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25화
“음.”
서준은 눈앞에 놓인 초록색 공처럼 생긴 크로마키 볼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생각보다 더 초록색이네.’
크로마키가 있었지만, 상대방이 있었던 다른 장면과는 달리 이번 장면은 서준만 나온다. 서준은 이 초록색 공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대사는 없고 상대역은 무생물이었다.
‘CG 작업을 거치면 멋진 장면이 되겠지만…… 촬영본은 나 혼자 난리를 피우는 것처럼 보이겠지.’
배경음도 없고 효과음도 없고. 조용한 촬영장에 홀로 연기하는 배우.
온전한 서준의 연기력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서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동글동글한 쨍한 초록색 공을 만지작거렸다.
심란해 보이는 서준의 모습에 조나단과 안다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이번 장면은 준이라도 힘들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CG가 많이 사용되는 장면은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이스케이프도 CG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좀비 마네킹을 사용했었죠.”
역은 CG가 거의 없었고 오버 더 레인보우는 CG가 뭐냐, 진짜 관객들을 불러 연주했다. 조나단은 기억을 더듬었다.
“쉐도우맨2도 준이 나오는 장면은 CG가 별로 없었죠.”
“그전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다호가 없었던 ‘악령’에서는 상대역인 이지석이 함께 있었고 최대만 감독이 기계장치를 이용해서 불타는 부적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더 오래전 ‘쉐도우맨1’ 때의 이상 웜홀 크로마키는 등 뒤에 있어서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걱정 마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서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크로마키랑 CG를 영화에 사용하면서 이렇게 찍는 장면은 많아진 데다가 슈퍼 히어로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빼놓을 수도 없잖아요.”
서준은 크로마키 볼을 만지작거렸다. 안 만진 곳 없이 꼼꼼히 조물락조물락거렸다. 부드러운 크로마키 볼이 말랑말랑했다.
“어떤 판타지 영화에선 배우가 상대 배우 없이 홀로 연기하기도 했으니까요. 저도 잘할 수 있어요.”
‘능력도 있고.’
서준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능력을 쓰기로 했다.
[(선/제작) 초롱도깨비의 불빛-하급]
초롱에서 태어난 도깨비의 불빛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게 빛납니다.
제작 방법 : 5분 접촉
그저 밝게 빛나는 게 다인 능력.
아마 제작이 가능해서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상승하지 않았나 싶었다.
[0:41]
[0:40]
시간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5분이 지나고 능력이 발동되었다.
[(선/제작) 초롱도깨비의 불빛-하급이 발동됩니다.]
초록색 크로마키 볼이 밝게 빛났다.
* * *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나단의 목소리에 촬영장은 침묵에 잠겼다.
CG로 만들어질 장면을 떠올리며 라이언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디, 액션!”
[(악) 데스 나이트의 기사도(하급)가 발동합니다.]
진 나트라가 신전의 문을 열었다.
신전의 한가운데는 제단이 하나 있었다. 진 나트라는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제단 위에 빛나는 새하얀 구슬이 떠 있었다.
타임스톤이었다.
제단 위에 떠 있는 타임스톤을 보는 진 나트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단에 고정된 크로마키 볼을 보는 서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배경음도 CG도 없는, 보는 사람마저 어색하고 민망한 촬영이었지만 CG가 유난히 많이 사용되는 슈퍼 히어로 영화에 익숙한 스태프들은 익숙하게 제 할 일을 했다.
허리까지 오는 제단 앞에선 진 나트라는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중하급이 발동합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중하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하급)이 발동합니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늘어나 진 나트라의 손에 올라갔다. 그림자는 날카로운 검으로 변했다.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은 진 나트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새하얗게 빛나는 타임스톤을 찔렀다.
빛나는 초록 크로마키 볼과 서준의 검이 맞닿았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선/제작) 초롱도깨비의 불빛-하급이 마기에 공격당합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하급)이 선기를 공격합니다!]
[(악) 데스 나이트의 기사도(하급)가 선기를 공격합니다!]
