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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263화 (263/1,055)

0살부터 슈퍼스타 263화

깜깜한 암흑.

아까보다 시간이 조금 더 길었지만, 곧 조명이 켜졌다.

무대가 밝아졌다.

진료실에 있는 정채원은 컴퓨터로 무언갈 하는 중이었고 간호사도 제 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딸랑.

소리가 나고 무대 끝에 서 있던 서준이 병원 로비로 들어갔다. 서준은 어느새 김진우가 되어 있었다.

김진우는 제법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거즈가 붙어 있는 김진우의 볼을 보고 놀란 간호사가 이내 그런 기색을 없애고 입을 열었다.

“환자분. 조금 기다리셔야 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진우가 로비 의자에 앉았다. 로비 의자에 앉은 김진우는 진료실을 바라보는 형태라서 관객들은 김진우의 옆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김진우는 옆자리에 놓여 있던 책을 하나 들었다. 한쪽 뺨이 다친 것과는 달리 어쩐지 콧노래까지 부를 것처럼 가볍고 산뜻한 분위기였다. 책을 읽고 있는 김진우를 바라보던 간호사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팔랑.

종이가 한 장 넘어갔다.

그저 앉아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준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준의 연기에 푹 빠진 관객들은 정채원이 있는 진료실의 비추던 조명이 꺼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팔랑.

또 한 번 종이가 넘어갔다.

로비를 비추던 조명의 빛이 약해졌다. 그럼에도 서준을 비추는 빛은 여전히 빛났다.

팔ㄹ-

또 한 번 넘어가려던 종이가 멈추었다. 종이를 넘기던 김진우의 손이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임이 멈춘 김진우의 손과 함께 김진우의 고개도 힘이 빠진 듯 아래로 향했다. 어깨도 축 늘어졌고 그 어느 곳도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빠진 것 같았다.

분명 왜 움직이지 않냐고, 고개를 갸웃거려야 할 상황이었다. 옆 사람에게 조용히 ‘왜 저래?’ 하고 물어봐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서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도 열지 못했다. 누군가 고정해 놓은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서준에게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뭔가…….’

뭔가 있었다.

김진우의 움직임은 멈추었지만, 그의 안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여울홀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처럼 조용했다. 잔잔하게 흐르던 배경음이 멈추었지만, 관객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위, 서준을 비추었다.

가장 앞자리에 앉은 연기과 1학년들의 눈에 서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움직임이었다.

김진우의 검지손가락 끝이 움찔, 움직였다. 그 움직임마저 너무 힘들어 보였다. 검지손가락에서 시작한 움직임이 천천히 다른 손가락들로 옮겨졌다.

이내 뒷자리 관객들에게도 보일 정도로 움직임이 커졌다.

김진우의 팔이,

어깨가, 발이,

종아리가, 허벅지가,

고개가 움찔, 움직였다.

떨렸다.

홀로 켜진 조명 때문에 서준의 움직임은 관객들의 눈에 더욱더 잘 들어왔다.

세 감독이 그런 서준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서준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왼쪽에 자리를 잡은 최대만 감독의 카메라가 서준을 클로즈업했다. 카메라를 통해서 보는 서준의 연기는 좀 더 자세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대만 감독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김진우의 떨림이 격렬해졌다. 어떤 규칙도 없었고 모든 움직임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관객들은 깨달았다.

지금, 김진우의 몸 안에서 두 인격이 몸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 치열한 싸움의 승자는 누구일까.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김진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로비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선생님…….”

김진우의 흐릿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여울홀을 울렸다.

“선생님…… 선생님…….”

지친 듯, 울먹이는 미약한 목소리가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

관객들이 힐끗, 어두컴컴한 진료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지지 않는 무대에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김진우를 바라보았다.

