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82화
“……라고 하더라구요. 진짜 뭐든지 할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투자 회의가 끝난 그 날 저녁.
이한솔과 최대만 감독, 박재민 조감독이 저번에 만났던 고깃집에서 다시 모였다.
이한솔의 말에 소주를 마시려던 최대만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매니저님 말씀으로는 조용히 투자금만 줬다고 들었습니다만?”
옆자리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박재민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촬영하는 거 보러온 것 빼고는 별말 없었다고 하시던데요.”
고기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이한솔이 말했다.
“그것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역이 사극이라서 뭐가 필요한지 잘 몰랐다고 하시더라구요. 잘 모르는 사람이 도움을 준다고 해봤자, 역의 우정한 감독님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최대만 감독과 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극의 대가인 우정한 감독보다 사극 영화를 찍을 때 필요한 것들을,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감독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우리 작품은 좀비 영화지 않습니까. 좀비물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 미국인 데다가 플러스 오리지널 좀비 드라마도 있고.”
“아, 그거 재미있던데요. 분장도 안 어색하고.”
박재민의 말에 이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었다.
“잘 아는 분야가 나와서 잠깐 흥분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잠시 흥분했다기에 다시 처음부터 이야기를 나누나 싶었다. 하지만 지사장은 한 번 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파란 눈을 번뜩이며 이한솔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솔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한솔이 최대만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제작비의 최대치는 200억. 그것도 한국에서는 블록버스터급이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한국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촬영하게 될 것 같았다. 할리우드에서 블록버스터급이 되려면 최소 1,000억. 예상했던 제작비의 5배나 되는 금액이었다.
“1,000억!”
개인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고기 굽는 소리만 들렸다. 최대만 감독도, 박재민도 침을 꼴깍 삼켰다. 이한솔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금액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이한솔은 감독님과 상의해 보겠다고 대답하며 플러스+코리아 지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상에. 제가 돈 준다는 말에 도망칠 줄은 몰랐습니다.”
소주를 들이켠 이한솔이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도망치듯 나온 자신이 황당하기만 했다.
“……받으면 안 돼요? 많이 준다는데. 우리도 할리우드처럼 쾅쾅! 펑펑! 터지게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박재민의 말에 최대만 감독이 볼을 긁적였다. 제작비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없는 것보다야 많은 게 나으니까.
하지만 이건 상업영화였다. 거기다 큰 비용을 쓴다고 해서 예상만큼의 이익이 돌아오는 사업도 아니고, 아무리 큰 비용을 쏟아 넣어도 쫄딱 망할 수 있었다.
“받으면 좋지. 근데 상업영화인 이상 수익을 생각해야 하되. 1,000억 들어서 손익도 못 채우면 우리 회사 망하는 거야.”
영화드림 제작사의 투자자, 최대만 감독의 말에 이한솔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박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가의 보도가 있지 않은가.
“서준이도 있는데 망할까요?”
“서준이 팬들이야 한 번은 보겠지. 그걸 다회차 관람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게 작품이고. 오히려 서준이가 나왔는데 망하면 내 감독 인생은 망한 거야.”
“우리 회사도요.”
최대만 감독이 입을 열었다.
“투자금은 적당히 받죠. 넘치게 받으면 쓸데없는 곳에 쓸 것 같으니까.”
이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를 한 잔 마신 최대만 감독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만한 제작비를 쓸 엄두도 안 나고, 괜히 헛바람 들었다가는 작품을 망칠 것 같으니까요.”
최대만 감독이 생각했던 이번 영화의 제작비는 겨우 200억…… 최대만 감독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겨우라니……200억이 무슨 겨우야!
최대만 감독이 냉수를 들이켜며 부풀어 올랐던 마음에 찬물을 뿌렸다. 벌써 헛바람이 든 것 같았다.
하여튼, 생각했던 예산은 200억 정도였는데(그것도 최대치), 괜히 1,000억을 받아서 이것저것 넣었다가는 오히려 잡탕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대본이 나오면 왠지 서준이도 안 찍는다고 할 것 같고요.”