마기와 선기가 부딪쳤다.
손으로 전해지는 진짜 충격파에 서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선과 악의 능력을 함께 써도 괜찮아서 이것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서준의 근원에 있는 선기와 마기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생의 도서관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걸 모르는 서준은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간 선기와 마기는 같은 하늘에 존재할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촬영장에 남은 마기를 중급 천사의 부채로 없앨 수 있었지.’
그건 능력 사용 후 남은 마기의 찌꺼기라서 알림이 뜨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거 어쩌지? 심각한 표정으로 반발력에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꽉 쥐고 있던 서준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거 좋은 거 아니야?’
잘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아까보다 리얼해진 모습에 서준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검을 잡은 두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윽!”
나트라 행성의 핵인 타임스톤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검 끝이 조금밖에 박히지 않았지만, 충격을 받은 새하얀 타임스톤에서 방어하듯 새하얀 에너지를 뿜어냈다.
반발력에 새하얗게 빛나는 타임스톤을 향해, 진 나트라는 부술 듯 있는 힘껏 검을 밀어 넣었다.
그 에너지가 바람이 되어 검을 찔러넣고 있던 진 나트라의 몸이 흔들렸다. 진 나트라의 머리카락과 망토가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펄럭였다.
세찬 바람과 눈 부신 빛에 두 눈을 가늘게 뜬 진 나트라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충격파를 무시한 진 나트라는 있는 힘껏 검을 밀어 넣었다.
조금이지만 흠이 생겼다. 땅을 딛고 있는 두 발이 뒤로 밀려날 것 같았던 진 나트라는 오히려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진 나트라의 그림자가 진 나트라의 다리와 등을 지지했다.
“으윽!”
그렇게 진 나트라가 타임스톤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역시 배우는 다르네.”
“난 못함.”
조용히 서준의 연기를 보고 있던 스태프들은 두 손을 들었다. 조나단과 안다호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떨쳐낼 수 있었다.
서준은 초록색 크로마키 볼과 멀리서 작동되는 강풍기의 바람에도 연기에 푹 빠져 있었다.
모니터로 보이는 촬영본에는 보이지 않는 타임스톤의 빛과 파동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CG 들어간 거 보고 싶네.”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선/제작) 초롱도깨비의 불빛-하급이 마기에 파괴됩니다!]
쨍강!
새하얗게 빛나던 타임스톤의 빛이 흐려지더니 결국 검이 관통했다.
긴 싸움의 승자는 진 나트라였다.
온 힘을 다해 타임스톤을 깨기 위해 노력했던 진 나트라는 충격파에 엉망이 된 머리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긴 진 나트라는 제단 위로 떨어진 조각난 타임스톤을 바라보다 그중 가장 큰 조각은 다시 제단 위에 올려두었다.
우우웅.
조각난 타임스톤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새하얗게 빛나며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온전한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불안정하면서도 새하얀 빛으로 빛나는 타임스톤을 바라보던 진 나트라는 나머지 조각을 챙겨 신전 밖으로 향했다.
“컷, OK!”
OK 소리에 [(악) 데스 나이트의 기사도]와 [(악)마셰드의 그림자술]의 멈춘 서준은 익숙하게 능력을 발동했다.
[(선)중급천사의 부채-중급이 발동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 남아 있는 마기의 잔재들을 모두 소멸시켰다.
‘음. 역시 알림은 뜨지 않네.’
볼을 긁적이던 서준은 검을 빼낸 크로마키 볼을 살펴보았다. 크로마키 볼 속에 새겨두었던 초롱 모양의 문양이 사라졌다.
‘뭐. 덕분에 몰입이 잘돼서 좋았지만.’
어쩐지 초롱 도깨비가 엉엉 울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착각일까.
미안한 마음에 서준은 도서관 책은 뭘 좋아할까 생각하며 다음 촬영을 준비했다.
그때, 조나단 조감독이 외쳤다.
“바스트 샷 찍겠습니다!”
