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80화
서준이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다호가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들고 온 종이 상자를 거실 테이블에 올려둔 안다호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종이 상자를 바라보는 서준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매일같이 대본을 봐도 저렇게 즐거울까.’
서준의 대본 사랑이 참 신기했다. 안다호가 입을 열었다.
“이게 저번 주에 들어온 거야.”
“고마워요. 다호 형. 뭐 마실래요? 주스? 커피?”
서준의 물음에 안다호가 잠시 고민했다. 서준의 집에 들를 때마다 항상 하는 고민이었다. 서준은 고민에 빠진 안다호를 이해했다.
서준의 집에는 여러 나라의 음료와 간식들이 많았다.
미국에서 나라 이모가 상자 채로 보내기도 했고, 해외 촬영이 있을 때면 리첼 힐과 에반 블록 등 배우 지인들도 그 나라 간식과 음료들을 보내기도 했다.
서준은 그중 맛있는 간식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주고, 희상이 삼촌과 찬이 삼촌에게도 주었다. 학교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코코아엔터에도 가져갔다. 촬영이 있을 때면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 덕에 코코아엔터의 각 층 휴게실은 전 세계의 과자들과 음료수들이 가득했다.
입이 심심할 때면 언제든 휴게실에 들러 많은 간식 중 취향에 맞는 과자와 음료수를 골라 먹을 수 있는 직원들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컴백 준비를 해야 하는 가수들과 체중을 조절해야 하는 연습생들은 눈물을 머금고 휴게실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활동이 끝나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가장 먼저 먹을 음식이 코코아엔터 휴게실의 간식들인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서준은 다 처리했다 싶으면 오는 간식들의 행렬에 몸서리를 쳤다.
다 못 먹는다고 말해도 나라 이모와 지인들은 친구들에게 주라면서 보내고는 했다. 서준도 그 보답으로 열심히 한국의 과자들과 음료수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수많은 지인의 선물 공세를 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또 찾아올 간식의 행렬을 떠올린 서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커피 있어?”
“잠시만요. 프랑스에서 친구가 보내준 게 있어요.”
“프랑스라면 찰리?”
“네. 프랑스에서 역 개봉했잖아요. 엄청 울면서 봤대요. 단종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과자랑 음료수랑 여러 가지 보내줬어요.”
금세 안다호가 마실 따뜻한 프랑스산 커피와 서준이 마실 토마토 주스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새빨간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신 서준이 헤헤 웃었다. 오늘 아침, 이민준이 손질하고 서은혜가 믹서기로 간, 엄마 아빠의 사랑이 듬뿍 담긴 토마토 주스였다.
대본을 볼 동안 마실 음료까지 준비하고 서준과 안다호는 항상 자신이 앉던 자리에 앉았다.
“이건 예능 프로그램 목록.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안다호가 종이 상자 맨 위에 있던 예능 방송 목록을 서준에게 건넸다.
프로그램 이름과 서준이 출연하면 하게 될 소재와 진행 방향이 적혀 있었다. 워킹맨!도 빠지지 않고 있었고 다른 방송국의 프로그램도 많았다.
퀴즈부터 요리까지, 소재도 다양했다.
‘한번 해보면 재미있겠지만,’
서준은 볼을 긁적였다.
“지금은 별로 안 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서준의 말에 안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시원한 안다호의 대답에 서준이 웃었다.
다음은 얇은 시놉시스.
서준은 가볍게 예능 목록을 훑던 모습과 달리,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조용한 거실에는 서준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이건 별로고. 이것도 별로…… 이건 마음에 안 드네.’
서준은 말없이 대본을 읽었다. 하지만 배우가 말하지 않아도 매니저는 배우의 생각을 파악했다. 대본을 빨리 넘기는 서준의 손짓, 꿈틀거리는 눈썹, 삐죽거리는 입술.
‘이번에도 서준이 마음에 드는 건 없나.’
안다호도 하루아침에 그런 작품을 찾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역 촬영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고…….’
하지만 그럼에도 안다호는 저 작품은 서준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목록, 시놉시스, 대본 순으로 넣어 놓는 종이 상자에 이번만 특별히 맨 밑에 놓은 얇은 시놉시스 하나. 서준이 그 시놉시스를 들어 올렸다.
서준은 낯익은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대만 감독님 작품이네요. 이번이 6번째죠?”
“기억하고 있었어?”
“네. 최대만 감독님이잖아요.”
생애 첫 광고 감독님이었고, 함께 영화를 찍기도 했다. 오히려 잊어버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까.
‘게다가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시기도 했고.’
