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56화
미리내 예고 실기 시험 대기실.
마지막 타임에 배정받은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호자는 대기실에 들어오지 못하는 터라 문 앞에서 긴장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여기 있어!”
“일찍 왔네?”
의자에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앉았다.
불안한 마음에 준비한 대본을 읽는 아이들도 있었고 긴장을 없애기 위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떠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이서준이랑 같이 시험 보려나?”
“그러게. 이서준 목격담 하나도 안 올라왔지?”
“응. 우리 앞타임 애들 중에도 이서준 본 애들은 없대.”
“그럼 우리 타임이겠네.”
학생 하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내 앞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 말에 두 학생의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소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게 왜?”
“앞사람이 잘하면 인상이 강하게 남잖아.”
“그렇긴 하지.”
두 학생의 대화에 대기실에 있던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서준이 연기하면 얼마나 인상 깊겠어. 바로 뒤에 하는 애는 제대로 해도 점수 잘 못 받을걸.”
“……설마 그럴까?”
“선생님들이 냉정하게 심사한다고 해서 아예 영향이 없진 않을 거야.”
두 학생의 뒤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번호 541번, 우재혁.
3년 전의 시험번호는 275번으로 274번 이서준의 바로 뒤였다.
실기 시험 이후 이서준은 여울 예중에 합격하고 ‘역逆’이라는 엄청난 영화까지 찍은 반면 우재혁은 여울 예중에서 떨어져 일반 중학교에 갔다.
‘물론 그게 이서준 탓은 아니지만…….’
마음 한구석에 원망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왜 하필 같은 학교에 지원해서, 왜 하필 같은 날 시험을 쳐서, 왜 하필 내 앞 순서라서.
하지만 그 원망도 곧 없어졌다.
너튜브에 여울 예중 합격자들의 영상이 업로드된 후였다.
원망이 쌓여가던 우재혁이 넋을 보고 볼 정도였다.
자신이 이런데 직접 두 눈으로 본 선생님들은 얼마나 놀랐고 충격을 받았을까. 우재혁 자신이 생각해도 바로 뒤에 아이가 얼마나 잘하든 저절로 비교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중학생이 되고 이런저런 작품의 오디션을 보면서 느꼈다.
이런 작은 연극의 오디션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아역 배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역 배우들 중에도 불합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제야 우재혁은 자신이 서 있는 세계의 살벌함을 깨달았다.
이 세계는 그랬다.
오디션을 보는 바로 앞사람이 아카데미 상을 받은 배우일 수도 있고 경쟁자로 떠오른 사람이 칸 영화제 수상자일 수도 있었다.
‘……그런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진 않겠지만 말이야.’
우재혁이 예외라면 예외일 탑 배우, 이서준을 떠올리며 허허 웃었다. 아마 입시가 아니라면 이서준과 함께 오디션을 볼 일도 없을 터였다.
그만큼 경쟁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거였다.
자신의 실력보다 대단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가득한 세계.
그래서 우재혁은 자신을 더욱 갈고 닦기로 했다.
‘상대가 이서준이라고 해도 묻히지 않게!’
그렇게 결심한 우재혁이었지만 미리내 예고의 접수가 시작되면서 마음 한편으로 열심히 기도했다.
‘아직 그 정도의 실력은 되지 않았으니까 제발 이서준이 내 뒤였으면!’
접수날 제일 먼저 지원서 냈는데 설마 실기 시험 순서를 랜덤으로 결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뒤에 남은 한 명이 이서준일 확률보다는 내 앞 20명 중에 한 명이 이서준일 확률이 높겠지.’
그래도 여울 예중 때처럼 바로 앞사람이 이서준은 아닐 터였다.
‘……아니겠지.’
우재혁이 초조함 탓에 좀처럼 읽히지 않는 종이를 억지로 읽으려고 하고 있을 때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끝나면 전화해.”
“네. 다호 형.”
보호자인 듯한 남자의 목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상 매체로 듣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목소리에 대기실에 있던 학생들이 고개를 들었다.
“헐. 이서준!”
이서준이었다.
진짜로 나타난 스타의 등장에 이서준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3년 전 보고 두 번째로 보는 우재혁도 입을 쩌억 벌렸다. 아이들의 멍한 반응에 빙그레 웃은 서준이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저기…….”
“응?”
서준의 가까이에 있던 학생 중 하나가 용감하게 서준에게 말을 걸었다. 오오!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혹시 수험번호 몇 번인지 물어봐도 돼?”
서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 542번이야.”
“! 그렇구나! 고마워! 아, 읽던 거마저 읽어!”
“? 그래.”
542번!
‘맨 마지막이구나!’
우재혁과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들 휴대폰을 들었다.
<이서준 왔음!
인터넷에 이서준 목격담이 뜨기 시작했다.
* * *
“안녕하십니까! 541번, 우재혁입니다!”
마지막으로 향해가는 실기 시험에 선생님들은 힘을 냈다.
솔직히 542번, 이서준은 합격이나 다름없어 진정한 실기 시험은 이 541번 학생이 마지막이었다.
잔뜩 긴장한 우재혁을 보며 부드럽게 웃은 1학년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하고 자유 연기 부탁할게요.”
“네!”
자기소개를 하면서 긴장을 푼 우재혁은 자유 연기를 준비했다.