굳었던 몸이 풀어지듯, 천천히 몸을 장악해 나간 김진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진우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잔뜩 지친 얼굴로, 꼭 죽어버린 듯 넋이 나간 눈빛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힘들어 보였다. 다 타버린 재처럼 힘겹게 움직이던 김진우가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저 여기 있어요…….”

겨우 한마디를 뱉은 김진우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여울홀을 울렸다.

관객들이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 그건…… 무슨 인격이지?

김진우? 아니면 다른 인격?

고민할 틈도 없이 로비의 불이 켜졌다. 진료실의 불도 켜졌다. 돌아온 간호사가 김진우를 진료실 안으로 안내했다. 잠든 듯했던 김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생생한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진우 씨.”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채원이 김진우에게 차를 건네며 질문했고 김진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채원이 반색했다.

“더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요. 잘됐네요.”

“네. 선생님이 주신 약이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그럼 이번 약을 계속…….”

딸랑!!

그때, 병원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두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간호사가 말릴 틈도 없이 진료실로 뛰어들어왔다.

“진우야!”

“김진우!”

오정환 역 강재한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왔고 김재운 역 전성민이 그런 오정환을 지탱해 주었다.

웃으면서 정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진우의 시선이 진료실로 들어온 두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주 잠깐 눈이 커졌던 김진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시죠?”

정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우가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남자를 소개했다. 두 남자는 김진우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아, 선생님. 이쪽은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다녔던 병원의 오정환 선생님입니다. 이쪽은 오정환 선생님의 지인분이신 김재운 형사님이시고요.”

정채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김진우가 볼을 긁적거리며 오정환과 김재운에게 다가갔다.

“선생님과 형사님께 말씀드린다는 게 늦었습니다. 정채원 선생님이 주신 약이 잘 들은 것 같아요. 이제 제법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빙그레 웃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김진우를 보던 오정환과 김재운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김재운이 오정환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다가오는 김진우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우당탕!

김진우가 쓰러지고 간호사의 비명이 들렸다. 관객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틀어막았다. 정채원도 놀랐지만, 얼른 맞은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김진우에게 다가갔다.

“진우 씨! 괜찮아요?! 진우 씨!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정채원의 고함에 오정환이 참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정환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거기 있는 건 진우가 아니라 2인격입니다.”

“네?”

“그 자식이 2인격이라고!”

오정환의 앞을 막아서고 웅크리고 있는 김진우를 경계하던 김재운 형사의 외침에 정채원이 몸을 굳혔다. 김재운 형사에게 맞고 쓰러진 김진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정채원은 두 남자와 웅크리고 있는 김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정환이 침착하게 설명했다.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상담하던 김진우가 2인격입니다. 진짜 김진우는 6개월 전부터 저와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

오정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2인격이 진우의 몸을 차지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진우는 그걸 알고 저에게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하겠다고 이야기했죠. 진우가 하는 일은 모두 알고 있는 2인격이니 그걸 알아채고 도망간 겁니다.”

놀란 정채원이 김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나한테…….”

“선생님을 이용해서 몸을 차지하기 위해서였겠죠.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것보다 당장 그 자식에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겁니다.”

김재운 형사의 말에 정채원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 오정환과 김재운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연약하고 순하던 진우 씨가 2인격이라고?

관객들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순하게 웃고, 다른 인격 모습에 덜덜 떨며 무서워하던 김진우가 2인격이라고? 김진우와 함께 다른 인격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관객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정말ㄹ……!”

탁!

커다란 소리가 여울홀을 울렸다.

다시 한번 물어보려던 정채원의 손목을 누군가 낚아챈 것이었다. 정채원이 몸을 굳혔다. 두 남자와 간호사는 떨어져 있으니 한 사람밖에 없었다.

얼굴을 얻어맞고 웅크려 있던 김진우의 손이었다.

그 한 동작으로 여울홀이 침묵에 잠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김진우’의 분위기가 여울홀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의 싸늘함이었다. 발끝부터 긴장감이 올라왔다.

