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69화
처음 대본을, 붓을, 악기를 잡을 때 느꼈던 설렘을 기억하고,
점점 늘어나는 실력에 즐거웠던 하루하루를 떠올리고,
막막한 슬럼프에 절망하더라도.
마침내 찬란한 열매를 맺기를!
찬란!
여울홀을 가득 채운 바이올린 선율이 관객들의 몸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상을 통해 듣는 것과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달랐다. 선생님들과 ATR재단의 사람들마저 넋을 놓고 연주에 빠져들고 있을 때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또 늘었네.’
서준의 연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주 듣는 서은혜와 이민준만이 느긋하게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서준의 바이올린 실력은 부쩍부쩍 늘었다. 평소에도 메시지와 영상으로 제이슨 무어와 벤자민 모튼 교수와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여울홀을 가득 채우던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고 모두 잠시 말을 잊었다. 마음 벅찬 여운을 느긋하게 느끼고 싶었다.
턱에서 바이올린을 뗀 서준은 수많은 학부모 사이에서 엄마 아빠를 한눈에 발견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와 꽃다발을 안고 있는 아빠와 눈이 마주친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서은혜와 이민준도 그걸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
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고 무대 옆으로 향했다.
그제야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박수와 환호성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와. 장난 아니다.”
“옛날에도 한번 들었는데 오늘 박력 장난 아닌데?”
“으. 오늘 집에 가서 오버 더 레인보우 봐야겠다!”
“나도!”
이 감동을 그대로 집까지 가져가고 싶은 것은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석, 학부모석 할 것 없이 박수와 환호성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 *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서준을 음악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반겼다. 서준이 웃으며 음악 선생님께 바이올린을 건넸다.
“여기 있어요. 선생님.”
“연주 잘 들었어. 내 바이올린인데 느낌이 전혀 다르던데. 진짜 놀랐다니까.”
서준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은 음악 선생님이 감탄하며 말했다.
제법 오래 연주했던 바이올린이지만 그동안 자신이 연주했던 선율과는 느낌이 달랐다. 100%로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바이올린 속에 색다른 선율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음악 선생님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바이올린을 보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흐뭇한 얼굴로 서준을 보았다.
“서준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뒤늦게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담임선생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애들한테 멋진 추억이 될 것 같네.”
담임 선생님이 서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등학교 가서도 잘 지내렴. 작품도 기대할게.”
“네!”
담임선생님의 진심 어린 말에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그사이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방송이 나왔다.
[다음은 졸업장 수여가 있겠습니다.]
“이제 얼른 가 봐.”
“네.”
서준이 꾸벅 인사를 하고 여울홀 관객석으로 향하자 음악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흐뭇하게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졸업장 수여는 각 반 반장, 부반장만 받게 되었다.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 졸업장을 받는 동안 서준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연기과 3학년 2반의 자리는 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올. 이서준.”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거야?”
손은 박수를 치면서도 아이들의 입이 움직였다. 서준이 씨익 웃으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연기과 3학년 2반의 반장, 양주희와 부반장 강재한이 교장 선생님에게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선물이야. 다른 학교로 가는 애들도 있으니까.”
“멋진 선물이었어.”
일반고로 진학하는 친구의 말에 다른 아이들의 눈이 글썽글썽해졌다.
배우라서 그런가. 감수성이 남다르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서준의 눈동자도 촉촉하게 젖었다.
훌쩍이는 친구들을 다른 아이들이 달래주는 사이, 여울 예중 졸업식은 빠르게 끝나갔다.
[마지막으로 교가를 제창하겠습니다.]
여울 예중 학생들이 3년 동안 익숙해진 교가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부르는 교가였다.
* * *
졸업식이 모두 끝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여울홀 밖으로 나갔다. 일부는 교실로 일부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운동장에도 건물 내에도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서준아. 졸업 축하해.”
“고마워. 엄마 아빠!”
이민준이 건네주는 꽃다발을 안은 서준이 활짝 웃었다. 서은혜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깜짝 놀랐어.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이야.”
“그냥 마지막이라 다들 우울한 것 같아서 선생님한테 부탁했더니 괜찮다고 하시길래 했지.”
갑작스럽게 정해진 공연이었지만 지나다니는 친구들의 얼굴에 슬픔은 있지만 우울한 기색은 없는 걸 보니 괜찮은 이벤트였던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서준이 형!”
“서준이 오빠!”
서준을 부르는 소리에 서준과 부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두 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수빈이와 은수였다. 서준이 귀여운 동생들의 등장에 환하게 웃었다.
“수빈아! 은수야!”
