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216화
태평양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안.
서준은 손에 들고 있는 대본을 다시 한번 읽었다. 이미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꾸만 보게 되었다.
자꾸 읽어서 헤진 대본이 여러 개. 빳빳한 이 대본은 출국 전 새롭게 뽑은 대본이었다.
팔랑.
서준은 다시 첫 페이지를 펴놓고 마음속으로 지문을 읽고, 대사를 내뱉었다. 떠올리는 대사 하나하나마다 신중을 기울였다.
다른 영화도 대충 찍진 않았지만 쉐도우맨 시리즈는 서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서준’의 인생 첫 영화.
‘다른 작품도 다 좋아하지만, 역시 쉐도우맨이 제일 좋아.’
작게 웃은 서준이 팔랑팔랑 종이를 넘겼다.
* * *
서준이 탄 비행기가 LA에 도착했다.
입국심사를 맡은 직원이 서준을 알아보는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악수 한 번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직원의 얼굴에 서준은 작게 웃고 말았다.
“영화 꼭 볼게요!”
“감사합니다.”
공항 측의 협조로 순조롭게 공항에서 나온 서준과 서은혜, 안다호는 킹즈 에이전시에서 준비한 차량에 올랐다.
영화 촬영 동안 사용할 숙소는 마린사에서 준비해 주었다.
서준과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공항을 출발하고 두 대의 경호 차량이 그 뒤를 따랐다.
“숙소에는 경호원들도 함께 머무를 거니까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액션 트레이닝 센터도 멀지 않아서 다니기 편하실 거예요. 스케줄은 모레부터 있으니 그때까지 푹 쉬시고 필요한 것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운전하던 킹즈 에이전시의 직원이 말했다.
서준을 케어할 안다호는 트레이닝 센터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한국에서 인터넷 지도까지 보며 확인했지만, 다시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트레이닝 센터의 운영시간부터 운영시간 외에 사용할 다른 장소, 트레이닝 센터 근처에 있는 음식점들, 평이 좋은 한식 음식점의 위치와 운영시간, 24시간 이용 가능한 편의점과 병원 등 미리 조사해 왔지만, 확인차 묻는 안다호에게 킹즈 에이전시 직원은 웃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해 주었다.
앞자리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서준과 서은혜가 감탄했다.
“두 사람 다 정말 대단하네.”
“다호 형 진짜 멋져.”
영어를 못 하던 초보 매니저가 어느새 유창한 영어로 현지 직원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몇 년 전, 어렸던 서준이 이지석의 매니저, 윤성오를 보고 꿈꾸고 바랐던 베테랑 매니저, 바로 그 자체였다.
서은혜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 엄마는 서준이 안 따라다녀도 될 것 같은데?”
“에이. 난 엄마랑 같이 와서 좋은걸?”
서준의 애교에 서은혜는 웃고 말았다.
땅이 커서 그런지 숙소까지 도착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큰 숙소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해는 완전히 졌고 적당히 빵으로 배를 채우고 휴식을 취하려던 서준과 두 사람은 뜻밖의 손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짜잔!”
“준. 어서 와.”
숙소의 문을 열자, 환한 조명 아래에 리첼 힐과 에반 블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서준이 반겼던 모습과 똑같았다.
“리첼! 에반!”
뜻밖이지만 정말 반가운 손님에 서준이 활짝 웃었다.
이스케이프 촬영 이후, 거의 1년 만에 만나는 건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주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도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두 사람 다 어떻게 왔어요?”
“준이 온다는데, 아무리 바빠도 와야지.”
헤헤. 활짝 웃는 서준을 꼬옥 껴안은 두 배우가 서준의 뒤에 서 있는 서은혜와 안다호에게도 인사했다.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은 세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자. 배고프지? 음식 준비해 뒀어.”
“한식도 있지! 두 사람도 얼른 오세요.”
한식이라는 말에 긴 이동시간에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서은혜와 안다호도 눈을 반짝였다. 일등석의 기내식도 괜찮았지만 역시 따끈따끈한 한식이 당겼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인데, 여기 음식점이 평이 좋더라고.”
“한국식으로 ‘간단하게’ 준비해 봤어요.”
말과는 달리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LA에 도착한 첫날부터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 서준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 *
이틀을 푹 쉬고 서준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서준의 미국 첫 스케줄은 라이언 윌 감독과의 미팅이었다. 서준과 안다호는 라이언 감독과 만나기로 한 액션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고 안전 때문에 그 이상은 안 된대. 야외 훈련장, 실내 훈련장이 있고 수중 액션 장면 때문에 수영장도 있다더라. 그 이외에도 시설이 잘되어 있는 것 같아.”
“와. 엄청 크겠네요.”
“바로 옆에 할리우드가 있으니까.”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
이곳, 액션 트레이닝 센터는 스턴트맨의 육성뿐만이 아니라 제작사에 적당한 스턴트맨을 소개해 주고 액션 촬영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액션에 욕심이 있는 할리우드 배우나 액션 장면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은 배우들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고 촬영을 하기도 했다.
쉐도우맨 시리즈에 나오는 스턴트맨들도 대부분 여기 소속이었다.
“서준아, 저기야.”
“와!”
안다호의 말에 서준은 유리에 이마를 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체육관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여기서 배웠다고 했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격렬한 액션 장면이 많은 데다가 대부분의 장면을 직접 연기하는 에반 블록은 몇 달 전부터 훈련에 들어갔고 리첼 힐도 한 달 전부터 훈련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보다 액션 장면이 적고 동작이 쉬운 서준에게 주어진 시간은 3주.
