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95화
오늘 마지막 촬영은, 이다진과 리첼 힐, 에반 블록의 촬영이었다.
첫 촬영부터 할리우드 배우 두 명과 연기를 하게 된 이다진이 새하얀 안색으로 심호흡을 했다. 아침에 청심환까지 먹고 왔는데, 효과가 전혀 없는지 이다진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다진이 누나, 화이팅!”
“잘해!”
“……응!”
서준과 박도훈의 응원에 옷을 갈아입은 이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박도훈처럼 두 배우에게 욕을 뱉을 일이 없어 이다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해봐요. 다진.”
“네! 잘 부탁합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이다진이 대답했다.
‘한국 연구실’은 ‘미국 연구실’ 세트장에서 미국스러운 물건들을 전부 떼어낸 다음, 책상과 컴퓨터 등의 물건들 위치를 이동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솜씨가 좋은 미술팀 스태프들이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자, 어느새 비슷하면서도 다른 마리아 교수의 한국 연구실이 나타났다.
화면을 살핀 최대만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고 크게 외쳤다.
“레디, 액션!”
“재희. 이쪽으로.”
리첼 힐의 대사에 촬영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서준도 활짝 웃었다. 원래는 영어로 된 대사였지만, 리첼 힐이 한국어를 잘하는 데다가 발음까지 좋아서, 한국어로 바꾸었다.
‘아마, 이스케이프가 개봉하면 다들 깜짝 놀라겠지.’
러시아의 인형인 마트료시카처럼, 까도 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양파처럼. 이스케이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람으로 가득한 영화가 될 터였다.
“네!”
대학원생 연재희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마리아 교수가 가리키는 방향에 놓인 곳으로 서류들을 옮겼다. 마리아 교수의 조수로 일한 지 벌써 2개월이 흘렀는데, 연재희는 마리아 교수가 신기하기만 했다.
‘천재는 2개월이면 언어를 다 배우는 걸까?’
“재희. 이거 분석 자료 좀 찾아줘.”
“넵!”
연재희는 2개월 전부터, O.W,C. 재단의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쪽과는 관련이 전혀 없는 자신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당 교수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게 대학원생이었다.
‘돈은 잘 주니까.’
그 쪼잔한 담당 교수 밑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니면 논문 대필이나 하고 있었을 거였다. 돈도 잘 주고, 친절한 마리아 교수도 좋았다. 하는 일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잘한 일이라 쉬웠고. 그저,
“/저 왔습니다. 교수님./”
“쯧.”
저 뺀질뺀질한 사무엘이라는 남자가 마음에 안 들 뿐이었다. 마리아 교수가 혀를 찼다. 오늘도 노크도 인터폰 연락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나타난 사무엘이었다.
‘아니, 저럴 거면 왜 도어락은 달았대?’
입술을 삐죽 내민 연재희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두고 연구실 밖으로 향했다. 보안을 위해 설치된 두꺼운 문을 꼭 닫고 사무엘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무엘이 오면 연재희는 쉬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는 사무엘과 마리아 교수가 한바탕하고 다시 들어가서 사무엘이 뒤섞어 놓은 종이들을 원래의 순서로 바꿔놓는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했다. 뭘 던졌는지 모니터가 깨져 있었다. 마리아 교수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 교수님…….”
마리아 교수는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안 돼. 좀비. 바이러스. 감염.’ 알 수 없는 말에 연재희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조용히 연구실을 치웠다.
“컷!”
하아아아.
긴장이 풀린 이다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리첼 힐이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요. 다진.”
“……오케이 컷이 아니었는 걸요.”
“뭐, 한 번에 오케이 나는 게 이상하죠. 다음 촬영에서 더 잘하면 되죠. 그럼 뭐가 부족했는지 보러 갈까요?”
“……네!”
* * *
다음 날.
비공식 촬영 이틀째.
어제와는 달리 실내촬영장은 분주했다. 미술팀도, 특수분장팀 미러도 이곳저곳을 누비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블러드! 블러드!”
“/여기!/”
“땡큐, 존!”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은 한국에 도착하고 한국의 특수분장팀과 협업하는 동안, 이스케이프의 미술팀과도 많은 교류를 했다. 아무래도 좀비 분장과 배경이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통역사를 대동해 미술팀이 준비한 피와 미러팀이 준비한 피를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좋을지 의논했다. 피의 끈적거림, 굳음의 정도부터 벽에 묻어 굳은 피와 바닥에 흐르는 피, 좀비의 몸에 묻은 피의 색까지. 그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며 제법 짧은 단어로도 이야기가 통하게 되었다.