5번 도전했다 실패한, 최대만 감독의 느낌으로는 그렇게 대본과 시놉시스의 내용이 달라진다면, 서준이 출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앗. 그러면 안 되지!
흥행의 일등공신이 될 배우의 출연 여부에, 화들짝 놀란 이한솔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200억으로 가죠!”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고기를 한껏 넣어 쌈 싸 먹고 있던 박재민이 말했다.
“그럼 카메라는요? 할리우드에서 쓴다던 카메라 있잖아요. 촬영감독님 버킷리스트가 그걸로 찍는 거라던데…….”
박재민의 말에, 막 고기를 집으려던 최대만 감독의 손이 흠칫, 떨렸다.
카메라!
생각도 못 했다. 항상 찍던 거로 찍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최대만 감독도 촬영감독의 버킷리스트에 오른 카메라를 알고 있었다. 그걸로 찍은 영화는 색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오디오 장비도 비싸서 못 썼던 거 있잖아요. 그거. 음향감독님이 엄청 좋아하실 텐데!”
최대만 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감독이 나타내고자 하는 조그마한 소리까지도 살려주던 녹음 장비.
최대만 감독은 비싼 카메라와 녹음 장비로 찍을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려봤다.
‘젠장, 때깔은 죽이겠네.’
고기를 잘근잘근 씹던 최대만 감독의 시선이 이한솔에게로 향했다. 최대만 감독의 눈빛을 이해한 이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몇 마디로 최대만 감독의 물욕을 자극한 박재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영화의 촬영 장비만큼은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을 것 같았다.
* * *
최대만 감독이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로 정식 대본을 만드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다.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만끽하고 있었고, 역은 영화관에서 내려와 플러스+에 업로드되었다.
>양주희 : 오디션 봤어!
>김주경 : 나도! 주희랑은 다른 오디션이야.
<둘 다 붙었으면 좋겠다!
>강재한 : 난 아직 서류심사 중ㅠ 얼른 결과 나왔으면 좋겟어ㅠㅠ
여울 예중 1학년들은 바빴다. 연기학원에서 열심히 배우고, 오디션을 신청하고 면접을 봤다.
열심히 도전하고 있는 친구들처럼 서준도 할 일이 많았다. 조금씩 늘어나는 대본을 확인하고 촬영을 준비하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리첼 : 이번 여름엔 미국 안 와?
리첼 힐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작년 여름방학 때, 잠시 미국에 여행을 갔었다. 잭의 야구시합도 보고, 에반과 리첼과 만나서 신나게 이야기도 나누었다. 큰일이 없으면 방학 때는 미국으로 여행을 가는 터라, 이번에도 오나 물어보는 것이었다.
몸을 풀고 있던 서준이 답장을 보냈다.
<지금 촬영 준비 중인 게 있어서 촬영 전까지 배워야 하는 게 있거든요. 그거 배운다고 좀 바빠요.
>에반 : 벌써 다음 작품 준비해?
<네. 좋은 작품이 들어와서요.
>리첼 : 뭐야? 어떤 작품인데? 한국 영화야?
<네. 악령 감독님이랑 같이 찍어요.
>에반 : 악령!
>리첼 : 그거 알아!
>에반 : 어떤 영화인지 기대되네. 이번에도 엑소시즘이야?
에반의 질문에 서준이 히히 웃었다.
<좀비 영화예요.
>리첼 : !
>에반 : !
한 번도 좀비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었던 할리우드 배우, 에반 블록과 리첼 힐의 놀람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 * *
영화제작사 영화드림의 대표가 된 이한솔은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갔다. 제일 먼저 사무실을 구하고 직원들에게 연락했다. 복직을 받아들인 직원은 적었지만, 이한솔은 만족했다. 이한솔이 생각했던, 꼭 필요한 직원들은 대부분 승낙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이에요.”
