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43화
독서 토론이 끝나고 주희는 녹음 파일을 아이들의 휴대폰으로 보냈다. 서준은 토론을 하는 동안 느꼈던 감상을 적은 공책을 챙겼다. 이제 필기한 것과 녹음본을 잘 정리하면 여름방학 숙제 중 하나가 끝나는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끝났네.”
“다들 준비를 잘해와서 그렇지.”
“근데 아까 북콘서트 이야기는 뭐야?”
주경의 물음에 아이들의 시선이 서준에게로 쏠렸다.
“서점에서 책 보고 있었는데 출판사 직원분이 북콘서트 하는데 보러 오겠냐고 묻더라고. 재밌을 것 같아서 보고 왔어. 점심 먹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해서 못 먹었지.”
“왜 그런 시간에 북콘서트를 했대?”
그거야 망하기 일보 직전의 책이라, 그 시간이 아니면 장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지만 서준과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책을 좋아하는 재한이 눈을 반짝였다.
“작가는 누구였어? 내가 아는 작가님인가?”
“이번 책이 데뷔작이래.”
서준이 가방에서 [거울]을 꺼냈다. 표지에는 최다예 작가의 사인이 검은색 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재한이 얼른 책을 받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신인 작가님이구나. 책은 어땠어?”
“재미있었어. 사인도 받았고.”
서준이 재밌게 읽었다는 이야기에 다른 아이들도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이 책을 살펴보고 있는 동안 지호는 재빠르게 검색창에 거울을 검색했다.
“인터넷에는 후기가 없네.”
“그렇게 유명한 책은 아닌가 봐.”
“음. 근데 줄거리는 재미있을 것 같아. 서준아, 책 좀 빌려줄래?”
지호가 보여준 줄거리에 흥미가 생긴 듯 재한이 물었다.
“그래.”
어차피 사인본은 놔두고 각색할 때 볼 책을 하나 더 사려고 했다. 게다가 출판사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다호 형에게도 미리 보여줘야 했다.
서준의 대답에 재한이 활짝 웃으며 [거울]을 가방 속에 챙겼다.
“그럼 이제 뭐 하러 갈래?”
오늘 모인 이유인 독서토론이 모두 끝났지만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아쉬웠다. 주희의 말에 지호가 손을 들었다.
“방탈출 하러 가자. 요 앞에 새로 생겼더라. 테마도 다양하대.”
그새 검색한 모양인지 지호의 휴대폰 화면에는 방탈출 홈페이지가 떠 있었다. 여러 테마 중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어…… 이거?”
“아하하하. 이게 뭐야?”
“우리 이거 해보자!”
좀비를 테마로 한 방탈출 게임.
이름은 [이스케이프].
익숙한 이름에 서준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서준의 매니저, 안다호는 여름 방학이 되고 학기 중보다 이른 시간에 서준의 집에 방문했다.
“다호 형. 이거 읽어볼래요?”
여느 때처럼 대본이 든 상자를 내려놓은 안다호는 서준에게서 책 한 권을 받았다.
[거울]
[저자 : 최다예 / 출판사 : 영웅]
최다예 작가에게 받은 사인본은 재한에게 빌려주었고 안다호에게 준 책은 친구들과 헤어진 후 서점에 가서 새로 산 책이었다.
‘너무 안 팔려서 재고가 한 권밖에 없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창고에 책이 없었거나 그사이 팔렸으면 오늘 다호 형에게 못 보여줄 뻔했다.
“웬 책이야?”
안다호가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 서준은 안다호가 가져온 시놉시스와 대본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6개의 대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서준이 가장 위에 있는 대본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 졸업 공연 신청했잖아요.”
“그랬지.”
졸업 공연 때 무대에 올릴 작품을 찾는 서준을 돕기 위해 안다호와 2팀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찾고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 공개된 작품부터 대학로에 묻힌 작품들까지 열심히 찾아다녔고 지금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이걸로 하고 싶어요.”
“이 책으로?”
“네. 재미있더라고요.”
서준의 말에 안다호는 복잡한 심경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안다호와 2팀이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서준이 먼저 발견한 것이었다. 매니저와 소속사로서 할 일을 못 했다는 미안함과 이제라도 찾게 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잠시만. 2팀에 연락 좀 할게.”