웅크려 있던 김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김진우의 앞에 정채원이, 그리고 정채원의 너머에 관객석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김진우의 모습에 그와 마주 보게 될 관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내 고개를 든 김진우는,

웃고 있었다.

재미있는 듯. 아쉽다는 듯.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 새하얀 도자기 같았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구슬처럼 번들거렸다.

“들켰네?”

딱 한마디.

그 한마디에 관객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미지의 것을 만나는 듯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의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채원에게로 향한 김진우의 시선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놀란 정채원이 두어 걸음 물러섰지만, 김진우는 정채원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채원이 충격적인 상황에 몸을 떨었다.

정채원과 같은 충격을 받은 관객들도 숨을 죽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매만졌다.

잠시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오정환이었다. 이 분위기가 익숙한 듯 2인격을 바라보는 오정환과 김재운 형사의 시선은 차가웠다.

“진우는 어디 있습니까?”

“오랜만이야. 선생.”

“진우는 어디 있습니까!?”

“내가 진운데?”

“너 말고!”

김재운 형사의 외침에 김진우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김재운에게 맞은 뺨을 문질렀다. 뺨 위에 거즈가 붙여져 있었다.

“아프잖아. 하필 때려도 여길 때리냐.”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어디다 팔아먹은 모양인지 ‘김진우’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숨길 수 없는 악의가 흘러넘쳤다.

2인격이 됐을 때부터 사용한 능력 덕분이었다.

[(악)붉은 바다 세이렌의 노래-중급>>최하급]

붉은 바다에 사는 세이렌의 노래입니다.

노래로 대상을 조종합니다.

완성되지 못한 노래는 희미한 마기만 남깁니다.

노래가 아니라 대사라서 노래는 완성되지 못하고 마기만 남겼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김진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죽겠다고 칼을 들이대던 걸 어떻게 말렸는데. 내가 맞아보니까 내 주먹이 꽤 세더라고. 선생도 엄청 아팠겠어.”

오정환의 다리가 움찔 떨렸다.

“뭐, 그 덕분에 이 몸을 차지하게 됐지만 말이야.”

“……뭐?”

“설마 아직 남아 있을 줄이야. 게다가 그사이에 당신들한테 연락했을 줄은 몰랐어.”

서준은 대사를 하면서 천천히 존재감을 줄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의 시선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낄낄대고 있는 ‘김진우’에게서 바로 옆에 서 있던 정채원에게로 옮겨갔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 정채원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2인격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왔다.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관객들 말고는 무대 위 누구도 그런 정채원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공포에 사로잡힌 정채원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찻잔으로 향했다. 김진우에게 잡히지 않은 정채원의 손이 찻잔으로 향했다.

관객들의 눈이 커졌다.

김진우의 얼굴로 찻잔의 차가 쏟아졌다.

뜨거운 것 그대로 쏟아지자 김진우는 반사적으로 정채원의 손목을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고통 섞인 비명에 관객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차가운 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정채원이 정신을 차렸다. 풀린 손목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 이러려던 게…….”

“정채원! ……‘선생님’! 뒤로 물러서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간호사가 정채원과 김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정환과 김재운 형사도 얼른 달려가 김진우를 붙잡았다. 오정환이 김진우의 상처를 살피고 있는 사이 김재운 형사가 말했다. 그사이에도 힐끗힐끗 김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요.”

“……네? 네…….”

“진우는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다치는 쪽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인격이 워낙 공격성이 강해서…….”

김재운 형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입원하기로 했으니 이제 괜찮을 겁니다.”

“네…….”

끝까지 얼굴을 들지 못하고 끙끙 앓는 김진우는 오정환과 김재운 형사에게 업히듯 병원 밖으로, 무대 끝으로 사라졌다. 정채원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간호사가 전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공격 성향이 너무 강해서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간호사의 말과 멍하니 서 있는 정채원을 모습을 마지막으로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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