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36화
“아버지.”
침대에 누워 있는 창백한 남자를 보던 소년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남자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당신의 행복을 모조리 망가뜨리고 싶어요.”
소년의 손에 잡힌, 튤 나트라의 손가락이 꿈틀댔다.
“그러니, 내게 전부 주세요.”
소년, 진 나트라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진 나트라의 의지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당신의 나라도.”
벽에 걸려 있던 나트라의 국기가 새까만 그림자에 삼켜졌다.
“당신의 자리도,”
왕의 침실이 어둡고 깊은 그림자에 천천히 잠겨갔다.
“당신의 힘도,”
침대의 사방에서 잠식해 오던 검은 그림자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튤 나트라를 향해 다가갔다.
“전부.”
검은 그림자가 튤 나트라를 덮쳤다.
둥!
둥!
스크린은 기이하게 꿈틀대는 그림자와 진 나트라의 뒷모습을 비추다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 * *
지하신전의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고개를 휙 돌리는 기사들의 시선을 따라 계단 쪽을 비추었다.
둥!
진 나트라의 OST가 흘러나왔다.
모래 빛 돌로 만들어진 계단 위로 검은색 구두가 나타났다. 카메라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관객들의 고개도 따라 위로 향했다.
둥!
검은 정복을 입은 차가운 얼굴의 진 나트라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앞 영상보다 훌쩍 자란 모습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저 걷는 모습일 뿐인데도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이미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신전 기사들이 진 나트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관객들까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차가운 기사들의 시선에 관객들이 진 나트라가 겪은 냉대와 차별을 생각,
쿵!
할 틈도 없이 기사 하나가 벽으로 처박혔다.
!!
지금 그림자로 발목을 잡고 내던졌지?!
인정사정없는 진 나트라의 공격에 관객들이 식겁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두 손으로 막는 관객도 있었다.
명백한 공격 의사에 기사들이 일제히 그림자로 창과 검을 만들어냈다. 날카로운 새까만 날들이 진 나트라를 향했다. 진 나트라의 그림자가 파도처럼 기사들을 덮쳤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무기는 진 나트라에게 닿지도 못했다. 쾅! 기사 하나가 또다시 벽으로 내던져졌다.
오.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저 기사분이 부디 무사하길 바랐다.
신전 기사들을 쓰러뜨린 진 나트라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제단으로 향했다.
새하얀 타임스톤이 떠올라 있었다.
진 나트라가 아래로 손을 뻗자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검으로 변했다.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은 진 나트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새하얗게 빛나는 타임스톤을 찔렀다.
“윽!”
검 끝이 조금밖에 박히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새하얀 타임스톤에서 방어하듯 새하얀 에너지를 뿜어냈다. 진 나트라의 머리카락과 망토가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펄럭였다.
세찬 바람과 눈 부신 빛에 두 눈을 가늘게 뜬 진 나트라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반발력에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이 뒤로 밀려날 것 같았던 진 나트라는 오히려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진 나트라의 그림자가 진 나트라의 다리와 등을 지지했다.
“으윽!”
신전을 가득 채우는 새하얀 빛과 쐐기처럼 파고드는 검은 그림자.
격렬한 액션 장면이 아닌데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던 두 존재의 싸움은,
쨍강!
진 나트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나트라 왕궁의 알현실.
부복하는 나트라인들을 바라보던 진 나트라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스치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에 박성아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무섭긴 한데 신기하게도 진 나트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빌런인데 뭔가 기품이 있달까.’
박성아는 집무실에 앉아 일을 처리하는 진 나트라를 바라보았다. 곧바로 무슨 일이든 벌일 것 같았던 진 나트라는 의외로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레드 타임스톤을 찾아 우주를 떠돌던 벨 나트라가 나트라 왕성에 온 것은 그쯤이었다.
“나 왔어! 어? 유모. 오랜만에 보니까 좀 늙은 것 같네?”
“아이고. 벨 님!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벨 님이 안 계시는 사이에 큰일이 났어요.”
시녀장은 쓰러진 튤 나트라 왕과 그 자리를 차지한 진 나트라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도 진 나트라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 그때부터였다니까요.”
벨 나트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듣다가 튤 나트라를 지키는 기사단장을 불렀다.
“아버지가 쓰러졌다고? 진이 자리를 차지하다니 무슨 소리야? 다른 후계자 후보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
기사단장의 얼굴에도 보이지 않던 주름이 생겼다. 그 기이함에 벨 나트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침음성을 흘린 기사단장은 고위급 인사들만 아는 진짜 이유를 말했다.
부서진 타임스톤.
강해진 진 나트라.
그리고 그림자의 일부를 빼앗기고 일반인이 된 후계자 후보들.