어색한 얼굴로 새로운 사무실에 출근한 직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다들 익숙한 얼굴인데, 몇 달 만에 만나게 되니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 미묘한 분위기에 이한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엄청 승진하셨네요. 팀장님. 아니다, 이제 대표님이시지!”
대표가 바뀌기 전부터 홍보팀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직원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이한솔도 마음 편하게 웃었다.
“저를 믿고 다시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두 앞으로는 어쩌나, 걱정하고 있겠지만, 우리 영화드림은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해봅시다.”
이한솔 대표의 말에 직원들이 박수를 보냈다.
“오늘부터 영화드림은 새 작품 제작에 들어갑니다.”
“……벌써요?”
몇 달은 있어야 새 작품을 구할 줄 알았던 직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금방 새 프로젝트를 구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한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작품을 함께해 주셨던 최대만 감독님의 작품입니다. 이번에 제가 회사를 인수할 때 도움을 주셨죠.”
최대만 감독이면 작업도 편하고 실력도 있는 감독이니 아예 적자를 보진 않을 터였다. 어쩌면 다시 튼튼한 회사가 될 수도 있을지도. 직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장르가 뭐죠?”
“이번에도 비주류인가요?”
그럼에도 불안한 건 영화드림 제작사의 영화들이 그다지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라는 거였다. 이한솔이 말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이스케이프입니다.”
직원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스케이프(Escape) 탈출?
재난물인가?
나쁘지 않았다. 재난물은 CG가 좋으면 제법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CG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 일장일단이긴 했다.
아니면, 감옥 탈출 영화 같은 건가?
그렇다면 장소는 감옥 내부가 대부분일 터였다. 제작비가 많이 줄겠지만, 볼거리가 화려하지 않아 흥행은 온전히 대본과 배우들의 연기에 달렸다.
백수 생활로 굳어 있던 직원들의 머리가 팽팽 움직였다. 다들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때 이한솔이 말했다.
“좀비 영화입니다.”
……네?
직원들이 멍한 얼굴로 이한솔을 바라보았다.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영화드림 대표, 이한솔이 다시 한번 말했다.
“좀비물입니다.”
그 한마디에, 회의실 내에 있던 직원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망했구나!’
직원들의 경악 서린 얼굴에, 이한솔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몇 번을 해도 참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아직 놀랄 일은 남았지만 말이야.’
“그리고 주연은 이서준 배우고요.”
……? 이서준?
역 촬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생각지도 못한 배우의 등장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만 뻐끔뻐끔거리던 직원 중 하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대표님.”
“네?”
“……사기당하신 거 아니세요?”
!
직원의 물음에 직원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떴다. 엉망진창이던 머릿속이 그 말에 깔끔해졌다.
그렇구나! 사기! 사기구나!
이한솔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짠해졌다.
‘우리 팀장님……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직원들의 눈빛에 이한솔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사기라고 생각할 줄이야.
‘뭐, 이서준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말이 없는 이한솔의 모습에 직원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사기구나!
“괜찮아요. 팀장, 아니, 대표님. 우리가 얼른 새 작품 찾아볼게요!”
“벌써 계약서 쓰신 건 아니시죠?”
“이 대표님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경찰, 경찰서에 신고할까요?”
사기라고 단정 지은 직원들이 애써 돌아온 직장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해결책을 찾고 있을 때, 이한솔은 말없이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눌렀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스크린에 누군가의 사진이 비쳤다.
프로젝트 빔에서 비치는 빛에, 떠들던 직원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헉!
금방이라도 경찰서에 전화할 것 같았던 홍보팀 직원이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휴대폰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스크린만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진짜…….”
바늘이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적막함 속에 영화드림 제작사의 이한솔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소름 돋는 목소리였다.
“이스케이프의 주연 배우, 이서준 배우입니다.”
스크린에 한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진지한 표정으로 기다란 활을 들어 입술 근처까지 시위를 당기고 있는, 배우 이서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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