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83화
엘프.
엘프란 무엇인가.
대다수의 판타지 속에서 아름다운 외양을 지니고, 정령을 다룰 줄 알며, 자연과 벗 삼아 지내는,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종족이었다.
수많은 전생 속, 이름만 같고 성격이 완전히 다른 종족들도 있었지만, 서준이 겪었던 ‘엘프의 삶’ 중 반이 그러한 개념과 비슷했다.
“흐흐흐.”
오늘따라 일찍 잠자리에 든 서준이 생의 도서관의 문을 보며 수상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스케이프’의 주인공 중 하나인, 서준이 연기할 ‘고주원’은 중학교 양궁부 선수였고, 전국소년체전에서도 매번 1등을 놓치지 않는 선수라는 설정이었다.
시놉시스에서 자신이 맡을 역이 양궁 선수라는 걸 발견했을 때는 엄청 신기했다. 작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만나기 드문 직업이 아닌가.
여러 운동을 취미 삼아 하는 서준도 양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있었다.
“엘프 하면 활! 활 하면 엘프이지!”
서준은 물론이고, 다른 때보다 반짝반짝한 서준의 아우라가, 아기 때부터 다뤄온 [(선)엘프의 기초호흡]이 들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삶의 책들과 책장이 있었지만 서준은 멈추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하나하나 책의 제목을 살펴보던 평소와는 달리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다른 생의 도서관들과 합쳐진 도서관은 넓었다. 넓은 도서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서준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책장 앞에 선 서준은 기쁘면서도 허탈한 얼굴이었다.
“……진짜 찾기 쉽네.”
슬쩍 살펴봐도 ‘활’을 다루는 능력이 아주 많았다.
서준의 앞에 있는 책꽂이는 엘프의 삶들이 모인 책장이었다. 이 책꽂이뿐만이 아니라 이 주변의 책장은 전부 ‘엘프의 삶’이었다.
이 책꽂이만 해도, 꽂혀 있는 능력 중 3할이 ‘활’을 다루는 능력이었고, 이제 여기서 적당한 책을 고르면 끝이었다.
알맞은 능력을 찾을 때까지 생의 도서관을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녔던 평소와 달리, 너무 쉬운 능력 찾기에 서준은 허무하게 웃었다.
“진짜 검색 능력이 필요해.”
하지만 서준은 아직 생의 도서관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 서준은 굳게 닫혀 있는 커다란 문들과 그 안에 있을 능력들을 떠올렸다. 생의 도서관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검색 기능을 넣어야지.”
굳게 다짐한 서준은 다시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엘프의 삶이 가득 꽂힌 책장에서 ‘활’과 관련된 책들을 하나둘 꺼냈다.
삶의 책이 많은 만큼 비슷한 능력도 있었고, 다른 능력도 있었다. 어떤 능력이 마음에 들면, 그 뒤에 읽은 삶의 능력이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책장이야 쉽게 찾았지만,
“종류가 많으니까, 선택하기가 힘들어!”
서준이 질린 얼굴로 1차로 골라놓은 책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많은데, 벌써 서준의 앉은키만큼 쌓여 있었다. 얼핏 봐도 10권은 넘을 것 같았다.
“음. 어쩌지?”
이것도 괜찮아 보이고, 저것도 괜찮아 보였다. 많고 많은 삶 사이에 앉은 서준은 고민에 빠졌다.
* * *
사람이 적은 평일 오전. 교외의 실외양궁장.
코코아엔터는 몇 시간 동안 실외양궁장을 대여했다. 그 스케일에 영화드림 제작사에서 영화촬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 섭외한 양궁 선수, 조영훈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깔끔한 하늘색 운동복을 입은 서준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영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생님.”
서준의 말에 조영훈도 환하게 웃었다.
“서준이 양궁 해본 적 있어?”
“아뇨. 내의원 때 촬영하느라, 국궁은 잠시 해본 적은 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려서 화살은 쏴보지도 못하고 몇 번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럼 처음부터 배워야겠구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서준의 실력을 파악한 조영훈은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양궁장 한편에 서 있던 안다호가 미리 준비한 서준에게 맞는 장비들을 들고 왔다. 조영훈이 추천해 준 장비로, 중학생 양궁 선수들이 가장 많이 쓰는 장비들이었다.
조영훈은 서준의 장비를 체크해 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건 손목을 보호하는 암가드야. 옷 위에 착용하면 돼.”
팔꿈치 아래쪽에 단단한 암가드를 착용했다. 더운 여름이지만 단단한 활시위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서준은 긴 팔을 입고 있었다.
“이건 손가락을 보호하는 핑거프로텍션.”
서준의 손가락에 까만 핑거프로텍션이 끼워졌다. 어색한 양궁 장비에 서준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처음 해보는 양궁 장비에 서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 기색을 느낀 조영훈이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건 체스트가드. 현이 옷에 걸리면 다칠 수도 있거든.”
삼각형의 체스트가드를 가슴께에 맨 서준은 차례차례로 장비를 입어나갔다. 이곳저곳을 꼼꼼히 확인한 조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활 잡는 것부터 연습해 볼까?”
“네!”
조영훈이 한쪽에 있던 기다란 활을 하나 가지고 왔다. 영화드림 제작사에서 서준에게 맞춰 준비한 활이었다.
“중학생 선수들이 가장 많이 찾는 회사의 모델이야. 영화 촬영 때도 이걸 쓸 예정이라고 들었어. 처음엔 어색해도 나중에는 익숙해질 거야.”
“네.”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훈은 서준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은 미리 들었다. 영화 내용은 자세히 모르지만, 활을 쏴야 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니, 자세만 정확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조영훈은 서준에게 양궁의 기본 자세인 스탠스부터 화살을 쏘기 직전인 릴리스 전까지의 과정을 천천히 가르쳐 주었다.
