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70화
“물론 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바로 드라마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소은진 작가의 말에 벅찬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유청아 작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본이 드라마로 만들어지기 위해선 드라마를 내보낼 방송국과 대본을 영상으로 만들 피디, 함께 촬영을 진행해 나갈 스태프들과 캐릭터들을 찰떡같이 연기해 줄 배우들이 필요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대본을 찾는 피디들에게 널 소개해 주는 것뿐이야.”
드라마는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엄청난 돈과 시간, 인력이 드니 그렇게 손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모전에 당선돼도 3년이고 4년이고 기다려도 제작되지 않는 게 드라마였다.
“네 대본이 피디와 방송국의 마음에 들어야 해.”
스타작가 소은진 작가라면 몰라도 ‘소은진 작가의 보조작가’라는 타이틀은 피디들이 대본을 한번 들춰보게 할 정도의 호기심만 줄 터였다. 그 호기심이 드라마 제작까지 이어지는 데는 유청아의 대본이 좋아야 했다.
“작가님 마음에만 들어도 충분해요!”
유청아 작가의 말에 소은진 작가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몇 군데 수정했으면 좋을 것 같은 곳이 있어. 이쪽으로 와 볼래, 청아야?”
“넵!”
소은진 작가의 말에 유청아가 볼펜을 들었다. 눈을 반짝이며 소은진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본에 붉은 선을 그어나갔다.
* * *
오늘은 브라운블랙의 1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는 날.
“형! 포크 어디 있어요?”
“저 옆에.”
집주인 황예준의 말에 최시윤이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포크의 ‘ㅍ’ 자도 보이지 않았다.
“저 옆이요? 저 옆이 어디에요?!”
“여기 있잖아.”
“……아깐 못 봤는데……?”
황예준의 가리킨 곳에 포크가 있었다. 볼을 긁적이던 최시윤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포크를 챙겨 거실로 향했다.
커다란 텔레비전과 폭신한 소파, 그리고 넓은 테이블이 있는 거실.
평범한 한국인처럼 소파가 아니라 바닥에 앉은 황예준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크흠, 헛기침을 했다.
“과자!”
“여기 있어요.”
마찬가지로 바닥에 앉아 있던 최시윤이 비닐봉지에서 과자들을 꺼내 거실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브라운블랙 멤버들이 좋아하는 과자와 서준이 좋아하는 과자들이었다.
“음료수!”
“콜라, 사이다, 오렌지 주스까지 냉장고에 넣어 뒀어.”
음료수를 맡은 미국에서 자란 케빈 킴은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황예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서준이!”
“형. 서준이는 준비물이 아니,”
띵동.
“……왔네?”
“서준아!”
타이밍이 너무 좋아, 최시윤과 케빈 킴이 웃음을 터뜨렸다. 싱글벙글 웃으며 현관문 쪽으로 간 황예준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따뜻한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른 서준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서 들어와. 밖에 춥지?”
“아뇨. 다호 형이 데려다줘서 따뜻하게 왔어요. 여기 떡볶이요. 튀김이랑 순대도 같이 사 왔어요. 아, 김밥도 있어요.”
서준이 유명한 맛집에서 사 온 떡볶이가 든 봉투를 들어 보였다.
“맛있겠다! 이리 줘.”
황예준이 웃으며 봉투를 받았다. 목도리를 풀며 안으로 들어온 서준이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형들, 왜 웃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서준아. 옷은 저쪽에 걸어둬.”
최시윤의 말대로 벗은 패딩을 걸어놓으려던 서준이 거실을 둘러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케빈 형, 예준이 형, 시윤이 형이 있는데 한 사람이 없었다.
“서진이 형은 안 왔어요?”
“녹음이 늦어져서 좀 있다 온대.”
황예준에게서 봉투를 받아 서준이 사온 음식들을 거실 테이블 위에 세팅하던 케빈 킴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서진이 형 솔로 앨범 나온댔죠.”
브라운블랙의 리더이자 메인보컬인 박서진은 솔로로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고 올해도 솔로 앨범을 내기로 했다.
“응. 작곡은 서진이 형이랑 예준이 형이 했고.”
최시윤의 말에 막 포크로 떡볶이를 찔러넣은 황예준이 왼손으로 브이를 만들며 씨익 웃었다. 서준이 키득키득 웃었다.
“뭐, 조금만 더 부르면 좋은 게 나올 것 같아서 녹음실을 못 나오고 있는 거겠지.”
“맞아요. 우리도 녹음할 땐 항상 그러잖아요.”
대중과 팬들에게 공개되는 노래가 좀 더 좋은 노래가 되길 바라며, 녹음하고 또 녹음하고, 마지막까지 더 좋은 노래를 위해서 녹음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맨 마지막에 부른 노래가 정말로 좋아서 그다음 녹음부턴 더 못 나오게 되지.”
