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32화
2월 초.
쉐도우맨3의 마지막 촬영 날.
배우들의 열연이 끝나고 라이언 감독이 외쳤다.
“컷!”
컷 다음에 따라붙어야 할 말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조용히 라이언 윌 감독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번 장면은 완벽했다. 분명 OK겠지. 하지만 아무도 라이언 감독을 재촉하지 않았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아직 많은 작업이 남아 있었지만, 촬영은 추가 촬영이 아니라면 촬영은 더이상 없을 터였다. 이제 라이언 윌 감독이 OK를 외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정말로 마지막.
촬영장에는 쉐도우맨1 때부터 함께 찍던 스태프들도 있었고 쉐도우맨2에서 합류한 스태프들도 있었다. 다들 감격하거나 아쉬운 얼굴로 라이언 윌 감독을 바라보았다.
스태프들도 쉐도우맨 시리즈을 좋아했지만, 이 시리즈를 시작했던 라이언 윌 감독만큼은 아닐 터였다.
쉐도우맨으로 데뷔했던 서준 리도, 오랫동안 쉐도우맨으로 사랑받았던 에반 블록도, 찰떡 같은 캐릭터를 만난 리첼 힐도, 첫 합류지만 라이언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는 스왈린 애넘도 묵묵히 기다렸다.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배우들이 서 있던 촬영장을 보던 라이언 윌 감독은 가슴이 뻐근해졌다. 뭣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눈가가 붉어진 라이언 감독은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한마디를 뱉었다.
“……OK!”
꿈을 이룬 사람의 목소리는 이런 느낌일까.
무거우면서도 가볍고, 기쁜가 싶으면서도 아쉬운 느낌. 그럼에도 해냈다는 만족감과 감격스러움이 가득한 라이언 윌 감독의 목소리였다.
괜스레 가슴이 벅차올라 서준은 두 손을 번쩍 들어 손뼉을 쳤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 스왈린 애넘도. 쉐도우맨1부터 찍어온 촬영감독도, 미술감독도, 스태프들도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일제히 쏟아지는 박수에 라이언 윌 감독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 옛날, 외톨이였던 꼬마 라이언 윌이 ‘쉐도우맨’을 보며 짓던 미소였다.
그런 우상을 바라보던 조나단 윌은 찔끔 눈물을 흘리며 손바닥이 벌게질 정도로 박수를 쳤다.
* * *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고 촬영장이 정리될 때쯤 서준이 조나단을 불렀다.
“조나단. 이거 스태프분들에게 나눠줄 수 있어요?”
“이게 뭔데?”
서준은 새하얀 봉투가 가득 담긴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조나단에게 건네주었다. 고개를 갸웃한 조나단이 봉투 속 종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호텔 레스토랑 식사권이네?”
“2인 동반이에요. 봉투 하나당 2장씩 들어 있어서 최대 4명까지 갈 수 있어요.”
“누구한테 주면 돼?”
특별히 친하게 지낸 스태프들이 있나?
조나단의 물음에 서준이 대답했다.
“전부요. 감독님들이랑 스턴트맨분들하고 스태프분들도요.”
“……전부?”
“이렇게 많이 들고 왔는걸요.”
옆에서 안다호가 보여주는 종이가방에 잔뜩 든 흰 봉투에 조나단 윌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이 쉐도우맨팀 전원에게 봉투를 나눠주러 갈 때, 서준은 배우들에게로 향했다.
“이거 받으세요.”
에반 블록과 리첼 힐, 스왈린 애넘은 서준이 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여기 미슐랭에 나온 레스토랑인데!”
“저번에 가 봤는데 맛있더라.”
“고맙구나. 준. 내일 같이 갈까?”
스왈린 애넘의 말에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네! 좋아요!”
리첼 힐과 에반 블록도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봉투를 받은 라이언 윌 감독도 함께 가기로 했다.
조나단은 쉐도우맨팀 전원에게 새하얀 봉투를 나누어주었다. 김재연 등 스턴트맨들과 촬영감독, 미술감독, 그리고 스태프들에게까지 식사권이 든 봉투가 전해졌다.
“준이 주는 선물이래요.”
오! 역시 슈퍼스타!
봉투를 열고 레스토랑의 이름을 본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 가 보고 싶었던 레스토랑인데!”
“이번 시즌 요리 되게 맛있대!”
김재연이 식사권을 보았다. 이번 영화촬영으로 여윳돈이 생겨서 며칠 후에 가족들이 미국에 여행하러 오기로 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니 미슐랭 별을 두 개나 받은 레스토랑이란다.