수빈이와 은수가 서준에게 달려가 안기는 사이, 두 아이를 데려온 서은찬이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서은혜와 이민준에게 건네주었다. 서은혜가 웃으며 동생을 반겼다.
“왔어?”
“응. 졸업식은 언제 끝났어? 늦은 건가?”
“아니, 방금 끝났어. 딱 맞춰서 왔네.”
“카페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나길래 따라 나왔어.”
졸업식이 열리는 여울홀에 들어올 수 있는 가족은 2명이었지만 밖에서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다른 가족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은찬도 그 무리를 따라왔다.
“카페에서 오래 기다렸어?”
“아니, 10분 정도? 집에서 졸업식 마칠 시간에 맞춰서 나왔지.”
“잘했어.”
서은혜와 서은찬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서은혜에게서 카메라를 받아 든 이민준이 서준과 두 아이를 연신 찍었다.
그때, 이민준의 눈에 두 아이가 들고 있는 꽃다발이 들어왔다.
“수빈아. 은수야. 서준이 형한테 꽃다발 줘야지.”
제일 좋아하는 서준이 형(오빠)과 둥글게 둥글게 돌며 꺄르르 웃고 있던 수빈이와 은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과 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서준이 형! 졸업 축하해!”
“축하해!”
“수빈아, 은수야. 고마워!”
꽃다발을 받아 든 서준이 정말 기쁜 듯 활짝 웃자, 수빈이와 은수가 쑥스러운 듯 헤헤헤 웃었다.
그러다 금세 새로운 것에 정신이 팔리는 아이들의 눈에 서준이 입고 있던 교복이 들어왔다. 특히, 수빈이의 눈이 반짝였다.
“형. 이거 교복이지? 나도 교복 입을래!”
“수빈아. 교복이 뭔지 알아?”
“알아! 중학생 형들이 입는 거!”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수빈이에게 중학생은 까마득하게 높은 학년이었다.
“수빈아. 서준이 형은 이제 중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이야. 엄청 대단하지?”
“고등학생!”
장난기 넘치는 서은찬의 말에 수빈이의 눈이 반짝였다. 은찬이 삼촌의 말대로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이 더 대단해 보였다. 서준의 손을 붙잡고 놀고 있는 은수야 중학생이든 고등학생이든 다 똑같아 보일 뿐이었다.
“나도 교복 입을래!”
“음. 그럼 마이 입어볼래?”
“응응!”
수빈이 서준의 마이를 입었다. 커다란 서준의 마이에 수빈의 두 손이 가려졌다. 그럼에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수빈이는 헤헤 웃었다. 이민준이 얼른 휴대폰 카메라로 수빈이의 모습을 찍어 김희상에게 보내주었다.
“잘 어울리는데?”
“수빈이 바이올린 계속하면 여울 예중에 와도 되겠어.”
“그러게. 서준이 후배 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수빈이 초등학교 매실초 아니었어?”
“아, 그럼 벌써 초등학교 후배네.”
서은혜와 이민준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은찬이 카메라를 들었다.
“수빈아 은수야. 사진 찍자.”
“응! 김치!”
“김-치!”
서준의 마이를 입은 수빈이와 서준의 손을 꼭 잡은 은수, 그리고 세 개의 꽃다발을 품에 안은 서준이 활짝 웃었다.
* * *
“서준아. 친구들이랑 사진 다 찍었어?”
“응. 엄청 찍고 왔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빈이와 아직 유치원생인 은수가 서은찬과 함께 학교를 구경하는 사이, 서준은 친구들과 사진을 잔뜩 찍고 왔다. 아마 바나나톡을 보면 친구들이 보낸 사진들이 가득할 터였다.
“그럼 은수랑 수빈이도 지친 것 같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서은혜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잠들 것 같은 은수를 서은찬이 품에 안고 이민준은 김희상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수빈이에게 건네주었다.
“차 어디에 댔어?”
“저쪽에 유료 주차장 있더라. 거기 댔어.”
미리 차 하나를 타고 가자고 이야기를 나눴던 서은찬과 부부였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온 서은혜의 말에 서은찬이 대답했다. 모두 서은찬을 따라 교문 쪽으로 향했다.
가족들의 맨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가던 서준이 교문을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사진을 찍기 위해 남아 있는 가족들과 학생들이 보였다.
체육 시간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운동장이, 친구들과 함께 공연했던 여울홀이, 수업을 들었던 교실의 창문이, 점심을 먹었던 식당이, 연습실이 있는 건물이, 출석 일수로 자주 들렀던 교무실이,
“…….”
3년 동안 즐겁게 지냈던 여울 예술중학교가 보였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매실 초등학교에 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제 여울 예술중학교에 올 일도 없을 것이다. 벽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마나가 다 소모되더라도 마나가 충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어렸던 초등학교 졸업식 때보다 슬프진 않았지만 조금 가슴이 먹먹했다.