케빈 킴의 말에 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이란 게 완벽한 정답이 없다 보니 좀 더 하다 보면 더 좋은 노래, 더 좋은 연기,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거라는 생각에 무리할 때가 있었다.
“서진이 형. 오늘 오긴 할까요?”
“다큐 시작하기 전에 올 것 같대.”
서준이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을 일찍 잡아서 아직 다큐멘터리가 시작하기엔 시간이 남았다.
“그럼 그때까지 뭐 하죠?”
서준의 말에 집주인인 황예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드게임 있어. 그거 하자!”
황예준이 보드게임을 가지고 왔다.
4인용 게임이라 모두 말 하나씩을 잡았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시작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서준과 두 사람을 바라보던 케빈 킴이 입을 열었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이기는 사람이 메뉴 정하기 할까?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만날 때.”
황예준이 눈을 번뜩였다.
“오오! 한우다! 한우!”
“그거 좋네요. 랍스타 먹고 싶었거든요.”
“전 한식이 좋아요.”
“음. 난 미슐랭?”
서준과 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불꽃이 튀었다.
각자 원하는 저녁 메뉴를 위해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나 왔어.”
녹음을 끝낸 박서진이 왔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 박서진은 거실에 널브러진 서준과 세 멤버의 모습에 눈을 끔벅였다.
“뭐야? 다들 왜 이래?”
서준은 소파에 얼굴을 박고 엎드려 있었고 황예준과 최시윤은 지친 얼굴로 거실 바닥에 大자로 누워 있었다. 케빈 킴은 거실 구석에 웅크리고 처박혀 있었다.
“……게임을 너무 격하게 해서.”
“……지쳤어요.”
확실히 보드게임판이 거실 테이블 위에 있었다. 그 모습에 박서진이 물었다.
“보드게임을 했는데 왜 이렇게 돼?”
“내기를 했거든.”
“내기? 누가 이겼는데?”
소파에 엎어져 있던 서준이 번쩍 손을 들었다.
열심히 했다.
씩씩하게 들어 올려진 팔에서 뿜어나오는 뿌듯함에 박서진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진이 형. 다음에 한식 먹으러 가요.”
“한식은 맨날 먹잖아!”
“랍스타 먹고 싶었는데!”
소파에서 일어난 서준의 말에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황예준과 최시윤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밥 내기였나 보네. 근데 케빈은 왜 저기 있어?”
“아…….”
서준과 두 사람이 짠한 눈빛으로 케빈 킴을 등을 바라보았다.
“케빈 형이 젤 먼저 졌거든요.”
“중간에 끼워줬는데 또 졌거든요.”
“한 다섯 번쯤?”
어쩐지 케빈 킴의 그늘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 * *
“시작할 시간 다 됐네.”
서준과 기운을 차린 브라운블랙이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최시윤이 사온 과자와 케빈 킴이 사온 음료수를 미리 테이블 위에 준비해 놓았다.
“서준이까지 출연했으니까 시청률 엄청 오르겠는데?”
“그러게.”
“인터넷도 시끌벅적해.”
황예준이 휴대폰으로 인터넷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본방사수! 오늘만 기다렸다!
-요새 볼 게 많아서 좋음ㅎ
-광고 기네.
-시청률 대박인 방송이니까.
-오. 시작한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브라운블랙의 첫 시작이었다.
아주 옛날, 그러니까 서은찬이 코코아엔터를 인수하기 전까지 연습했던 낡았던 소속사 연습실에서 춤을 추고 있는 네 사람이 보였다.
화면에 비친 앳된 얼굴들에 서준과 브라운블랙이 감탄했다.
“우리 되게 어렸네.”
“윽. 춤!”
“못 보겠어요.”
형들의 반응에 서준이 키득키득 웃었다.
서준이야 48시간부터 내의원, 쉐도우맨1, 2 등 어렸을 때 찍었던 작품들이 자주 방송에 나오는 터라 어렸던 자신도 귀엽게 보였지만 브라운블랙은 다른 것 같았다.
브라운블랙의 이야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도 나왔다. 텔레비전 화면 속 박서진이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그러니까 매니저 형이 취업한 지 3달째였습니다. 너튜브에서 귀여운 아기가 인기가 많다고 하길래 매니저 형이랑 멤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너튜브 예능 이야기가 나왔죠. 그래서 연락을 해보니,
박서진은 지금 생각해도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매니저 형 조카였죠.
코코아엔터 사장의 조카가 이서준이라는 것은 브라운블랙과 이서준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짤막하게 [브라운블랙과 준의 48시간]의 영상이 흘러갔다. 놀이터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브라운블랙과 그걸 보고 있는 토끼 귀 모자를 쓴 아기, 그리고 곧 한 남자가 나타나 사인을 받고 사라졌다.