‘그때 가면 되겠다.’
깜짝 놀랄 가족들을 생각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이서준이 준 거라고 하면 더 놀랄 터였다.
그때 쉐도우맨의 스턴트맨, 케빈이 김재연에게 물었다.
“재연. 우리는 내일 갈 건데 같이 갈래?”
“아, 난 다음 주에 가족이랑 가려고.”
“그래?”
재연의 거절에 잠시 생각하던 케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연을 빼면 5명인데, 어차피 2인 동반이라서 한 자리가 남잖아. 티켓은 남는 사람 걸 쓸 거니까 같이 가는 건 어때?”
“그래도 돼?”
“그럼. 남는 자린걸.”
케빈의 제안에 김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가서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그게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
찌그러진 차 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던 재연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바로 앞에 정신을 잃은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재연! 이쪽에도 사람이 있어!”
“잠깐만 기다려 봐!”
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빗속을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가 전복되고 그 차를 몇 대의 차가 들이박았다. 커다란 관광버스가 옆으로 넘어지고 빗물에 미끄러졌다. 그 뒤를 따라가던 김재연 일행의 차가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피했다.
케빈의 순간적 판단이 아니었다면 사고에 휘말렸을, 지금 떠올려도 아찔한 운전이었다.
“구급차는?!”
“신고는 했는데 오려면 좀 걸릴 것 같아!”
그나마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여기서 폭발까지 있다면 큰일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예 폭발 위험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차의 수만큼 폭발의 위험은 남아 있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스턴트맨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했다. 위험한 액션 장면을 연기하는 만큼 촬영장에서 일어난 응급상황에 필요한 응급처치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스턴트맨들뿐만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빛나는 것은 스턴트맨들이었다. 힘도 비슷한 체격의 사람들보다 강해 보였고 지칠 만도 한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스턴트맨들은 피를 흘리고 정신을 잃은 사람들을 봐도 당황하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려다 날카로운 파편에 베인 느낌이 들어도 멀쩡한 팔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움직였다.
빗속을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스턴트맨들의 몸으로 붉은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아직 몇 주의 유효기간이 남은, 정신력, 집중력, 치유력을 올려주는 [(선)오크 제사장의 기도]의 힘이었다.
미리 도로 한쪽으로 대피한 사람들이 그런 스턴트맨들과 스턴트맨들을 보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곧 사이렌이 울리고 구급차들이 도착했다. 스턴트맨들이 응급조치를 한 사람들이 구급차에 실려 도로를 떠났다. 경찰들이 도로를 통제했다.
누군가 전해준 물을 마시던 케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지금이라도 갈까?”
“옷이 이런데?”
“……안 되려나?”
물에 젖은 생쥐처럼 초라한 모습이었다. 잘 차려입은 옷이 무색할 정도였다. 어휴. 한숨을 쉰 스턴트맨들이 절레절레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가야겠네.”
아쉬운 눈으로 휴대폰을 보던 케빈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쉐도우맨 스턴트맨들! 사람들을 구하다!]
[현실 슈퍼히어로! 쉐도우맨팀!]
[쉐도우맨 역의 케빈, 진 나트라 역의 재연 킴!]
[영화 속 빌런? 현실 속 히어로!]
“이, 이거……!”
단지 미슐랭 투스타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으려고 했을 뿐이었던 쉐도우맨 스턴트맨팀은 인터넷을 뒤덮은 기사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 *
10분 전.
인터넷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여기 교통사고 났어! 다중추돌!
-너 괜찮아?
-누가 바로 구해줘서 괜찮아. 비도 와서 폭발은 없을 것 같아.
-경찰은 아직 안 왔어?
-근데 진짜야? 영상 올려봐.
-잠시만.
-(교통사고 현장 동영상)
-저 사람들이 아까부터 사람들 구하고 있어.
-와. 대단하다.
-응급처치까지 하네? 의료진인가?
-어라? 저 사람 케빈 아니야?
-케빈? 그게 누군데?
-쉐도우맨 스턴트맨! 벨 나트라 스턴트맨도 있네?
-어떻게 앎?
-트레이닝 센터 근처에서 식당하고 있어. 가끔 들르거든. 진 나트라 스턴트맨이랑 튤 나트라 스턴트맨도 있네!
한 사람의 댓글로 그저 뉴스에만 나올 예정이었던 교통사고가 사방팔방으로 알려졌다. 제대로 된 사실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극적인 단어만 옮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건은 ‘쉐도우맨 스턴트맨 교통사고’와 ‘쉐도우맨 교통사고’ 두 가지로 나뉘었다.