“튤 전하께서 강제 전승을 당한 게 아닌ㄱ…….”
“진이 그럴 리가 없잖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벨 나트라는 왕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튤 나트라를 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말라 있는 튤 나트라는 과거 근엄했던 왕이 아니었다.
진이 진짜 그럴 리가 없나?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간단한 치료만 이어나가고 있는 아버지를 본 벨 나트라의 믿음에 금이 갔다.
“……유모. 도와줘.”
“예. 벨 님.”
튤 나트라를 자신의 우주선에 실은 벨 나트라는 왕성을 잠시 바라보다 출발했다. 얼마 후 나트라 우주선들이 벨 나트라를 쫓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공격에 벨 나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이제 어떻게 하죠?”
치료캡슐에 누워 있는 튤 나트라를 바라보며 벨 나트라는 눈물을 삼켰다.
해가 높이 떠 있는 푸른 하늘 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벨 나트라의 우주선을 바라보던 진 나트라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2시간 안에 잡지 못하면 돌아와라.”
잠시 후, 노을이 지는 하늘에 수십 대의 우주선이 일제히 날아올라 벨 나트라의 우주선을 공격했다.
진 나트라는 공격당하는 벨 나트라의 우주선과 선왕의 딸을 공격하는 우주선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우리 꼬마 진은 이제 없어……!’
쉐도우맨 시리즈를 보면서 귀여운 꼬마 진 나트라를 사랑하던 관객들이 냉소를 짓는 빌런 진 나트라의 모습에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튤 나트라와 벨 나트라는 쫓아오는 나트라군을 피해 지구로 숨어들었다. 부녀가 의지할 곳은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쉐도우맨, 맥뿐이었다.
세 가족은 서로 어색함을 풀려고 노력했다. 튤 나트라의 몸을 치료하면서 벨 나트라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평소와도 같은 어느 날 경보음이 울렸다.
“나트라 전함이야.”
스텔스모드로 존재감을 숨긴 나트라 전함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어디에?”
“모르겠어. 통신이 연결되지 않아서…….”
쉐도우맨과 벨 나트라는 경계심을 한껏 돋구었다. 화면 속 곧 거대한 전함에서 작은 우주선들이 쏟아져나왔다.
벨 나트라의 능력이 뛰어난 건지 아니면 ‘누군가’ 막지 않았기 때문인지, 벨 나트라는 손쉽게 나트라의 목적지를 알아냈다.
커다란 홀로그램 지구본에 나타난 목적지를 본 쉐도우맨이 입을 열었다.
“프랑스야.”
곧 벨 나트라의 우주선이 위로 떠올랐다. 떠나는 두 사람을 이제는 걸을 수 있는 튤 나트라가 배웅했다.
* * *
프랑스 파리.
에펠탑이 보이는 푸르른 마르스 광장에 나트라 전함이 나타났다.
“진 나트라!”
“왔네. 히어로.”
코앞까지 닥친 히어로의 등장에 진 나트라가 부드럽게 웃었다. 진 나트라의 볼을 반쯤 채운 검은 나뭇가지가 핏줄처럼 보였다.
어? 저게 뭐지?
관객들이 진 나트라의 볼에 생긴 검은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쉐도우맨과 진 나트라가 부딪혔다.
일방적으로 막기만 하는 쉐도우맨과 공격하는 진 나트라. 간간이 클로즈업되는 쉐도우맨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맴돌았다.
“윌리엄.”
“말했을 텐데. 내 이름은 진 나트라라고.”
두 사람 사이에 바람이 불었다.
떨어져 있던 우주선이 지상 가까이 내려왔다. 우주선의 입구가 열리고 기사들이 내려와 쉐도우맨을 포위했다. 진 나트라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그림자 안에 넣어두고 뒤를 돌았다.
공격할 것만 같았던 기사들은 웜홀 생성기를 지키듯 움직이지 않았다.
“진 나트라가 이동하고 있어! 쫓아가자!”
“……그래.”
쉐도우맨이 벨 나트라의 우주선에 올랐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려던 쉐도우맨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낯선 얼굴에 몸을 흠칫 굳혔다.
“……이 사람은?”
“진이 데리고 있던 학자. 웜홀 생성기 옆에 있길래 데려왔어.”
“……벨 님이 억지로 끌고 오셨죠.”
“진이 뭘 하려는지 파악해야 하니까.”
뭘 하고 있나 했더니.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벨 나트라다운 행동에 쉐도우맨이 작게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벨 나트라는 또다시 ‘누군가’가 일부러 약하게 만들어놓은 보안을 뚫고 진 나트라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래서 윌리엄은 뭘 할 생각인 거야?”
“윌…… 리엄요?”
