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96화
사람의 상상력은 아주 대단해서, 모자 같이 생긴 그림에서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상상하기도 하고 평범한 상자 그림에서도 어린 양을 상상할 수도 있었다.
장미꽃처럼 붉은 피가 묻은 신발을 내려다보던 서준은 국어 시간에 배웠던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음. 그건 어린 왕자가 특별한 건가.’
어이없어하던 주인공을 떠올린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여튼, 그만큼 사람의 상상력은 대단하다는 거다.
여러 작품에서도 직접적인 장면을 찍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잔인함과 슬픔, 무서움 등을 표현하고는 했다.
대놓고 장면을 보여주는 것보다 보고 있는 관객들, 개개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알아서 떠올리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괜찮은 연출이었다.
‘최대만 감독님이 바라는 것도 그런 거겠지.’
“서준아, 준비됐어?”
“네!”
문 건너 최대만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두꺼워 보이긴 하는데, 생각보다 얇으니까 찌그러져도 신경 쓰지 마. 예비용으로 여러 개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해.”
“네!”
‘그럼 마음껏 쳐야지!’
서준은 조감독이 쥐여준 가방 같은 것을 들어 올렸다.
이 ‘가방’은 ‘사무엘의 몸’을 대신할 장비였다.
네모나고 작은 샌드백에 미술팀이 손잡이를 달아준 것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문을 때리는 것보다, 샌드백으로 문을 치는 게 더 큰 소리가 나는 데다가 진짜 사람이 부딪힌 것처럼 넓은 면적이 구겨질 터였다.
‘이걸로 문을 내려치면 많이 구겨지겠지.’
서준은 희미한 좀비의 기억과 삶의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가방을 내려칠 장소와 타이밍을 생각했다.
‘기계처럼 똑같은 타이밍으로 내려치진 않아. 먹이도 살아 있고 날뛰는 만큼 타이밍도 제각각이고, 공격 방법도 달라야 해.’
거기다 학교 연습 때문에 찾아놓았던 [(악) 9번째 감염 좀비의 냄새-하급]과 그 능력 없앨 [(선) 중급천사의 부채-중급]까지 있었다.
[(악) 9번째 감염 좀비의 냄새-하급]
9번째로 감염된 좀비의 냄새입니다.
먹이(사람)의 불안감을 약간 상승시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능력이 강해집니다.
[(선) 중급천사의 부채-중급]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일정 확률로 대상들을 이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중하급 이하의 마기에 강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어떻게 연기할지 금세 생각을 끝낸 서준은 가방끈 같은 손잡이를, 좀비가 먹이를 노리는 것처럼 두 손으로 꽉 잡고 외쳤다.
“준비됐어요!”
* * *
문 건너, 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메라 렌즈가 생명연장팀 연구실 문을 비추었다. 꽉 닫힌 문은 그저 평범한 문 같았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 네 배우는 서준의 현실감 가득한 연기를 아는 만큼 기대가 서린 눈으로 세트장을 바라보았다.
또 어떤 연기를 보여줄 것인가.
대충 예상은 가면서도 항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 서준이었기에 배우들의 눈이 흥미와 기대로 반짝였다.
“레디,”
최대만 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울렸다.
“/연기를 잘하긴 하던데…… 이런 상황에서도 잘할까요?/”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연기를 한다는 거지?/”
많은 좀비 영화의 촬영을 봤던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은 궁금함 반, 의아함 반이 섞인 눈빛으로 세트장을 바라보았다.
들려오는 말에, 아직 좀비 분장을 지우지 못한 댄스팀 리더가 작게 웃었다.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은 역逆을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을 봤으면 이서준의 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액션!”
최대만 감독의 외침이 끝나고,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조용했다.
너무 적막해서 서준이 제대로 ‘액션’ 소리를 들었나 싶었던 박재민 조감독이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쿵!
문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울림은 생각보다 컸다.
시작하나 보다. 스태프들은 대본에 적혀 있던 지시문을 떠올렸다.
[생명연장팀, 연구실 문이 들썩거린다. 쿵쿵 소리와 함께 좀비가 사무엘을 먹고 있는 듯하다. 불행히도 사무엘의 숨은 끈질겼고, 그의 심장은 뜨거운 피를 계속 만들어내, 좀비를 흥분시켰다.]