‘내 점수가 이서준의 영향을 아예 못 받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녹화 중인 카메라를 보며 우재혁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청소년 연극 중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재혁을 보며 선생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연한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 잘했다. 선생님들은 점수 매기는 것도 잠시 잊고 우재혁의 연기를 봤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연기한 우재혁이 꾸벅 인사를 하고 시험장을 떠나자 선생님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점수를 매겼다.
“그러고 보니 이서준이 연기한 캐릭터를 하는 애들은 거의 없네요.”
“아마 다들 알아차렸나 봅니다.”
3년 전, 여울예중에 합격한 아이들의 너튜브 영상을 보면 신기하게도 ‘이서준’이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연기를 한 아이들은 없다는 것을.
“이미 완벽한 답이 있는데 다른 연기를 보여줘도 모자라 보일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연기하는 애들은 고집이 센 건가. 보는 눈이 없는 건가.’
실력을 보면 둘 다인 것 같았다.
단종과 고주원을 연기하던 수험생들을 떠올린 선생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해석이라고 해도 ‘이서준의 연기’와 비슷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어지간한 점수는 얻기 힘들죠.”
그리고 이제 완벽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서준’의 차례였다.
* * *
“542번. 들어오세요.”
“네.”
서준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학생까지 모두 점수를 매기고 마음이 편해져 조금 풀어져 있던 선생님들은 들어오는 서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폈다.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 얼굴을 굳히고 있었지만, 눈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심사위원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2분가량의 아주 짧은 연극을 보러온 관객의 자세였다.
“안녕하세요. 542번, 이서준입니다.”
미리내 예고 마지막 수험생이면서 선생님들도 서준도, 다른 수험생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는 확실한 합격생이었다.
“자기소개하고 자유연기 부탁할게요.”
2학년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전 오후 심사로 쌓였던 피로감마저 날아간 듯한 미소였다. 다른 두 선생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네.”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자기소개를 했다. 여울 예중 실기 때보다 조금 길어졌다. 연기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은 비슷했지만 받은 상과 출연했던 작품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작품들과 수상내역에 세 선생님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이게 겨우 16살짜리의 경력인가 싶었다.
“그럼 자유연기 시작하겠습니다.”
서준의 말에 선생님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번에도 여울 예중 실기처럼 긴장감 넘치는 연기일까, 아니면 쉐도우맨의 진 나트라처럼 서늘한 악역 연기일까. 세 사람 모두 숨을 죽이고 앞에선 서준만 바라보았다.
혈색 좋던 볼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떨리는 눈동자, 평소처럼 보이기 위해 애써 올린 입꼬리. 그러나 속은 타들어 갔다. 소년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너 윤선우 좋아하지?”
소년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흠칫 놀라는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떨리지 않도록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결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아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냐.”
단호한 목소리였다.
“유정이 넌 윤선우를 좋아해.”
놀라는 나유정을 소년은 따뜻한 눈으로, 상처 입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윤선우가 기쁘면 너도 기쁘지? 윤선우가 슬프면 너도 슬프고. 윤선우가 네 손을 잡으면 심장이 너무 뛰어서 고장 날 것 같고 윤선우가 등을 돌리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의아해하는 나유정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항상 나유정에게만 보여주던 미소를 힘겹게 유지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결국 무너져내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 아이는 알아채지도 못하는 걸까. 그 정도로 나유정의 신경은 온통 윤선우에게로 쏠려 있다는 것이었다.
꽈악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에 소년은 힘겹게 내뱉었다. 항상 소녀를 향해 짓고 있던 미소를 잊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나유정의 든든한 친구가 말했다.
“지금 바로 가. 윤선우 아직 공항일 거야.”
소년의 시선이 고맙다고 말하고 떠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좇았다. 달려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희미해질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소년의 시야가 흐려졌다.
참고 참았던 고통이, 슬픔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러니까.”
겨우 한마디를 내뱉는데 턱이 덜덜 떨렸다. 눈물로 창백했던 볼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소년은 나유정이 떠나가고 나셔서야 겨우 숨겨왔던 제 속을 토해냈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그렇게 고백했다.
“……네가 웃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 네가 슬프면 하루종일 슬프고 네가 기뻐하면 하루종일 기뻐. 네가 내 손을 잡으면 심장이 너무 뛰어서 고장 날 것 같고 네가 등을 돌리면 심장이 짓밟힌 것처럼 아파.”
소년이 제 심장께를 힘껏 붙잡았다. 무수하게 잡힌 옷의 주름만큼 소년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금도, 지금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고 붙잡고 싶었다. 몇 번이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욕심낼 생각은 없으니까…….”
윤선우도 나유정을 좋아하니 자신만 포기하면 해피엔딩이었다.
소년은 나유정만 행복하면 만족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딱 한 번만.”
눈물을 흘리던 소년은 떠올렸다.
찬란하고 빛나던 그 미소.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던 그 미소.
윤선우를 향해 짓던 나유정의 미소.
“나한테도 그렇게 웃어줘.”
창백한 볼을 따라 흐르던 눈물이 턱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감사합니다.”
다시 혈색 좋은 얼굴로 돌아온 서준이 미리 준비해 온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소년이 순식간에 시험을 치러온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평범한 소년은 아니지.’
첫마디부터 넋을 놓고 보던 세 선생님이 서준의 말에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어, 네. 수고했어요. 나가도 돼요.”
꾸벅 인사를 하고 시험실 밖으로 나가는 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 선생님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진짜 좋아하는 애 있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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