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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86화 (18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86화

-에반! 할 거야?

휴대폰 건너, 리첼 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 블록은 귀 가까이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방방 들떠 있는 목소리에 에반 블록은 리첼 힐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준이랑 통화했어?”

-그래! 대본도 다 읽었어. 좀비 영화라니! 엄청 재밌을 것 같더라. 너도 읽었지?

“그래.”

-지금은 캐릭터 분석 중이고?

리첼 힐의 말에 에반 블록의 몸을 움찔 떨렸다. 에반 블록은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넓은 책상 위, 직접 프린트한 대본이 펼쳐져 있었다.

한국 영화, 이스케이프의 대본이었다. 오늘 받은 대본이었는데 벌써 알록달록, 뭔가 많이 적혀 있었다.

밝은색의 형광펜으로, 영화를 찍게 된다면 맡을 역의 대사를 표시하고 지문을 분석하고 캐릭터를 구성했다. 캐릭터의 과거를 떠올리고 버릇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내가 리첼이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단순한 인간이었나.’

할 말을 잃은 에반 블록의 귀로 리첼 힐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내 말 맞지? 너, 좋은 대본은 그냥 못 넘어가잖아.

“……그래. 분석 중이었어.”

-아하하하.

리첼 힐의 웃음소리가 약이 오른 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펜을 놓고 마른세수를 한 에반 블록이 말했다.

“너도 출연할 거야?”

-그럼! 나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했어!

“한국어 대사는 없던데…….”

-그래서 좀 아쉽긴 한데, 감독 디렉팅이 있잖아! 드디어 한국어를 실전에 쓰는구나!

“나랑도 대화하잖아?”

-넌 한국인이 아니잖아.

냉정한 리첼 힐의 말에 에반 블록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 가면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유창한 한국어에 깜짝 놀랄 서준의 얼굴을 떠올리던 리첼 힐이 말했다.

-그래서 넌 할 거야? 말 거야?

“할 거야. 재밌을 것 같아.”

분량이 짧아서 촬영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쉐도우맨 시리즈 말고도 다른 작품에서 서준과 연기를 하게 된다는 게 색다르기도 했다.

-언제 갈 거야? 난 짐 다 챙겼어.

“……벌써? 이제 겨우 시나리오 완성돼서 다른 배우들도 아직 못 구했다고 하던데?”

그럼 촬영까지는 한참 남았을 터였다. 에반 블록의 말에 리첼 힐이 볼을 긁적였다.

-음. 너무 빠른가.

리첼 힐은 잔뜩 싸놓은 짐을 바라보았다. 이 짐 중 반이 서준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래. 계약도 해야 할 거고, 그쪽도 준비를 해야 할 거니까.”

-그럼 일단 준에게 답장 보내야겠다.

리첼 힐은 신나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 * *

여울 예중의 개학식 날.

미국에서 좋은 소식이 도착했다.

>리첼 : 좋아! 할래!

>에반 : 나도. 재밌을 것 같네.

등교 준비를 끝내고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의 연락을 받은 서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얼른 엄마 아빠에게도 말하고 안다호에게 전화했다.

“다호 형! 에반이랑 리첼이 출연한대요!”

-그,렇구나.

안다호는 두 할리우드 배우의 출연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안다호는 왠지 서준이 두 배우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줘야겠네. 내가 할게.

“네!”

안다호는 일단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질 때까지 그 사실을 일부 관계자들에게만 알리기로 했다.

코코아엔터 5층 회의실.

사장실과 가까워, 가장 중요한 회의를 할 때 쓰이는 곳이었다.

5층 회의실에는 처음 들어오는 2팀 직원들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자리에 앉았다.

곧 홍보팀 김수련 팀장과 사장 서은찬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서준 배우’와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로 사장인 서은찬까지 부를 수 있었다.

부른 사람이 모두 들어오자 안다호가 일어섰다.

“서준이랑 관련된 일이라고요?”