“……진 나트라 말이야.”
쉐도우맨의 질문에 학자는 턱을 긁적이며 설명했다.
“진 님은 웜홀 생성기를 이용해서 지구와 나트라를 충돌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웜홀의 크기가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지구와 나트라는 서로의 중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중력이 약한 행성의 땅덩어리가 중력이 더 센 행성으로 넘어가는 거죠.”
지구와 나트라의 충돌.
쉐도우맨과 벨 나트라가 침을 꼴깍 삼켰다.
관객들도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에 마른 침을 삼켰다.
“결국에는 중력이 약한 쪽은 웜홀에 휘말려 조각조각 나버리고 중력이 강한 쪽은 웜홀에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땅덩어리 때문에 파괴될 겁니다.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요.”
“그게 가능해?”
“웜홀의 크기를 늘릴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진 님에게는 그 에너지원이 있죠.”
“……타임스톤!”
벨 나트라의 비명과도 같은 대답에 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각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 그런 걸 만든 거야?!”
쉐도우맨의 말에 지금까지 가벼운 투로 말하던 학자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알고 나서는 막으려고 해봤지만 진 님은 나트라인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막으면 돼?”
“설치해야 할 웜홀 생성기는 3개입니다. 에너지원을 제거하거나…… 기계를 부수면 됩니다.”
뒷부분에선 말을 조금 흐린 학자였지만 벨 나트라와 쉐도우맨은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다음 목적지는 여기야!”
우주선 가운데에 나타난 홀로그램 지구본 위로 목적지가 떴다.
익숙한 대륙 옆 빛나고 있는 반도가 보였다.
[KOREA 한국]
그 자막에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나오는구나!
벨 나트라의 우주선이 진 나트라의 우주선을 뒤쫓는 사이, 벨 나트라를 목격한 병사들이 동요했다.
“지구인인 진 님보다야 벨 님이 낫지.”
우주선에 탄 병사들과 하급기사들이 벨 나트라를 공격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 지구인인 진 나트라를 제일 싫어하던 게 상부였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타임스톤 일을 모르는 하급기사들이 우주선을 돌려 벨 나트라에게로 향하려고 했다.
“공격해.”
진 나트라의 명령에 상급기사들이 이를 악다물고 부하들의 우주선을 겨누었다.
프랑스에서 한국까지의 하늘이 전쟁터가 되었다.
벨 나트라의 편으로 돌아선 우주선들과 진 나트라의 우주선들이 서로를 공격했다. 새까만 우주선들이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파괴되고 파괴했다.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는 화려한 전투 장면에 관객들이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를 벨 나트라의 우주선이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콰앙! 바로 옆에서 우주선 하나가 터졌다. 공격에 적중당한 또다른 우주선 하나가 바다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화면으로 보고 있던 벨 나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갈래?”
“아니, 이게 더 중요해.”
벨 나트라는 멈추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벨 나트라의 우주선이 빠른 속도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벨 나트라의 굳은 표정을 비추던 카메라가 벨 나트라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일직선의 넓은 광장과 두 개의 동상, 그리고 높은 건물들이 있는 도시가 보였다.
헉!
드디어 나온 한국의 모습에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광화문 광장이었다.
스크린에 나온 광화문 광장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다들 신기하게 광화문 광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쾅!
벨 나트라의 우주선 옆으로 우주선 하나가 스쳐 지나가 건물에 처박혔다.
!
관객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쥐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건물이었다. 월요일 출근 때마다 외계인이나 쳐들어오지 않나, 속으로 빌었는데 진짜 쳐들어왔다.
광화문 광장 하늘 위에서도 두 진영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선들이 여기저기 처박혔다.
건물들이 파괴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익숙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전투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이 눈을 부릅떴다.
어, 어……!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떨어지는 우주선의 모습에 관객들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우주선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콰아앙!
큰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먼지 안도 뚫어볼 정도로 노려보던 관객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반쯤 부서진 우주선은 세종대왕 동상 바로 옆에 처박혀 있었다.
‘이거…… 심장에 안 좋아……!’
이미연과 박성아가 흐느적흐느적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벨 나트라는 그 격전지를 피해 진 나트라의 함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근정전 위 진 나트라의 우주선이 떠 있었다.
드디어 나온 광화문과 뒤 궁궐들에 관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익숙한 경복궁 위에 우주선이 떠 있는 모습은 생소하면서 신기했다.
벨 나트라의 우주선이 땅에 처박히듯 착륙했다. 광화문 내에 있던 매표소가 우주선에 깔렸다.
“이런……!”
근정전 위로 파란빛이 솟아올랐다. 작동을 시작한 웜홀 생성기에 벨 나트라와 쉐도우맨은 우주선 밖으로 뛰쳐나갔다.