여울 예술중학교를 보며 그동안의 추억을 떠올리는 서준을 부부와 서은찬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여울 예술중학교를 이리저리 바라보던 서준이 이내 홀가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서은혜와 이민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모습에 서준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집에 가자.”
“그래.”
사람이 많아 회사에서 서준의 차를 가져온 서은찬이 운전대를 잡고 서은혜와 이민준은 지쳐 잠든 아이들의 옆에 앉았다. 곯아떨어진 은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안전벨트를 매던 서준이 서은찬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삼촌.”
“응? 왜?”
막 시동을 걸려던 서은찬이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서준을 보았다.
“나 오늘 바이올린 연주했어.”
“응?”
“영상도 찍혔어.”
“……응?”
냠냠 입맛을 다시며 잠자고 있는 딸, 은수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던 서은찬이 서준의 말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아, 나도 찍었어. 아직 안 봤는데 잘 찍혔으면 좋겠네. 지금 확인해 볼까?”
“그럴까?”
카메라를 꺼내는 서은혜의 모습에 서준과 이민준이 작게 웃었다. 그런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잠시 굳어 있던 서은찬은 허허 웃으며 시동을 거는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아직 연극 거울의 여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한번 코코아엔터가 난리 날 것 같았다.
* * *
[배우 이서준, 여울 예중 졸업!]
[졸업식에서 울려 퍼진 ‘오버 더 레인보우!’]
[오랜만의 공연! 이서준의 오버 더 레인보우!]
[배우 이서준, 바이올린 연주 직캠!]
-서준아! 졸업 축하해!!
-와. 남의 애들은 진짜 빨리 크는구나.
=22 이제 3월이면 벌써 고등학생.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성인.
=……진짜 빠르구나.
-오버 더 레인보우! 졸업식 영상 뜬다!
=이쪽저쪽 사방에서 찍었네!
=솔찍, 나라도 찍었다.
=채널 [JUN]에도 떴어!
=새싹부터에도 서준이 졸업사진 잔뜩 뜸!
=꽃을 든 서준이라니!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아이돌도 아닌데 직캠ㅎㅎ
=근데 웬만한 아이돌 영상보다 조회 수가 빨리 올라가ㅋㅋ
-영상이 많아져서 좋다. 연극에 바이올린 연주에.
=요즘도 가끔 버스킹 영상 보는데 이건 그레이 바이니 버전이 아닌 듯.
=222 이서준 버전인 듯.
=이런 분위기 차이 너무 좋다ㅎㅎ
=오랜만에 오버 더 레인보우+버스킹 정주행해야지!
-직접 들은 사람들 좋겠다.
=그러게. 게다가 여울 예중 학부모들은 연극도 직접 봤을 거 아니야!
=와…… 진짜 좋겠다.
* * *
“뭐 하고 있어?”
소은진 작가의 말에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보조작가, 유청아가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노트북이었다면 모니터를 덮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데스크톱이었다.
모니터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던 유청아가 이내 포기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작가님.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나 노크했다?”
유청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님이 들어오는 것도 못 알아채다니, 너무 집중했나 보네.’
여기는 작업실. 소은진 작가와 유청아와 다른 보조작가가 함께 쓰는 장소였다. 장난기 가득한 소은진 작가의 표정에 유청아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열었다.
“……보셨어요?”
“아니. 못 봤어. 글 같던데? 뭘 쓰느라 들어온 것도 몰랐어?”
유청아가 으악으악,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게…… 공모전하면 내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공모전? 공모전 하던 방송국이 있던가?”
소은진 작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아직 없는데 그냥 미리 준비해 놓게요. 급하게 적는 것보다 미리 준비하면서 퇴고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피드백 필요하지 않아?”
“……네?”
“현직 작가를 여기 놔두고 누구한테 조언을 들으려고.”
소은진 작가가 빙그레 웃자 유청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작가님!”
“얼른 프린트해서 가져와 봐.”
“넵!”
유청아는 작업실 프린트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대본을 소은진 작가에게 대본을 건네주었다. 자리에 앉은 소은진 작가가 유청아의 글을 읽었다.
소은진 작가에게 짧은, 하지만 유청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팔랑팔랑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유청아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대사를 읽던 소은진 작가가 웃었다. 그 담담한 미소가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몰라 유청아는 침만 꼴깍 삼켰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던 유청아는 다 읽은 대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은진 작가의 모습에 두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괜찮나? 아니, 별론가?’
긴장감이 가득한 표정의 유청아를 바라보던 소은진 작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졸업해도 되겠어.”
유청아 작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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