쿵!
다시 한번 소리가 울렸다. 숨을 죽인 사람들의 시선이 꽉 닫힌 문으로 쏠렸다.
미술팀 스태프들이 공을 들여 만든 연구실 문은 보기엔 두꺼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찌그러졌다. 그걸 증명하는 듯, 마치, 사람의 몸뚱이가 문 건너에서 처박힌 듯, 문의 아래쪽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살아 있는 사무엘과 좀비의…….’
누군가 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평범했던 문과 그 건너편이, 두 번의 큰 울림만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났다.
미약하게 나던 냄새는 넓은 촬영장을 채우지 못하고 환풍기를 통해 사라졌다. 그럼에도 일부는 남아 있었다.
약간의 불안함이 사람을 초조하고 두렵게 만들었다.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던 스태프가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분장한 좀비를 봐서 그런가. 엄청 무섭네.”
“그죠? 저도 그래요.”
쿵!
조용히 이야기하던 스태프들의 소리를 들은 양,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입을 열어 소리를 냈던 스태프들은 저도 모르게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손에 땀이 찼다.
현대의 편안하고 안전한 삶에 익숙해져 있던 보통의 사람들.
둔할 대로 둔해져 있던 사람들의 생존본능이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쿵!!
지금까지보다 확실하게 커다란 소리에 스태프 몇몇이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뺐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긴장감이 흐르는 촬영장은 다시금 조용해졌다.
후우, 후우.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숨소리가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 같아,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문 건너. 위험한 것이 있었다.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킬 때,
쿵!
문의 위쪽이 살짝 튀어나왔다.
쿵!
문의 아래쪽이 살짝 튀어나왔다.
쿵!
문의 아래쪽이 움푹 파였다.
잠시의 소강상태.
침묵이 길어졌다.
입을 꼭 다문 스태프들이 식은땀이 잔뜩 흐른 자신의 등을 인식하고, 꽉 쥐어 저릿저릿한 두 손의 힘을 풀 때,
쿵!
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
계속되는 커다란 울림과 함께,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문이, 사정없이 찌그러지며 금방이라도 열릴 듯 들썩였다.
“히익!”
마지막 숨까지 끊어놓기 위해 날뛰는 좀비.
보이진 않아도 상상이 되는 그 장면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촬영 감독도 놀랐는지 카메라가 크게 흔들렸지만, 모니터가 아닌 세트장을 바라보던 최대만 감독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자신이 부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보여줄 줄이야. 점점 향상하는 서준의 연기에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쿠웅!
마지막 방호벽이었던 두꺼운 문이 반으로 찌그러졌다. 잠겨 있었던 문이 문틀과 맞지 않아 삐그덕, 열려 버렸다.
몸을 잔뜩 움츠렸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숨소리가 들리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숨 쉬는 것을 멈추기도 했다. 눈은 계속 문을 경계하며 손을 휘저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마지막 경계선 같았던 문 사이로, 축축한 피가 묻은 신발이 나타났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 것 같았다.
손에 든 무기를 꽈악 쥔 손에 땀이 찼다.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언제 나오나, 나오긴 하는 건가. 도망가야 하나.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무기를 목숨처럼 쥐고 있던 스태프들이 도통 나오지 않는 좀비에 의아할 때쯤.
“감독님, NG예요?”
찌그러진 문이 열리고 서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산뜻한 얼굴에, 다들 얼이 빠졌다.
[(선) 중급천사의 부채가 발동됩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멈춰 있던 뇌가 조금씩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억!”
이거 촬영이었지?!
깜짝 놀란 스태프들은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와 막대기들을 보고,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들고 있던 접이식 의자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지석과 김종호도 어이구,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들고 있던 소화기를 바닥에 내려두고, 긴장에 굳어진 어깨를 풀었다.
이다진과 박도훈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휴대폰을 던지려고 했던 듯 자신의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달그락.
뎅그렁.
여기저기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
특수분장 일을 하면서 많고 많은 좀비와 좀비 연기를 봐왔던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도 다르지 않았다. 미러팀의 팀원인 존은 제 손에 들려 있는 특수분장용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슬쩍 내려놓고 제나 트라이드를 불렀다.