쉐도우맨과 벨 나트라는 달려드는 기사들과 병사들 거침없이 쓰러뜨리고 흥례문을 통과해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근정전.
계단 위에 진 나트라와 웜홀 생성기가 있었다. 우주선 하나가 경회루 연못에 처박혀 물보라가 일어났다.
“진 나트라!!!”
쉐도우맨의 목소리가 근정전을 울렸다. 기사들이 쉐도우맨을 상대하는 사이 진 나트라가 웜홀을 열었다.
근정전 하늘 위, 파란 불꽃이 일렁이는 웜홀에 차가운 얼음사막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 나트라와 쉐도우맨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창으로, 봉으로, 검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모양을 바꿔갔다.
불꽃 튀는 전투에 넋을 보고 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강제로 돌아갔다.
웜홀 생성기를 살펴보던 학자가 당황해 소리쳤다.
“……타임스톤이 없어요.”
“그럼…… 저건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동양의 궁궐 위에서 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웜홀을 바라보는 벨 나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이라도 멈춰!”
“글쎄. 그건 나도 힘들어서 말이야.”
날카로운 검 두 개가 맞닿았다.
“지금이라도 부모님께 가자.”
“…….”
콰앙!
“내가 설명해 줄게.”
쾅!
“부모님이 기다리실 거야.”
멀어진 거리에 두 사람의 손에 있던 검은 자연스럽게 창이 되었다. 기다란 창을 든 진 나트라가 후려치듯 쉐도우맨을 공격했다.
“그리고…… 튤 나트라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해.”
점점 더 격렬해지는 쉐도우맨과 진 나트라의 싸움.
근정전에 세워져 있던 품계석들이 휩쓸려 나가도 근정전만은 흠집 하나 없이 굳건히 서 있었다. 벨 나트라와 학자는 근정전 계단 위에서 웜홀 생성기를 부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결렬한 공방을 이어가던 중, 순간 진 나트라가 비틀거렸다.
그때를 노린 듯 잠잠하던 쉐도우맨의 사고뭉치가 일을 냈다.
콰아아앙!
자아가 있는 쉐도우맨의 그림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진 나트라가 튕겨 나갔다.
!!!
뜬금없이 공격하는 그림자에 한 번, 인정사정없이 날아가는 진 나트라의 모습에 또 한 번. 너무 놀란 관객들이 입을 쩌억 벌리고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진 나트라는 그대로 담장에 처박혔다. 담장의 돌과 기와들이 깨져나갈 정도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끝내 담장이 무너졌다. 진 나트라의 몸도 같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
“윌리엄!”
놀란 쉐도우맨과 벨 나트라가 진 나트라에게 달려갔다.
그때였다.
의식을 잃은 진 나트라의 몸과 그 아래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파도처럼 퍼져 나왔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그 크기를 늘려갔다. 싸움으로 엉망이 된 근정전 바닥과 하늘을 대부분 뒤덮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그림자였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었다.
그림자에 압도당한 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어두워진 상영관 내부가 그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일부 같았다. 장악당한 상영관의 관객들은 넋을 놓고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진 나트라가 우주선에 올라 전함으로 돌아갔다.
“……벨 님. 웜홀을 멈출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벨 나트라의 우주선에 올라선 학자가 입을 열었다.
“진 님이 타임스톤의 조각을 흡수하신 것 같습니다.”
“그걸 흡수할 수가 있어?”
벨 나트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트라인들은 타임스톤을 부수지도 못하고 흡수하지도 못하지만, 진 님은 지구인이니까요.”
“……그렇구나.”
“웜홀 생성기에 손을 올리고 계신 것도 에너지를 주입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진의 얼굴에 나타난 건 뭐야?”
“……진 님의 몸이 타임스톤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금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온몸에 금이 가면 결국…….”
조용히 듣고 있던 쉐도우맨이 벌떡 일어나 학자에게로 향했다. 쉐도우맨이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래서 해결법이 뭐야?”
“……모르겠습니다. 근데, 전하라면 아실지도 모릅니다! 왕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서재가 있거든요!”
쉐도우맨은 마지막 웜홀 생성지를 찾고 있는 벨 나트라를 바라보았다.
“찾았어?”
“아니. 지금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아까 공격당한 게 타격이 큰 거겠지.”
그 말에 쉐도우맨은 제 그림자를 꾹꾹 눌러 밟았다. 제 주인의 심기를 알아챈 사고뭉치 그림자가 축 늘어져 바닥에 달라붙었다.
“그럼 아버지에게로 가자.”
“그래.”
쉐도우맨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좋으면서도 진 나트라가 위험하다는 소식에 벨 나트라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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