‘금세 따라잡아야지!’
어떤 재미있는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점점 가까워지는 액션 트레이닝 센터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 * *
액션 트레이닝 센터 본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이언 윌 감독과 조나단 윌이 서준과 안다호를 반겼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이스케이프 잘 봤다. 액션도 잘하던걸.”
“헤헤헤.”
라이언 윌 감독의 칭찬에 서준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다른 감독님들의 칭찬도 좋았지만, 역시 첫 감독님이라서 그런지 라이언 감독님의 칭찬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쉐도우맨3의 액션 장면은 이스케이프보다 복잡하고 길 거야. 그래도 힘들지 않게 잘 조절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걱정 안 해요! 엄청 재미있을 것 같아요!”
눈을 반짝이는 서준의 모습에 라이언 감독과 안다호, 조나단 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서준과 오랜 시간을 보낸 세 사람은 서준의 연기 욕심을 잘 알고 있었다.
“다호 씨가 잘 조절해 주십시오.”
“네. 걱정 마세요.”
라이언 감독과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뾰로통해졌다. 그 아이다운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짓던 라이언 감독이 입을 열었다.
“준. 오늘은 견학만 하고 훈련은 내일부터 시작하자. 소개해 줄 사람도 있으니까.”
“소개요?”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하던 서준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그러자 라이언 감독과 조나단이 웃었다. 뾰로통해 있던 서준의 얼굴이 폈다.
“제 스턴트맨이요?”
서준의 스턴트맨.
진 나트라의 격렬한 액션 장면을 대신 연기해 줄 배우.
쉐도우맨2 촬영 때, 에반 블록과 비슷한 생김새의 스턴트맨을 떠올린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라이언 감독이 시간을 살폈다.
“지금 훈련 중이겠군. 보러 갈까?”
“네!”
라이언 감독의 말에 서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을 나와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
서준이 조나단에게 말했다.
“아 참. 조나단. 영화 잘 봤어요. 상 받은 거 축하해요.”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조나단 윌 감독은 벌써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시상식 때 전화로 축하의 말을 전했지만,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말하고 싶었다.
서준의 축하에 조나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마워. 근데 겨우 입상인데, 뭐.”
하지만 기쁨을 참을 수는 없었는지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솔직하지 못한 조카의 모습에 라이언 감독이 피식 비웃었다. 조나단 윌이 상을 받은 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근데 이번에 조나단도 같이 촬영하는 거예요?”
독립했다고 하지 않았나?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도 궁금한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에 조나단 윌이 있어서 잠시 놀랐던 서준과 안다호였다. 놀람보다 반가움이 더 컸지만 말이다.
“이번만 특별히. 삼촌이 부탁해서 말이야.”
“라이언 감독님이요?”
서준이 자신을 바라보자 조나단 윌의 삼촌, 라이언 감독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 조나단의 실력이 꽤 괜찮아서 말이다.”
“실력은 무슨. 삼촌은 그냥 내가 부려 먹기 쉬워서 그런 거야.”
조나단의 말에 서준과 안다호가 작게 웃고는 라이언 감독을 바라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세 사람의 시선에 눈을 굴리던 라이언 감독은 시선을 멀리 두고 입을 열었다.
“부려 먹기 쉽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야.”
처음 듣는 삼촌의 칭찬에 조나단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서준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라이언 감독의 눈빛이 진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난 쉐도우맨3를 완벽하게 찍고 싶다.”
각오. 다짐.
묵직한 라이언 감독의 말에 모두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스태프들도 나와 가장 손발이 맞는 스태프들만 뽑았고, 세트장을 만들 미술팀도, CG를 맡은 팀도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곳들로 골랐지.”
라이언 윌 감독이 서준을 바라보았다.
“배우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 신뢰의 눈빛에 서준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마나 라이언 윌 감독이 자신을 인정하고 믿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고르진 않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의 말에 조나단 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삼촌에게서 독립한 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항상 의문이 들었는데 이 한 마디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라이언 윌 감독이 쉐도우맨3의 촬영에 참여시킬 정도로 조나단 윌 감독은 잘하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일행에게 돌린 라이언 윌 감독은 어느새 어른이 된 조카와 무럭무럭 자란 배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 *
칭찬의 시간이 지나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배우도, 거장도, 어린 감독도 길어지는 침묵에 뻘쭘해할 때, 그 애매한 분위기에서 한 걸음 멀어져 있던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안다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했다.
“그럼 이동할까요?”
“그러죠.”
“네!”
“이쪽이에요!”
이 말만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나온 대답에 결국 모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배우 이서준, 쉐도우맨3 촬영을 위해 출국!]
[쉐도우맨 시리즈의 마지막. 쉐도우맨 3!]
[배우 이서준의 첫 영화, 쉐도우맨 시리즈!]
[이서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아. 가는구나.
-쉐도우맨3 기다리기는 했는데, 막상 촬영 시작한다니까 싱숭생숭함.
=22보고 싶기도 하면서 안 보고 싶기도 함.
-거의 10년이나 흘렀네. 내가 중학생 때 쉐도우맨1을 봤는데 벌써 대학생이야.
-슈퍼스타 이서준의 시작은 역시 쉐도우맨이지.
-지금도 쿠키 영상 보고 놀랐던 게 생생한데 벌써 마지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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