서준의 마음에 들 연극 대본을 찾아 대학로를 떠돌고 있을 불쌍한 직원들을 한시라도 빨리 복귀시켜야 했다.
-네. 안 팀장님.
“서준이 졸업 공연 때 할 작품 찾았으니 다들 복귀하라고 하세요.”
-어? 안 팀장님이 찾으셨어요?
-와!! 찾으셨대요?!
-역시 안 팀장님은 다르시네요! 어떻게 서준이 취향을 딱 알고 찾으셨대!
-오늘 파티할까요?
휴대폰 건너 2팀 직원들의 시끌벅적한 환호는 서준에게까지 들렸다. 안다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준이가 찾았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떠들썩했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진 2팀 직원들의 목소리에 서준은 웃고 말았다. 전화를 끊은 안다호에게 서준이 말했다.
“누가 찾으면 뭐 어때요.”
“아니지. 이건 매니저와 전담팀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야. 저번에 이스케이프랑 역 추천하고 네가 골랐을 때 2팀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를걸.”
“그래요?”
그것참.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 매니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다호 형에겐 미안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있잖아요. 다호 형.”
“응?”
“작가님이랑 출판사 직원분한테 물어봤거든요. 작가님은 허락하셨는데 출판사에서 회의해야 한대요.”
자리에 앉아 막 [거울]을 펼쳐서 읽으려던 안다호는 작가의 허락을 얻는 2팀의 일까지 빼앗아 버린 서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데굴데굴 눈을 굴리고 있는 서준을 보던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출판사 허락을 못 받아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젠 아예 2팀 일까지 하려는 거야?”
“아하하하.”
섭섭함 반 어이없음 반.
안다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에 서준이 하하하 어색하게 웃자 결국 안다호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판사는 언제 갔었어? 작가님은 언제 만났고?”
“출판사에 간 건 아니고요.”
서준이 서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서준과 책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를 듣던 안다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면 그냥 서준이한테 작품들이 찾아오는 것 같은데?’
마치 작품들이 자신을 가장 빛내줄 배우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참 운도 좋다. 어떻게 그렇게 만나?”
“아하하하.”
서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생의 도서관에서 능력을 찾아놓길 잘했지.’
[(선)민들레 홀씨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찾게 돼서 다행이네.”
늦게 찾으면 늦게 찾을수록 서준과 함께 무대에 오를 배우들의 연습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고 걱정하던 서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제 배우들도 모으고 무대 소품이랑 음악도 골라야 하지?”
“배우들은 2학기 개학하면 바로 모을 계획이에요. 배역이 적어서 빨리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텐데?’
서준한텐 전하지 않았지만 코코아엔터로 서준의 졸업 공연의 작품이 뭔지 물어보는 전화가 여러 번 왔었다.
‘여울 예중 1학년은 보조만 하니, 2학년이나 3학년의 학부모겠지.’
아니면 학원 관계자일 수도 있었다.
서준이 졸업 공연을 신청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작품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일찍부터 배역을 연구해서 자신의 아들, 딸, 제자가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것일 터였다.
여울 예중의 연기과 2학년, 3학년은 80명 정도. 아마 최소 그중 반은 서준의 졸업 공연에 지원할 것 같다는 게 2팀의 의견이었다.
‘지금 말하긴 좀 이르고…… 개학하기 전에 말해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안다호는 눈을 반짝이며 계획을 늘어놓는 서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대 배경이랑 소품, 음악도 정해진 게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골라야 해요. 음악은 책 읽으면서 떠오른 게 있긴 한데 그게 연극에도 어울릴지는 모르겠어요.”
원작이 있다는 점만 빼면 이번 연극은 새하얀 백지 같아서 서준이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해야 했다.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게 많다는 건 단점이기도 했고 장점이기도 했다.
‘힘들겠지만 재미있을 거야.’
어떻게 무대를 꾸밀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준은 즐거워졌다.
“직접 각색할 거야?”
원작이 소설이니 연극 대본의 형식으로 바꿔야 했다.