“/제나. 손./”
“/응? 아, 미안!/”
존의 눈짓에 제나 트라이드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 잠깐 사이 조립형 테이블의 다리 하나를 어느새 빼서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준 리. 엄청나네./”
“/분장을 하지 않아도 저 정도까지 되는구나. 분장까지 하면 엄청 날 텐데!/”
“/……그럼 난리가 날걸?/”
잠시 그 모습을 상상해 본 존이 몸을 떨었다.
서준의 연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제나 트라이드의 눈에 아직 좀비 상태인 댄스팀 리더가 들어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앉아 있는 좀비의 모습에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다 좀비를 본 스태프들도 히익 놀랐다가, 분장인 걸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지우자./”
“/그래./”
* * *
중간에 카메라가 흔들렸기 때문에 다시 한번 촬영했다. 아까는 [(악) 9번째 감염 좀비의 냄새-하급]을 사용했고 이번에는 마기의 양을 조절했다.
[[(악) 9번째 감염 좀비의 냄새-하급]의 등급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악) 9번째 감염 좀비의 냄새(최하급)이 발동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엔 무기를 찾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준의 연기에 척, 엄지를 들었다.
두 촬영본을 돌려보던 최대만 감독이 함께 모니터링하고 있던 서준에게 말했다.
“첫 번째가 더 좋긴 한데…… 연기가 너무 강해도 좋지는 않으니까, 두 번째 걸로 가자. 다른 좀비들과도 어우러져야지. 처음부터 너무 강하면 뒤에 나오는 좀비가 밋밋해 보일 거야.”
“네.”
최대만 감독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날 저녁.
“……난 못 보겠네.”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의 입에서 ‘어마어마했다’, ‘무서웠다’, ‘좀비 연기가 굉장했다’ 등 아들의 연기에 대한 찬사를 들은 이민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낙담했다.
“힘내! 좀비 나오면 알려줄게. 눈 감고 봐.”
“……그럼 소리만 들려서 더 무서워…….”
이민준의 말에 서준과 서은혜, 에반과 리첼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촬영 덕분에 주말이 빛처럼 지나가고, 월요일이 되었다.
주말 동안 오늘만을 기다려온 친구들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준의 모습에 좀비처럼 달려들었다.
“……너희 손 진짜 매워.”
친구들의 등짝 스매시에 서준이 몸을 비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주경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준의 출연을 아는 건 이 셋뿐이었고,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촬영이 가까워지면 말할 예정이었다.
‘지호에게는 미리 말해둬야겠지?’
2반의 한지호는 주희와 재한과 함께 양궁부원이라서 서준과 함께 촬영하는 장면이 있었다.
‘지후, 지오랑 이름이 비슷해서 친근하단 말이야.’
주경의 물음에 주희와 재한이 눈을 반짝였다. 서준도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대만 감독님이 시놉시스 보내주셔서 하기로 했지. 내가 제일 처음이었어.”
“그럼 할리우드 특수분장팀이 온 것도 사실이야?”
“투자자는 누구래?”
“응. 할리우드 특수분장팀도 참여하긴 하는데, 아직 비밀이야. 홍보용으로 쓸 예정이래. 투자자는 플러스고.”
“와. 이것도 엄청 흥행하겠다.”
출연작의 흥행 소식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주경과 작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하던 주희가 서준을 바라보았다.
“더 숨기는 건 없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있구나!”
“이건 나중에 알아야 재미있어. 기대해도 좋아.”
천하의 이서준이 기대할 만하다고 할 정도니, 그 스케일이 예상되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애써 궁금증을 내리눌렀다.
“으. 뭔지 궁금하지만 참을게.”
재한의 말에 주희와 주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서준이도 참석하지? 미리 축하해.”
“응?”
주경의 말에 서준이 눈을 깜박였다. 재한과 주희도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참석? 뭐가?”
고개를 갸웃하는 서준의 모습에 세 아이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청룡영화상 말이야.”
아하.
그게 있었지.
이스케이프에 푹 빠져서 깜빡하고 있었다.
‘다호 형이 할 이야기가 있다던 게 이건가 보네.’
찬바람이 부는 11월.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과 영화 산업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제, 청룡영화상이 열리는 달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