“오…….”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조영훈은 감탄했다.
서준에 대해서는 조영훈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축구나 태권도 등의 운동을 아주 잘하고, 일 년 배운 바이올린도 수준급. 그런 대단한 재능을 가진 아이도 있구나, 감탄했는데 그게 양궁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서준아. 혼자 해볼래?”
“네!”
서준은 조영훈이 가르쳐 준 대로 자세를 잡았다. 엘프들의 방식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 근원은 바뀌지 않았다.
‘중심을 잡고, 가볍게. 그리고 호흡.’
두 발을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중심을 잡는다. 허벅지에 맨 전동(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현에 화살 끝을 끼운다. 현을 오른손 손가락에 끼우고 왼손으로 활을 가볍게 잡는다.
여기까지 아직 활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가볍게 숨을 내쉰 서준이 활을 들어 올려 화살 끝으로 과녁을 겨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호흡을 유지하며 바른 자세로 서서히 현을 몸쪽으로 잡아당긴다. 그러면 입술 근처까지 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화살을 손으로 놓기 전, 완벽한 서준의 자세에 조영훈은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냈다.
양궁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안다호가 봐도, 프로 같은 모습이었다. 안다호가 조영훈에게 물었다.
“서준이가 잘하는 겁니까?”
“그럼요. 그냥 잘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잘하네요. 자세만 봐서는 선수 못지않습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의 시위가 다시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화살을 쏘는 것은 배우지 않은 서준은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서준의 모습에 조영훈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이 화살 한번 쏘게 해봐도 됩니까?”
“안 다칠까요?”
“괜찮습니다. 장비도 잘 착용하고 서준이 정도로 정확하면 다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 서준이한테 물어보죠.”
조영훈의 권유에 서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만 연습하라는 선생님과 다호 형의 당부에 열심히 자세만 연습하고 있어,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조영훈은 안전을 위해서 다시 한번 장비를 체크했다. 릴리스 된 시위에 다치지 않게 체스트가드와 암가드를 단단히 매주며 말했다.
“저기 15m 과녁이 보이지?”
멀찍이 알록달록한 과녁이 보였다. 그 앞에 15m라고 적힌 팻말이 있었다.
“네.”
“먼저 저기를 노려보자.”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제 자리에 섰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두 다리를 자연스럽게 벌려 중심을 잡는다. 화살을 하나 들어 활 위에 올려놓는다. 숨을 들이쉬며 제 상체만 한 활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후우.
15m라고 적힌 과녁에 화살을 겨눈 서준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팽팽한 시위를 거침없이 뒤로 당겼다. 시선은 절대로 목표에서 떼지 않았다. 입술과 턱에 바짝 붙은 현이 서준의 볼을 눌렀다.
‘집중하고.’
[(선)엘프의 기초호흡]이 서준의 몸의 떨림을 없앴다.
멀리 떨어진 과녁이 마치 카메라가 줌인하는 것처럼 커다랗게 변하고 있었다.
서준이 멈춰 있는 모습에, 조영훈도 안다호도 숨을 죽였다. 오늘이 분명 처음일 텐데도 몇 년은 활을 다룬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벌레 소리와 새소리마저 적막한 와중, 서준이 움직였다.
현에 닿지 않게 조심히 현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았다. 쉭-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멀리 있던 과녁에 텅! 하고 화살이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집중하고 있던 조영훈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텐!”
그렇게 외치고는 본인이 더 놀란 것 같았다.
텐? 처음인데 텐이라고?
조영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후우, 활을 아래로 내린 서준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과녁의 정중앙을 맞힌 서준에게 안다호가 박수를 보냈다.
“잘했어! 서준아!”
“에헤헤헤. 고마워요. 다호 형. 선생님. 30m 쏴 봐도 돼요?”
“어? 어, 그래.”
서준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이던 조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서준이 자세를 잡았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린 안다호가 서준의 부모님께 보내줄 용도로 서준의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양궁 장비를 갖춘 서준의 모습이 색다르기도 해 영화를 홍보할 때 서준의 팬들에게 보여줘도 좋을 것 같았다.
‘최대만 감독님께도 보내고, 이한솔 대표님한테도 보내고.’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텅! 하고 화살이 꽂히는 소리와 함께, 조영훈이 외쳤다.
“텐!”
30m.
텅!
“텐!”
50m.
텅!
“……텐!”
60m!
세상에.
중등부 최대 거리가 60m였다. 그걸 오늘 처음 하는 애가 10점을 맞힌다고?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양궁 선수로 지냈던 조영훈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거 전부 엑스 텐인 거 아니야?”
믿을 수 없는 진실에 조영훈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과녁의 정중앙을 맞히는 엑스텐(X-TEN). 예전 올림픽 때는 카메라가 있던 자리였기도 했다. 조영훈도 컨디션이 좋을 때 몇 번 맞히기는 했지만…… 세상에.
“서준아, 한 번만 더 쏴 봐. 이번에 동영상으로 찍게.”
“엄마 아빠한테 보내게요?”
“응. 두 분 다 궁금해하실 거야.”
“네! 멋지게 찍어주세요. 다호 형!”
안다호의 말에 서준이 환하게 웃으며 다시 화살통으로 손을 옮겼다.
‘엄마 아빠한테 보여줄 거니까, 더 잘해야지!’
잔뜩 신이 난 서준과 안다호와는 달리, 많은 양궁 선수의 봐왔던 조영훈과 두 사람의 평화로운 대화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오늘 처음 배운 애가 연속으로 엑스 텐이라고! 그것도 다 다른 거리에서!’
입을 뻐끔뻐끔거리던 조영훈이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
이 정도 실력이면, 양궁으로 세계제패하는 영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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