오늘 촬영은 그동안의 회의를 실현할 시간이었다.
미술팀도 미러팀도 기합이 바짝 들어가서 움직였다. 특히, 미술팀은 할리우드 배우마저 감탄시킬 세트장을 만들겠다고 각오한 상태였다.
“뿌려요? 진짜 다 뿌려요?”
붉은 액체가 가득 든 통을 든 미술팀 막내 스태프가 물었다. 미술팀 스태프들이 머리를 모아 의견을 나누었다.
“아니! 잠깐만…… 사람 한 명한테서 이 정도 양이 나오기엔 너무 많나?”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아? 사람 몸의 70퍼센트가 물이라잖아.”
“그 물이 전부 피는 아니지.”
“게다가 사람한테 물렸다고 상처에서 피가 폭발할 듯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해놓은 그림이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매번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미술팀 막내가 뻘쭘한 얼굴로 열정적으로 의논하는 선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든 통을 들고 멍하니 촬영장을 둘러보고 있던 미술팀 막내가 출입문으로 들어오는 배우와 매니저를 발견했다. 이서준이었다.
“이서준 배우! 벌써 왔어요?”
“네. 분장하는 거 보고 싶어서요.”
“미러팀은 저쪽에 있어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특수분장팀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서준을 보며 막내 스태프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서준이한테 감사 인사받았다!
미러팀은 열심히 특수분장에 필요한 재료를 테이블 위에 꺼내놓고 있었다. 오늘 할 특수분장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살피던 제나 트라이드가 서준을 발견했다.
“/아, 준. 왔어?/”
“/제나. 안녕하세요! 리첼이랑 에반도 같이 왔어요. 좀 이따 올 거예요./”
좀비 분장을 받기 위해, 의자에 뻘쭘하게 앉아 있던 본 브레이킹 댄스팀 리더는 서준과 눈을 마주치자 얼른 입을 열었다. 어제도 간단한 인사밖에 못 해 좀 더 대화하고 싶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서준 배우.”
“안녕하세요. 본 브레이킹 댄스 봤는데 정말 대단하시던데요.”
“아, 그래요?”
“몇 년이나 하신 거예요?”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는 리더와 이야기를 하며, 서준이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분장하는 거 봐도 될까요?”
“아. 그럼요.”
리더의 대답에 서준이 제나 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분장하는 거 봐도 돼요?/”
“/그럼!/”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제나 트라이드가 미러팀이 작게 웃으며 허락했다.
“이거 먹고 하세요.”
“미니 붕어빵이에요. 귀엽지 않아요?”
곧 붕어빵이 가득 찬 종이봉투를 든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들어왔다. 스태프들에게 붕어빵 봉투를 건네주고 두 사람은 서준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희도 봐도 될까요?”
“아, 그럼요!”
이게 나한테 허락을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중하게 물어오는 할리우드 배우들의 모습에 리더가 볼을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마저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본 브레이킹 댄스를 시작으로, 할리우드 배우들과 이것저것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리더는 즐겁기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제나 트라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이스케이프, 첫 좀비 특수분장이 시작되었다.
얼굴 위에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리더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좀비 분장은 처음 보는 에반 블록과 리첼 힐도, 관심 있는 눈으로 좀비를 바라보았다. 스태프들도 첫 좀비 분장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아마 촬영이 진행되면 익숙해질 테지만, 지금은 눈이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밝은 조명 아래서 보니 상처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여 더욱 그랬다.
“와…… 오늘 밥은 다 먹었다.”
“그러게. 앞으론 이걸 계속 봐야 한다는 거지?”
어른들도 눈살을 찌푸리는데, 서준은 점점 친근해지는 좀비의 모습에 헤헤 웃었다.
좀비 영화를 찍기로 한 후에는 엘프들의 삶의 책은 물론이고, 악의 도서관에서 언데드나 좀비의 책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학교에서 좀비 연기도 연습하면서 그때의 삶들이 희미하게 떠오르기도 했고, 새로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준은 비위가 좋구나.”
“비위도 알아?”
“좀비 영화 후기 보면서 공부했지!”
리첼 힐의 말에 서준과 에반 블록이 웃었다.
* * *
“레디, 액션!”