‘교통사고’와 ‘쉐도우맨’이 함께 언급되자 마린사는 난리가 났다.
레드본2 때를 떠올린 리처드 보윈은 급격히 오른 혈압에 뒷목을 잡았다. 그나마 어제 촬영이 모두 끝나서 다행이었다.
‘아니, 라이언 감독이 다쳤으면 어쩌지?’
촬영은 끝났어도 아직 많은 작업이 남았다. 순조로운 개봉을 위해서 리처드 보윈은 순간적으로 라이언 윌 감독을 대신할 감독들을 떠올렸다.
그린윙과 오버 더 레인보우를 감독했던 사라 로트, 어셈블1, 2의 감독, 조지 로버츠.
“감독님과 배우들은 레스토랑에 있답니다.”
수많은 감독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 라이언 윌 감독과 연락한 페일런 박이 말했다.
다행이었다.
그 후, 상황을 파악해 보니 배우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리처드 보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보도자료부터 뿌려.”
“네.”
몇 분 후.
[쉐도우맨, 교통사고!]와 관련한 기사가 뜨고 곧바로 [쉐도우맨 스턴트맨팀, 사람들을 구하다!]와 관련된 기사들이 떴다. 그리고 2분도 되지 않아, [쉐도우맨, 교통사고!]와 관련된 기사들이 일제히 삭제되었다.
* * *
쉐도우맨에 관한 댓글들이 늘어나자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각 배우의 에이전시도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배우들과 다른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던 매니저들이 일제히 울리는 휴대폰에 무언가를 감지했다.
전화를 받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다른 곳으로 갈 시간도 없었다.
얼른 전화를 받은 매니저들이 뜻밖의 소식에 감독과 조감독, 배우들이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고 얼른 대답했다.
킹즈에이전시에 서준이 레스토랑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 안다호는 얼른 서은혜에게 연락했다.
“네. 교통사고 기사가 뜰지도 모르는데 서준이는 레스토랑에 있습니다. 네. 아버님에게도 미리 전해주시면. 네. 네.”
그다음은 한국에 있는 코코아엔터 사장인 서은찬이었다. LA 시간이 오후 6시니 아직 한국은 오전 10시일 터. 조금만 늦어도 온갖 추측성 기사들이 뜰 터였다.
안다호의 연락을 받은 코코아엔터는 마린사의 보도자료를 번역해 누구보다 먼저 보도자료를 뿌렸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는 쉐도우맨 스턴트맨에 대한 기사들만 뜨게 되었다.
-쉐도우맨 교통사고 당했다던데?
=??? 그거 스턴트맨들이래.
=사고당한 것도 아님. 교통사고당한 사람들 구해줬다는데?
=아;;;; 그래? ㅈㅅ
* * *
소식을 들은 서준과 배우들은 매니저에게 부탁해 스턴트맨들을 호텔로 데려왔다. 그리고 호텔 방을 빌려 편하게 쉴 수 있게 해주었다.
“편하게 쉬어요. 비용은 우리가 낼게요.”
“진짜 히어로잖습니까.”
“진짜 멋있어요!”
눈을 반짝이는 서준에 스턴트맨들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6명 모두 다른 방을 잡아준 배우들이 호텔을 떠나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스턴트맨들이 레스토랑에 모였다. 미리 말해둔 모양인지 서준에게 선물 받은 식사권을 내밀 필요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따뜻한 스프를 본 스턴트맨들이 꼬르륵거리는 배에 얼른 스푼을 들었다.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맛있어!”
“그러게. 따뜻해서 좋다.”
“내일 점심까지 푹 쉬다 가자. 오늘 다들 고생했어.”
내일 아침 호텔로 몰려들 기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스턴트맨들이 환하게 웃었다.
다음 날.
교통사고에 대한 정보가 기사로 떴다.
[사망자 0! 쉐도우맨 스턴트맨들의 힘!]
[중상자 3명, 수술 성공적!]
[쉐도우맨 스턴트맨들의 용기와 헌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숙소의 짐을 정리하던 서준이 기사를 읽으며 말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스턴트맨들과 스턴트맨들을 보조했던 [(선)오크 제사장의 기도]가 없었으면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칠 뻔했다.
‘영화 촬영에만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다. 호텔 로비를 배경으로 어색한 얼굴로 인터뷰를 하는 김재연의 사진에 서준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서준을 도와 짐을 싸고 있던 안다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흘렀다.
까딱하다간 [쉐도우맨 교통사고]를 넘어 [배우 이서준 교통사고]로 변할지도 몰랐던 폭풍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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