서은찬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준이가 이번에 찍을 영화에,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출연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던 2팀 직원들과 김수련 팀장, 서은찬은 할 말을 잃었다.

안다호는 호텔에서 있었던 1차 폭풍을 짧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준의 추천으로 두 배우가 출연하게 됐다는 이야기에 서은찬은 입을 틀어막았다.

할리우드 스타인 조카는 그 사고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 * *

영화드림 제작사 대표인 이한솔과 이스케이프의 감독인 최대만 감독에게도 ‘상상도 못 한 소식’이 전해졌다.

>먼저 문자로 알려드립니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일단 두 배우의 에이전시와 연락을……

막 로케이션 매니저에게 받은 촬영 후보지 사진들을 살피고 있던 이한솔과 최대만 감독은 따끈따끈한 소식에 숨 쉬는 것을 잊고 말았다. 너무 따끈따끈해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숨은 어떻게 쉬는 거더라? 눈은 언제 깜빡여야 하지? 혀는 어디에 둬야 하더라?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전부 따로 노는 것만 같은 기분.

“헉.”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상상도 못 했던 일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한솔이 안다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되물어도 답은 같았다. 스피커폰으로 같이 듣고 있던 최대만 감독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진짜였다.

정말로 두 배우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생각도 못 했던 일에 최대만 감독은 속이 울렁거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대만 감독은 머릿속으로 두 배우를 떠올렸다. 좀 더 좋은 장면, 좀 더 좋은 배경.

떠오르는 이미지들에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사이 전화를 끊은 이한솔 대표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사장님!”

이스케이프의 투자자, 플러스+코리아의 지사장이었다. 이한솔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한 목소리였다.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이 우리 영화에 나온답니다!”

-……네?

“에반 블록하고 리첼 힐이요!”

휴대폰 건너가 조용했다. 이한솔은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휴대폰 액정을 바라봤다. 하지만 통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최대만 감독도 귀를 기울였다.

-……!!!

곧 지사장의 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성을 잃은 모양인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온갖 격한 단어들이 들려왔다.

그 커다란 소음에 이한솔 대표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이런 반응을 원했다.

이한솔이 통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도와주신다던 특수분장팀 말입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에반 블록이랑 리첼 힐 이야기부터 해주세요. 진짜입니까? 이건 정식 기사로 내도 사람들이 안 믿을 소식일 겁니다!

지사장의 말에 이한솔도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최대만 감독도 동의했다.

[이서준x에반 블록x리첼 힐, 한국 영화 출연!]이라니. 만우절이냐는 댓글만 수십, 아니 수백 개 달릴 게 뻔했다.

이한솔이 웃으며 폭풍이 몰아쳤던 그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겸사겸사 할리우드 특수분장팀의 이야기도 나왔다. 말없이 이한솔의 이야기를 듣던 지사장이 입을 열었다.

다짐하듯, 묵직한 목소리였다.

“최고의 특수분장팀을 준비하죠.”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 * *

커다란 폭풍이 지나가고, 영화 ‘이스케이프’의 프리프로덕션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서준 배우 이외의 주연 배우입니다.”

“최대만 감독님이 말해주신 배우분들에게 대본을 보냈는데, 답변이 없더라고요.”

“저는 답장은 오긴 했는데, 휴식기랍니다.”

“대충 이해는 갑니다. 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데다가 흥행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좀비 영화니까요.”

“우리한테는 무시무시한 비밀병기가 있지만요.”

반짝이는 이서준을 떠올린 직원들이 후후후 악당 같은 웃음을 뱉어냈다.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이한솔 대표와 박재민 조감독도 후후후 웃었다.

아직 직원들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에반 블록, 리첼 힐이라는 두 번째 비밀병기까지 있었다.

후후후.

회의실을 가득 채우던 악당 같은 웃음소리가 멈추었다.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아직 섭외된 배우가 없습니다.”