길고 긴 문장을 지문과 대사를 구분하고 소설의 이야기를 좀 더 연극에 어울리도록 바꾸고 압축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연극에 어울리도록 배치해야 했다.
안다호의 물음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름방학 동안 직접 해볼까 싶어요.”
“여름방학이라. 시간은 넉넉한 것 같네.”
“대본도 많이 봤고 원작도 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창작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아요. 조언 들을 곳도 많고요.”
감독님들도 있고 작가님들도 있고. 여차하면 바람 극단에 물어볼 수도 있었다.
“알았어. 일단 읽어보자.”
“네.”
안다호가 천천히 [거울]을 읽는 동안 서준은 6개의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음.’
연극 무대를 연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대본을 읽는 서준의 시선도 바뀌었다.
재미없는 줄거리나 군데군데 튀는 대사들에 평소라면 금세 덮어버렸을 대본들이었지만 이야기보다는 각 장면의 연출에 더 눈이 갔다.
‘이것보단 이게 낫지 않나?’
서준은 펜을 들어 대본 제일 첫 장에 줄을 주욱 그었다.
지금까지 봐온 영화와 드라마가 있으니 대본만으로도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다.
풀샷을 클로즈업샷으로 고치고 격렬한 캐릭터의 감정표현을 숨기고 확실히 드러난 범인의 모습을 희미하게 암시했다.
그렇게 열다섯 장을 수정한 뒤, 처음부터 읽어본 서준은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엉망이네.’
다시 보니 엉망이라 웃음만 나왔다. 완벽하진 않지만 제 나름대로 완성된 그림 위에 낙서한 것 같았다.
‘하긴. 스토리는 생각도 안 하고 장면마다 잘 어울릴 것 같은 연출을 쑤셔 넣었으니……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어.’
간간이 긴장감을 풀어주는 강약중강약도 아니고 보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은 강강강강의 연출에 쓰게 웃은 서준이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펜 끝으로 대본의 몇몇 군데 찍던 서준은 이내 턱을 괴고 빙글빙글 펜을 돌렸다. 아무래도 연출자마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 달라서 더욱 고민이 됐다.
“음.”
“마음대로 안 돼?”
책을 읽는 도중에도 서준이 뭘 하는지 살펴본 안다호가 웃으며 물었다.
그동안 봤던 작품들과 대본들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걸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볼을 긁적인 서준이 씨익 웃었다.
“뭐, 하루 만에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그래. 천천히 해. 시간도 많은걸.”
“네.”
다시 대본에 펜을 댄 서준이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듯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몇 장을 넘겼다가 다시 첫 장을 펼친 서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영화의 대본이지, 연극 대본이 아니었다.
오른쪽에서 찍고 왼쪽에서 찍고, 풀샷으로 찍고 클로즈업 샷으로 찍고 다 찍은 후에 편집으로 이리저리 붙이는 영화와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서 앞에 앉아있는 연극의 연출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호 형.”
“응?”
“지금까지 보여준 연극 대본 있죠?”
“응. 회사 창고에 있지.”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공연의 작품을 찾기 위해 모아둔 연극 대본이 한두 개던가. 그중 서준의 마음에 드는 몇 개를 빼고는 전부 코코아엔터 창고에 있었다.
“그것 좀 가져다주세요.”
“전부?”
“아니요. 소설이 원작인 거만요.”
“그래. 알았어.”
안다호가 2팀에 연락하는 사이, 서준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대본들을 살폈다. 서준이 재미있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영화, 드라마, 연극 등의 대본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서준은 그중 무대 연출이 마음에 들었던 연극의 대본들을 꺼냈다.
소설이 원작인 연극 대본을 보고 어떻게 각색했는지 분석하고, 마음에 드는 연극 대본을 보고 알맞은 연출이 뭔지 분석하면 [거울]의 각색도 잘할 수 있을 터였다.
연극 대본을 하나하나 고르는 서준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 연극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4일 후.
2차 판권과 관련 법률, 너튜브 공개로 인한 긍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 연극으로 인한 책의 홍보 효과 등을 고려해 코코아엔터 이서준 전담 2팀은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계약서가 나오고 나서야 이서준의 매니저, 안다호는 [거울]의 출판사, 영웅의 직원, 김형원에게 연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