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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207화 (20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207화

“레디, 액션!”

실컷 울고 난 고주원은 민망한 듯 연재희와 임장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고주원을 두 사람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럼 준비하자.”

임장우의 조언에 연재희는 복장을 고쳐 입었다. 최대한 물리지 않게 온몸을 꽁꽁 싸매면서도 움직이기는 편하도록. 임장우가 건네준 쇠파이프를 힘껏 휘둘러 보기도 했다.

고주원은 휴대폰 문자로 병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해결책을 찾은 것 같다고는 하지 않고 좀비들이 많아서 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보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밖으로 갈 예정이었으니까. 아직 해는 중천이었고 바깥은 병원 밖으로 나서려다 좀비가 된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지금까지보다 위험했다.

고주원의 손가락이 휴대폰 위를 헛짚다 문장을 만들어냈다.

[기다리지 마세요.]

고주원은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껐다. 엄마 아빠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남은 휴대폰은 9개. 남은 화살은 18개.

어쩌면 약이 없을 수도 있고 가다가 좀비가 될지도 몰랐다. 돌아오다가 좀비가 될 수도 있었고 약만으로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약을 찾기 전에 바깥에서 구하러 올 수도 있었다.

“그럼 출발하자.”

그럼에도 세 사람은 연구소로 향하기로 했다.

“컷! OK!”

* * *

[제야의 종소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년운세 무료로 보기]

[내일 대종상영화제 후보 발표!]

[올해 빨간 날! 휴가 쓰면 좋은 날은?]

[영화 이스케이프, 개봉은 언제?]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올해 운세가 좋네ㅎㅎㅎ

-오. 역 대종상 후보에 올랐다!

=당연ㅎㅎ

-쉬는 날! 쉬는 날! 월요일을 공강으로 만들어야겠다!

-이스케이프 개봉 언제임?

=아직 촬영 중이래.

=빨리 개봉했으면!!

해를 넘어도 이스케이프의 촬영은 계속되었다.

김종호의 팬들이 보내준 밥 차에서 떡국을 주기도 했고, 이다진의 팬들이 보내준 커피 차에서 세뱃돈 모양의 쿠키를 나눠주기도 했다. 노란색 오만 원권 쿠키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근데 이지석 배우랑 박도훈 배우는 왜 보낸 거래요?”

호빵을 먹던 스태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날이 추워서 평소보다 뱃속이 허했는데, 때마침 이지석과 박도훈이 호빵과 찐만두 등을 보내왔다.

“……글쎄?”

두 배우의 카메오 출연을 알고 있는 스태프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김종호 배우랑 이서준 배우랑 친분이 있어서 보낸 거 아닐까요?”

“그럼 저건 어디서 보낸 거래요?”

“……글쎄?”

두 배우의 간식 차와 함께 도착한 물건.

따뜻하게 입고 일하라며 검은색 롱패딩이 스태프들과 단역 배우들의 숫자만큼 도착했다.

건네받은 롱패딩의 뒤를 바라보는 스태프들과 단역 배우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등 뒤에 새겨진 [이스케이프]가 눈에 띄었다. 누가 직접 쓴 것만 같은 글씨체였는데, 깔끔하게 적힌 글씨와 조금 서툴러 보이는 글씨로 나뉘어 있었다.

“……보통 영어로 적힌 걸 보내주지 않나?”

“한국어가 적힌 롱패딩은 촬영 아니면 안 입을 듯.”

“근데 이거 싸구려는 아닌 것 같은데? 엄청 따뜻해.”

뒤에 적힌 한국어가 미묘하긴 했지만, 따뜻해서 다들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이스케이프]라고 적힌 롱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북적댔다. 어딜 봐도 누가 봐도 영화 이스케이프의 촬영장이었다.

일찍 도착한 서준과 김종호, 이다진은 촬영에 방해되지 않게 배우 대기실에서 대기하던 중이었다. 따뜻한 난로 덕에 세 배우의 [이스케이프] 패딩은 벽에 걸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지만, 김종호는 목소리를 낮추어, 호빵을 호호 불며 먹고 있던 서준에게 물었다.

“에반이랑 리첼이 보낸 거지?”

“네. 음식 대신 옷으로 보냈대요.”

“뒤에 글씨도?”

“잘 쓴 건 에반이고 삐뚤한 건 리첼이요.”

서준의 말에 김종호와 이다진은 동시에 벽에 걸린 패딩의 글씨를 바라보았다. 오래 한국어를 배운 에반의 반듯한 글씨와 리첼의 삐뚤한 글씨에 김종호와 이다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난 에반 배우네.”