“인물들의 나이대를 조금 낮추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올리든가요.”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좀비 엑스트라들도 구해야 하는데 말이죠.”

“좀비 움직임이 독특하니, 촬영 현장에서 바로 연기하긴 힘들 테니까요.”

“한 달까진 아니어도 따로 모여서 연습하면 좋죠.”

“근데 좀비 움직임을 가르쳐 줄 선생님이 있나요?”

직원들의 물음에 박재민이 답했다.

“댄스 종류 중에 본 브레이킹이란 게 있거든요.”

회의실 한쪽 벽에 스크린이 천천히 내려왔다.

본 브레이킹. 이름부터 무시무시했다.

재생되는 동영상을 보던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의 관절이 기이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세상에…… 저런 춤이 있었어?

“저건…… 단역 배우분들이 하기엔 어렵지 않을까요?”

“본 브레이킹 댄스팀의 팀원분들을 섭외했습니다. 주요 좀비들은 이분들이 맡아줄 겁니다.”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경이 될 촬영장소는…….”

말을 하던 직원이 텅 빈 자리를 바라보고 말을 멈추었다. 원래라면 최대만 감독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였다. 다른 직원들이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품으로 세 번째.

여전히 배경이 될 장소는 직접 찾아다니는 최대만 감독이었다.

이한솔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촬영장소는 최 감독님이 잘 찾아오실 겁니다. 다음은?”

“고주원과 같은 양궁부 소속의 친구들입니다. 영화 속에서 중학생인 만큼 아역 배우들을 섭외해야 합니다.”

“이건 오디션으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오늘 바로 공고 올리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회의는 계속되었다.

* * *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책상 위에 축 늘어졌다. 하나같이 모두 지친 얼굴이었다. 여름방학의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학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오디션 준비한다고 방학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오디션까지 떨어지다니.”

“난 주경이까지 떨어질 줄은 몰랐어.”

재한의 말에 책상에 늘어져 있던 주경이 벌떡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게 다 짜고 치는 오디션이었다니! 확 망해버리라지!”

“망한 것 같은데? 기사도 하나뿐이야.”

겨우 하나 뜬 기사를 찾아낸 주희가 비웃으며 말했다. 주희의 말에 통쾌하게 웃던 주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러면 뭐해. 다 지나간 일인걸. 이제 뭐 하지?”

주경의 말에 재한이 말했다.

“난 그냥 졸업 공연을 도와야 할 것 같아. 오디션 경쟁률도 빡세고…….”

“이제 2학기니까 우리도 할 수 있겠네.”

“점심 먹고 게시판 보러 가자.”

“그래.”

오늘도 맛있는 점심을 먹고, 서준과 친구들은 게시판으로 향했다.

여울 예중 게시판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누구인지 알아챈 서준과 아이들이 얼른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 다들 게시판 보러 왔어?”

“네!”

아이들을 본 선생님이 환하게 웃었다. 막 새로운 공고를 붙이려던 참이었다.

“이거, 방금 찾은 오디션이야.”

“무슨 오디션이에요?”

“좀비 영화래.”

선생님의 말에 친구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좀비? 한국에서 좀비 영화를 찍는대요?”

“와! 재밌겠다.”

‘좀비’라는 이야기에 서준도 눈을 반짝였다.

얼마 전에 아역 배우 오디션을 열거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벌써 여울 예중 게시판에 붙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보니까 참 신기하네.’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오디션 공고를 학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신기한 기분에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이 붙여놓은 오디션 공고를 읽어갔다.

“좀비 역이면, 얼굴은 못 알아보겠네.”

“그러게. 근데 좀비 역을 하는 것도 되게 희귀하지 않아?”

“그렇지. 한국에서 좀비 영화라니…… 신기하다.”

“움직임이 독특해서 공부하기는 좋을 것 같은데…….”

오디션 공고를 읽던 세 친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서준은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얼마 후, ‘한국형 좀비 영화’가 나올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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