 치우고 계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7년 차 조연출 공희찬이 작게 웃었다. 그런 공희찬의 모습에 4년 차 조연출, 김단비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드릴게요. 뭐 하면 돼요?”
“괜찮아. 이것만 옮기면 되거든.”
“이거 박 선배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규민이도 일이 많아서…… 시간 남는 사람이 하면 좋지.”
“네에.”
‘피디님들한테 달라 붙어 있느라 바쁘겠죠.’
뒷말은 삼킨 김단비가 공희찬을 도왔다.
그 때문인지 아마 박규민의 입봉이 먼저일 거라는 의견이 파다했다. 실력으로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앞에서 허허 웃고 있는 공희찬이 최고인데 말이다.
‘공 선배가 작품 보는 눈이 얼마나 좋은데…….’
공희찬이 좋다고 한 대본은 전부 훌륭한 성적을 냈다. 지금 KBC에서 21%의 성적을 내고 있는 드라마도 그중 하나였다.
‘근데 사람이 호구, 음, 착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제대로 화를 낼 때가 있는지 모르겠다.
“야! 공희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음. 김단비가 저 멀리 서 있는 박규민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멋있고 듬직한 호랑이한테 미안한 비유였다.
* * *
“그래서 4월 월화에 너희 드라마를 방송하기로 했다.”
CP에게 불려 온 조연출 공희찬와 박규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희, 둘이요?”
나 말고 얘까지?
박규민의 말에 CP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왜? 안 좋아? 입봉하는 거잖아.”
CP의 말에 박규민이 얼른 대답했다.
“아뇨. 좋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결정될 줄은 몰라서…….”
공희찬이 볼을 긁적거렸다. 입봉할 때가 되지 않았나,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정해질 줄은 몰랐다.
그런 조연출들의 모습에 CP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에 한 편씩 방송하고 방송 기간은 4주. 그러니까 한 작품당 4화씩이야.”
“4화.”
“4월 방송이니까 오늘부터 바로 대본 구하고 배우들 구해야 할 거야. 그래도 그 연차쯤 되면 입봉작으로 만들고 싶은 장르나 대본이 한두 개쯤은 있을 거 아니야?”
“네!”
공희찬과 박규민이 바로 대답했다.
조연출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든 대본이 어디 한두 개뿐이었을까. 다른 피디의 눈에 들어 먼저 제작한 적도 있었고 아직 제작되지 않은 대본을 누가 낚아챌까,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어떤 걸 하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대본들에 공희찬이 눈을 반짝였다. 그런 공희찬을 박규민이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도 시청률 기대 안 하니까 마음 편하게 해. 그렇다고 지금 있는 시청률까지 홀라당 까먹지는 말고. 이런 기회 별로 없다? 예산은 적당하고 기승전결 다 넣을 수 있게 4화나 방송하는데 시청률 압박이 없어. 얼마나 좋은 기회야.”
금방이라도 대본을 찾으러 가고 싶어 들썩들썩 움직이는 조연출들을 보며 CP가 빙그레 웃었다.
“너희도 이제 조연출 졸업이네. 잘해봐. 공희찬 피디, 박규민 피디.”
CP의 말에 공희찬 피디와 박규민 피디가 환하게 웃었다.
* * *
“오늘은 열리려나?”
오늘도 생의 도서관에 들른 서준은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생의 도서관의 문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어제도 묵묵부답이었으니 오늘도 그러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우우웅.
문에 닿은 서준의 손을 통해 서준의 몸 안에 쌓여 있는 마나를 가늠한 도서관의 문이 웅웅 울기 시작했다.
“오?”
갑작스러운 소리에 조금 놀라 문에서 손을 떼려던 서준은 반짝이는 문의 모습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서준의 손이 닿은 곳부터 빛이 번져 나갔다. 높이가 3층 정도 될 것 같은 커다란 문이 마나로 가득 차 반짝였다.
평범하게 열리던 중상급까지의 문과는 달리 상급부터는 뭔가 다른 것 같았다. 그 차이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검색 기능이 생기는 건가!”
제일 기대하는 건 검색 기능이었다.
“제발. 제발!”
잔뜩 기대하는 하고 있는데, 멋진 반짝임을 보여주던 도서관의 문이 잠잠해졌다.
그러고는 커다란 문이 바깥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서준은 묵직하게 열리는 도서관의 문에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드디어,
상급 능력이 있는 도서관의 문이 열렸다.
“그것보다 검색 기능!”
감격은 내버려 둔 채, 서준은 얼른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검색 기능을 찾아 이곳저곳 뒤집어엎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안으로 들어간 서준은 두어 걸음도 못 떼고 그 자리에서 멈춰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서준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그래. 이것도 필요하긴 했어.”
서준은 눈앞에 놓여 있는 물건들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준의 몸에 딱 맞을 것 같은 푹신한 의자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원목 책상, 그리고 독서를 위해 준비된 독서대와 책갈피.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울 수 있는 다과들. 신선한 공기를 뿜어내는 식물들과 손에 딱 맞을 것 같은 필기구와 눈의 피로를 줄여줄 안경까지.
독서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비틀비틀 걸어간 서준이 의자에 앉았다.
폭신한 의자가 서준의 몸을 받쳐주었다. 집에 있는 의자도 좋은 의자인데 이 의자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딱 맞네.”
엘프의 마법을 사용한 건지, 드워프의 기술을 이용한 건지, 아니면 다른 종족의 능력을 사용한 건지 의자는 정말 좋았다.
서준은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리고 턱을 괬다.
책상의 높이가 너무 적당해 헛웃음만 나왔다.
“아까 그건 신체 측정이었나…….”
허허, 웃던 서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등급의 도서관과 똑같이 수많은 책장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커다랬던 문의 크기와는 달리 책의 크기는 서준이 보기 편하게 현실의 책들과 비슷한 크기였다.
“많네.”
하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생의 책들보다는 적었다. 아마 전생들의 등급은 최하급이 가장 많고 최상급이 가장 적은, 피라미드 모양이 아닐까 싶다.
“아직 못 읽은 책들도 많은데…….”
읽은 책보다 못 읽은 책들이 더 많았다.
삶이 짧아 몇 장도 되지 않는 최하급 생의 책들은 하루에도 수십 권씩 읽을 수 있지만 오래 삶을 사는 중하급 이상부터는 책의 페이지 수가 증가해서 몇 권도 읽기 힘들었다.
한 생을 정독해야 능력을 얻을 수 있어 처음 책을 고를 때 잘 골라야 했다. 기껏 다 읽어놓고도 의도와는 다른 능력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책상과 의자도 지금까지 항상 도서관 바닥에 앉아 생의 책을 읽었던 서준에게는 바라마지않았던 것들이었지만,
“검색 기능 달라고…….”
이젠 생의 도서관을 만든 전생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현생을 살고 있는 서준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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