“전 리첼이요. 으. 엄청 좋다!”

“근데 왜 한글이야?”

“맞아. 영어로 써주면 더 좋을 텐데!”

두 사람의 말에 서준이 웃었다.

“에반이랑 리첼이 보기엔 ‘escape’쪽이 더 이상하대요.”

“……아. 알 것 같아.”

한국인이야 [이스케이프]가 이상하고 [escape]가 괜찮아 보일 테지만, 미국인인 두 배우에겐 [escape]보다 다른 나라의 글자인 [이스케이프]가 괜찮아 보였을 터였다.

“탈출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다진에 서준이 빵 터졌다.

“아하하하. 원래는 탈출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설득하느라 힘들었는데요.”

“……세상에.”

서준의 말에 김종호와 이다진의 눈이 크게 흔들리다가, 결국 두 배우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 * *

“레디, 액션!”

휙!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헤헤. 실수였어요.”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기다란 활을 피한 임장우가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낮게 읊조렸다.

“너 이제 활 쏘지 마. 이렇게 가까운 좀비도 못 때리는 게 활까지 쏘면 내가 맞겠다!”

임장우의 말에 고주원이 보란듯, 활을 쐈다.

명중!

뒤로 넘어가는 좀비의 모습에 고주원이 환하게 웃었다.

“에이. 근접전이랑 원거리는 다르죠.”

“다르긴 뭐가 달라.”

“전 딱 원거리가 적성에 맞아요. 아저씨는 근접전이고.”

“나는?”

“누난…… 힐러? 서포터?”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세 사람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임장우와 연재희가 주의를 경계하고 고주원이 활을 쐈다.

고주원이 화살을 쏘는 경우는 좀비가 있는 곳이 연구소 쪽이거나 근처에 있을 경우였는데, 그 이외의 방향으로 화살을 쏘면 수거하기가 어려워 아예 화살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도 화살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가야 하는 세 사람은 최대한 주의하며 걸어갔다.

세 사람은 좀비를 한 번에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연재희가 거리를 확보하면 고주원이 공격한다. 임장우는 경계하며 기습하는 좀비들을 막아낸다.

어설프던 세 사람의 합이 점점 맞아갈 때쯤, 저 끝에 연구소가 보였다.

* * *

“백신은 챙겼어?”

“네. 여기요.”

연재희는 백신을 여러 곳으로 나누었다. 실수로 잃어버릴 수도 있고 좀비와 싸우다 백신이 든 통이 깨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세 사람이 본관으로 돌아갈 때 모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세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해진 백신이었다.

“이건 주원이 거. 이건 형사님 거요.”

“그래.”

백신도, 좀비에 대한 자료도 싹 쓸어온 세 사람은 출발 전 잠시 화염병을 만들기로 했다. 임장우의 과거 경험이 힘을 발휘했다.

“화염병……!”

연재희와 고주원의 눈이 반짝반짝해지자, 임장우가 커흠 헛기침을 했다.

알코올을 비커에 넣고 실험복을 찢어 심지를 만들었다. 가내 수공업처럼 임장우가 알코올을 비커에 담으면 연재희가 심지를 집어넣었다. 고주원은 실험복을 찢어 연재희에게 건넸다.

“그래서 백신은 어떻게 퍼뜨릴 거야? 아까처럼 하긴 화살도 부족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백신의 양도 적고.”

“하나하나 쓰러뜨리면, 그냥 활로 좀비들 없애는 거랑 차이도 없어요.”

백신을 실험해 보기 위해, 고주원의 화살에 백신을 묻히고 좀비에게 쏴보았다. 실험복을 입고 있었으니, 여기 관계자였을 터였다.

연재희는 실험하면서 살펴봤던 자료를 떠올렸다.

“수용성이라서 물에 희석하면 될 것 같아요. 몸 아무 곳에나 닿으면 흡수된다고 하니까요. 물론, 실험했을 때처럼 좀비를 완전히 멈추게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지만요.”

실험했던 좀비가 완전히 멈추는 데 얼마나 걸리더라.

임장우가 속으로 시간을 떠올리던 사이 고주원이 입을 열었다.

“……물총?”

고주원의 말에 임장우와 연재희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물에 희석하면 된다고 했을 때부터 두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물…… 총을 구하기도 힘들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근데 아저씨. 화염병 던지면 불나지 않아요? 경찰도 안 오는데 소방차가 올까요? 좀비 말고 사람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고주원의 걱정 어린 말에 임장우가 알코올을 채우며 말했다.

“요샌 소화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금방 꺼져.”