정장을 입은 사무엘이 시계를 보며 ‘생명연장팀’으로 향했다. 이 연구소에는 많은 팀이 있지만, 그 모든 실험의 마무리는, 이번 프로젝트의 중추인 ‘생명연장팀’이 하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보고 사무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도어락에 검지의 지문을 입력시켰다.
만약.
만약 도어락의 옆에 있던 인터폰으로 연구실과 연락해 봤다면.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여러 연구실을 제집 드나들 듯 불쑥불쑥 나타나던 사무엘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삐릭-
하고 두꺼운 문이 열렸다.
깜깜한 사무실 안.
“/박사님./”
사무엘은 전등 스위치를 찾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이런저런 약품이 있는 곳이니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엘은 전등 스위치를 찾기 위해 차가운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잠은 숙소에서 주무시라고……./”
그으으으.
기이한 소리에 사무엘은 말을 멈추었다.
“/박사님?/”
사무엘은 실험체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실험체는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고 입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제어장치가 없는 실험체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사무엘은 바로 연구실을 뛰쳐나갔을 터였다.
[O.W.C.의 관리는 완벽하다.]
그 생각이 허점을 만들어냈다.
달칵.
상황을 파악하려던 사무엘은 불을 켜고 말았다.
!!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몰랐을까.
사무엘의 바로 눈앞, 피투성이의 무언가가 서 있었다.
밝은 불빛 아래.
‘박사’였던 것이 서 있었다. 피와 살점이 붙은 ‘흰 가운’이었던 것을 입은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관절이 저렇게 움직일까.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은 방향으로 팔과 다리가 움직였다.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인외의 것이 사무엘의 눈앞에 있었다.
그어어어.
사무엘의 얼굴 가득히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아, 안 돼……!/”
좀비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컷! 오케이!”
에반 블록에게 달려들려던 리더가 멈춰 섰다. 두려움 가득하던 에반 블록의 표정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익숙해진 것 같았는데, 바로 앞에서 나타나는 좀비는 조금 무서웠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리첼 힐이 빙그레 웃었다.
“/무서웠나 보네?/”
“/음. 조금?/”
“/저런 분장이 무서워서 어떻게 해. 좀비물은 다 찍었네./”
리첼 힐의 놀림에 에반이 웃었다.
“그럼 클로즈업 샷 찍겠습니다.”
리더의 앞에 커다란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와. 이렇게 큰 카메라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리더가 볼을 긁적이려다 분장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어색해하는 리더에게 박재민 조감독이 말했다.
“그냥 편하게 하시면 돼요. 가만히 있어도 엄청 무섭습니다.”
“그래요?”
“엄청요!”
박재민이 엄지를 치켜들자 리더는 긴장을 풀었다. 그래. 알아서 잘 편집해 주겠지.
촬영이 시작되고, 박재민 조감독이 불을 껐다, 켰다.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좀비는 확실히 인상 깊고,
“/무서워! 에반! 저게 조금이라고?! 엄청 무서운데?!/”
리첼 힐의 말에 에반 블록이 웃었다. 이다진도 박도훈도 몸을 떨었다. 김종호와 이지석은 아닌 척 손에 찬 땀을 닦았다. 스태프들도 침을 꼴깍 삼켰다.
할리우드 특수분장은 대단했다.
“오오.”
놀라는 사람들이 가득한 촬영장, 서준만이 눈을 반짝이며 방금 찍은 장면을 돌려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는 좀비의 얼굴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아빤 못 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서준이었다.
* * *
오늘 마지막 촬영만을 남겨두고 최대만 감독이 서준에게 말했다.
“다음은 서준이한테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저요?”
최대만 감독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 장면은 스태프가 해도 상관없는 장면이었다.
“역의 마지막 장면 있지? 침소에 나왔던 장면.”
“네.”
“그때 서준이가 거기 있었다며. 그런 분위기를 내줬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네!”
최대만 감독의 생각을 이해한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재미있을 것 같아.’
서준의 촬영 소식에, 댄스팀 리더는 물론이고, 제나 트라이드와 미러팀, 스태프들이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촬영을 준비했다.
피가 묻은 신발을 신은 서준이 헤헤 웃었다. 조금 크긴 했지만, 연기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촬영 준비는 금방 끝났다. 필요한 건 복도와 문.
서준이 문 뒤에 섰다.
“레디, 액션!”
최대만 감독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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