바스트 샷은 물론이고 클로즈업 샷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준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두 번만 더 부탁할게!’
다시, 그것도 두 번이나 마기에 깨져야 하는 책 속의 초롱 도깨비가 엉엉 우는 것 같았다.
* * *
“레디, 액션!”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나트라의 기사단장들과 대신들이 알현실로 향했다.
병석에 있던 튤 나트라가 드디어 나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큰일이 생긴 것인지, 기사들과 대신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넓고 화려한 알현실이 나타났다. 저마다 걱정을 내뱉던 사람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진 님?”
남자의 말에 나트라인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향했다. 알현실 가장 안쪽, 텅 비어 있어야 할 왕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나트라인이 아니면서 튤 나트라의 아들이 되어 후계자 후보의 자리에 오른 소년.
진 나트라였다.
[(악) 데스 나이트의 기사도(하급)가 발동합니다.]
알현실 가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튤 나트라를 가장 지척에서 모시는 기사단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그림자에서 검을 빼 들었다. 기사들도 일제히 검과 창을 잡아 들었다.
[(악)마셰드의 그림자술(하급)이 발동됩니다.]
왕좌에 앉아 있던 진 나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새까만 검을 들었다.
와이어팀 스태프들은 숨도 쉬지 않고 촬영장을 주시했다. 작은 방심이 큰 사고를 부를 수 있었다. 서준 리가 기사들을 공격하면 순서에 맞게 와이어를 조종했다. 와이어에 당겨져 벽으로 날아간 스턴트맨이 크로마키 매트에 파묻혔다. 서준 리의 계획된 공격에 당한 스턴트맨이 바닥을 굴렀다. 서준 리와 스턴트맨들는 합이 잘 맞았다.
진 나트라의 공격에 기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어, 어떻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에 대신들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튤 나트라와 강해진 진 나트라.
강제계승을 떠올린 대신 중 하나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이래서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ㄷ……!!”
‘지금!’
와이어 조끼를 입은 대신이 뒤로 당겨졌다. 서준 리가 고개를 돌리는 거의 동시였다. NG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 장면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와이어팀이 자축했다.
진 나트라는 조각난 타임스톤에 대해 대신들에게 알려주었다.
강제계승도 모자라 타임스톤까지 조각났다는 이야기에 대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타임스톤까지 건드리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이러십니까?!”
“글쎄.”
대신들이 애가 타든 말든 소중한 타임스톤 조각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던 진 나트라가 아이처럼 웃었다.
“복수?”
달그락달그락.
조각난 타임스톤 조각들이 무신경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기사들과 대신들의 귀에 울렸다.
진 나트라가 무심하게 말했다.
“불안정한 타임스톤으로 인해 나트라의 시간은 변칙적으로 변하겠지. 빠르게 가는 아침, 느리게 가는 낮,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는 저녁. 그리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겠지. 지금보다 수십 배, 수백 배는 빨리.”
나트라인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사는 나트라인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원인을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빠질 터였다.
“모든 나트라인들의 그림자를 모아도 이 정도의 타임스톤도 만들지 못하겠지.”
맞는 말이었다.
나트라 행성과 나트라인들이 존재할 때부터 모아온 그림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타임스톤.
새끼손톱만 한 조각도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필요했다.
“나트라를 안정시키고 싶다면,”
대신들의 시선이 진 나트라의 손에 있는 새하얀 타임스톤 조각을 바라보았다. 나트라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선 저 조각들이 필요했다.
원망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섞인 대신들의 눈빛에 진 나트라는 진하게 웃었다.
“꿇어라.”
고작 무릎을 꿇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자신을 왕으로 삼으라는 진 나트라의 말에 기사들과 신하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지인들, 그리고 이 땅이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
피가 날 듯 입술을 꾸욱 깨물면서도 대신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나트라인들을 위해 새로운 왕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부복하는 나트라인들을 바라보던 진 나트라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왕이 된 진 나트라가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기술자들과 학자들을 모아라.”
복수의 시작이었다.
“컷!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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