“……금방 꺼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밖에서만 써야지. 올 때 휴대폰도 4개나 쓰고 화살도 5개나 잃어버렸잖아.”

임장우의 말에 고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은 돌아갈 때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재희가 조용했다. 비커와 심지로 쓸 천 조각이 쌓여가는데 연재희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주원과 임장우의 시선이 연재희에게로 향했다.

“재희야?”

“누나?”

연재희는 멍하니 하늘, 아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도 천장으로 향했다. 뿜어져 나온 피가 천장까지 닿았는지, 천장도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밝은 전등들과 그 사이에 있는 둥그런 장치.

임장우의 눈이 커졌다.

“스프링클러!”

“저거면 병원 전체에 백신을 뿌릴 수 있어요!”

“밖에 있는 좀비가 걸리기는 하는데, 병원 내 좀비들만 처리해도 반 넘게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일단 병원 내 좀비들을 처리하고 밖에 있는 좀비들을 병원 안으로 유인하면 될 것 같아요. 그땐 바닥이 백신으로 흥건할 테니까요. 바닥에 쓰러뜨리기만 해도……!”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금방이라도 병원 내의 모든 좀비를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환하게 웃던 고주원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스프링클러 물은 어디에 있어요?”

“그러게. 일단 그 물에 백신을 뿌려야 하잖아.”

고주원과 임장우의 물음에 연재희가 후후후 웃었다.

“내 대학 전공이 뭔 줄 알아?”

“아뇨?”

“건축설비야. 약이나 바이러스랑은 전-혀 상관이 없지!”

너무 상관이 없어서, 연재희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건축설비……?

대학은 아직 먼 이야기인 중학생 고주원이 눈을 깜빡였다.

“아파트나 큰 건물에는 스프링클러같이 불 끄는 장비나 전기 전선, 배관 같은 걸 따로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걸 배우는 학과야. 나도 배웠고.”

고주원과 임장우가 반색했다.

“그럼 스프링클러도 잘 알겠네요!”

“물론이지!”

연재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 * *

스프링클러의 물은 저수조에서 나왔다.

세 사람은 본관으로 돌아와 기계실과 관리실, 지하와 저수조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O.W.C 병원의 저수조는 본관 지하에 있었다.

“지하 주차장이 있어서 좀비가 꽤 있을지도 모르겠어. 관리실이나 기계실에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임장우는 새로운 쇠파이프를 만들고 화염병을 챙겼다.

“백신도 효과가 나오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백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그래도 뿌려 놓으면 돌아올 땐 편하게 오겠네요.”

탈취제 안의 액체를 모두 쏟아붓고, 분무기에 물과 백신을 탄 연재희가 말했다.

다시 한번 만반의 준비를 하는 임장우와 연재희를 고주원이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수조는 임장우와 연재희 둘이서만 가기로 했다.

“스프링클러가 작동 안 되거나 우리가 연락하지 않으면, 주원이 네가 해야 한다.”

“여기 있다가 동관 4층으로 돌아가. 그리고 사람들이랑 위층으로 올라가. 좀비를 죽일 백신이 있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임장우와 연재희의 말이 길어졌다. 식량과 백신, 자료가 든 가방을 꽈악 껴안은 고주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신과 자료는 있지만 알고 있는 건 여기 세 사람뿐. 모두 죽으면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할 터였다.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야 하는 연재희와 연재희를 보호해야 할 임장우와 고주원. 셋 중 누군가 남아야 한다면 그건 고주원뿐이었다.

“자료하고 나머지 백신은 숨겨뒀다가 경찰 아저씨한테 줄게요.”

“……그래.”

저도 갈래요.

고주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아 안심이 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계속 자신을 돌아보는 임장우와 연재희의 모습에 고주원이 밝게 웃었다.

같이 가고 싶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간다면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고주원은 그러지 않았다. 임장우와 연재희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위험하면 내가, 백신이, 자료가 아직 여기 있으니, 중간에 돌아오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문 앞에 선 임장우와 연재희를 바라보며 고주원이 입을 열었다. 표정은 밝았지만, 목소리는 물에 젖은 듯 먹먹했다.

“장우 삼촌. 재희 누나. 꼭 돌아오세요.”

임장우와 연재희가 환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난 꼭 졸업하고 말 거니까.”

“나도. 센터 7층 놈들 감방에 처넣고 말 거다.”

미래를 기약하는 굳센 다짐에 고주원이 울듯 웃었다.

“컷, OK!”

* * *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월 초.

기사가 떴다.

[(단독)영화 이스케이프 촬영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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