“저거 어그로라고 난리였지.”
“김수련 팀장님의 형부가 될 줄이야.”
“사람 인생은 진짜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그 무대가 나왔다. 브라운블랙이 데뷔했던 WTV 음악방송.
“지금 봐도 잘했네.”
“저땐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꽃가루가 터졌다. 앳된 브라운블랙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얼굴들에 서준이 작게 웃었다.
화면 속 황예준이 웃으며 말했다.
-먼저 출연하기로 했던 가수가 못 나오게 됐는데 여러 신인 중 저희가 올라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방송국에도, 브라운블랙에게도 최고의 선택이었다.
아직도 전설의 레전드로 남은 신인 아이돌의 무대.
케빈 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브라운블랙의 시작이었죠.
12월 첫 음악방송과 48시간 덕분에 브라운블랙은 유명해졌다. 팬들이 모이고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하고 가요대상을 받고.
화면 속에서 가요대상을 받으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형들을 보던 최시윤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12월 데뷔라서 신인상은 못 받았지만 말이에요.”
“그래도 다음 해에 바로 가요대상 받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신인상은 딱 한 번밖에 못 받는 상이라 아쉽긴 해요.”
코코아엔터가 망할 뻔했다가 서은찬과 이서준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고 다시 계약을 했다. 좋은 날이 연신 이어졌다.
화면 속 최시윤이 말했다.
-어느 순간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우리 실력의 한계인가 하고. 다들 말은 안 했지만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한계라고 생각했던 실력을 뛰어넘었다. 서로에게 맞춰주던 오케스트라에서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그룹으로.
-그때가 팬미팅 무대였거든요. 아마 팬분들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다큐가 시작하면서 과거 영상에서 보이던, 브라운블랙의 머리 위에 있던 숫자들이 팬미팅 이후 사라졌다. 화면 속 최시윤의 말에 서준이 빙그레 웃었다. 팬의 힘이라면 팬의 힘이었다.
‘나도 형들 팬이니까.’
그리고 브라운블랙은 15주년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데뷔할 때부터 좋아했다는 팬, 팬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엄청 좋아한다는 팬, 결혼식 때 브라운블랙의 노래를 불렀다는 팬. 브라운블랙의 팬으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는 팬들.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팬들의 인터뷰에 웃으며 다큐멘터리를 보던 브라운블랙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상기된 얼굴로 인터뷰하는 팬들의 모습을 보는 건 팬카페에 올라온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텅 비었던 콘서트장이 브라운블랙의 팬들로 가득 찼다. 모두 신이 난 게 화면 밖까지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는 자세히 볼 수 없었던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와아아아!
수많은 팬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브라운블랙의 뒷모습으로 다큐멘터리가 끝났다.
브라운블랙은 텔레비전 화면 속,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무대 위로 올라가는 자신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듯, 많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서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형들을 기다려주었다.
* * *
[브라운블랙 15주년 다큐멘터리 방송!]
[브라운블랙의 데뷔부터 15주년 콘서트까지!]
[브라운블랙,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운블랙,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MBS, 드라마 시청률 삼사 중 최저! 이대로 괜찮은가?]
-다큐 보면서 울었다ㅠ
-15년. 대단하네.
=22 15년 동안 큰 싸움 없이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계속 음악을 배워나가는 것도 대단함.
=이러다 기록 세우는 거 아니냐?
-브블 콘서트 가고 싶었는데!
=친구 따라서 가 봤는데 라이브 미침. 바로 팬 됨ㅎ
=티켓은 어떻게 구한 거야;;;
=진짜 좋은 친구를 뒀구나!
-전설의 레전드 무대는 지금 봐도 대단함.
=22 지금 봐도 이 정도인데 그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냐.
=그때 뒷무대에 올랐던 게 이스트…… 윙이던가?
=웨스트 윙임ㅎ
-MBS 드라마 재미없음
=22 이번에 새로 시작한 것도 별로더라. 맨날 똑같음.
“MBS 드라마 재미없음. 이번에 새로 시작한 것도 별로더라. 맨날 똑같음.”
MBS 드라마국.
국장의 차가운 목소리에 회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그제 새로 시작한 월화, 몇 퍼센트라고?”
“……2퍼센트입니다.”
“수목은?”
“3.6퍼센트입니다.”
“KBC 월화, 수목은?”
“21퍼센트, 16퍼센트…… 입니다.”
“허허. 월화는 10배나 차이가 나네?”
기가 찬 국장이 허허 웃다가 이마를 짚었다.
SBC 월화는 12퍼센트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6배 차이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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