좋은 감독님이지만, 공은 공이었고 사는 사였다.
지금까지 퇴짜를 놓고,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짜 놓을 생각인 냉정한 배우가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시놉시스를 읽어 내려갔다.
새하얀 종이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 사연과 작품의 줄거리가 쓰여있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읽던 서준의 얼굴에 반응이 생겼다. 조용히 서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안다호도 알아차렸다.
시놉시스를 읽는 서준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얼굴이 생기가 돌았다.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서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안다호는 생각했다. 이거구나!
“저 이거 하고 싶어요!”
환하게 웃는 배우의 모습에, 안다호도 환하게 웃었다.
* * *
최대만 감독의 집, 거실.
최대만 감독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모니터 구석에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올라왔다.
최대만 감독이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치고는 별 기대가 없는 얼굴이었다.
“스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메일함으로 향하는 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말의 기대와 희망이 꿈틀거렸다.
[(광고)오늘의 쇼핑! 물티슈×30…….]
하지만, 역시 광고 메일이었다.
최대만 감독은 스팸 메일만 잔뜩 있는 메일함과 하루 종일 잠잠한 휴대폰을 번갈아 보다가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글렀나?”
머리를 벅벅 긁은 최대만 감독이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거실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았다. 주변에는 새까만 잉크가 가득한 종이들과 아직 깨끗한 종이들이 가득했다.
“다음엔 뭘 적어야 하려나.”
이번에도 틀린 것 같으니 새 작품을 적어야 했다. 깨끗한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최대만 감독은 펜을 잡았다. 작품의 첫 구상은 손으로 이리저리 관계도를 그려가며 설정하는 게 편했다.
띠띠띠띠-
그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거실 바닥에 앉아 있는 최대만 감독을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작품의 첫 구상은 손으로 하고, 대본 작업은 컴퓨터로 하는 최대만이니, 이번에도 까인 것 같았다.
“형. 또 까였어?”
악령부터 함께한 조감독 박재민이었다. 악령 촬영 후 벌써 8년. 말을 높이던 박재민 조감독이 말을 편하게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집 비밀번호도 알고 있을 정도면 말 다 했다.
“그래.”
“이제 적당히 작품 하나 하지? 서준이랑 촬영한다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다가 그 이후로 촬영은 하나도 안 했잖아.”
내의원 때, 서준에게 거절당한 차기작을 개봉하고, 벌써 4년. 최대만 감독은 거의 1년에 한 번씩 새 시놉시스를 뽑아내고 있었다.
큼직한 가방을 부엌 식탁에 올려놓은 박재민 조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상상력도 대단해. 그게 그렇게 술술 나와?”
“옛날부터 적어놓은 아이디어 노트가 있으니까. 대본도 아니고 시놉시스는 제법 할 만해.”
“그렇다고 해도 대충대충 하는 것도 아니면서.”
박재민의 말에 최대만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큼직한 가방을 연 박재민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반찬 통을 하나둘 꺼내,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박재민의 부모님이 반찬가게를 하고 있어서 매번 사 먹고 있었다. 단골인 데다 아는 사이라서 가끔 박재민이 직접 배달해 주기도 했다.
“뭐. 형 알아서 해. 광고 촬영으로 돈 잘 버는 감독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넌 독립 안 하냐?”
최대만 감독의 말에 박재민은 깨끗하게 설거지 된 반찬 통을 가방 안에 차곡차곡 넣으며 말했다.
“난 형이 언젠가 이서준이랑 한 번 더 작업할 것 같거든. 그때 서준이랑 좀 친해지고 나서 독립하게. 그러면 나중에 내 작품에도 나와주지 않을까?”
최대만 감독 못지않게 낙천적인 박재민 조감독이었다. 최대만 감독이 피식 웃었다.
“서준이가 얼마나 작품 보는 눈이 좋은데…… 내의원에, 오버 더 레인보우에, 역까지. 삼 연속 대흥행이잖아. 좀 친해졌다고 출연하지는 않을 거다.”
“그거야 그렇겠지.”
인터넷에서는 인맥이다 뭐다, 말이 많지만 그게 사실이 아닌 걸, 6번이나 거절당한 최대만 감독과 박재민 조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돈은 형 따라다니면서 잘 벌고 있어서 괜찮으니까.”
서준의 첫 광고가 대박이 나면서 최대만 감독은 광고계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작품 활동이 없었던 요 4년 사이에는 광고계에서 더 이름을 알리고 있을 정도였고, 박재민 조감독도 최대만 감독과 함께 광고 일을 하고 있었다.
“본업만 잊지 마. 본업만.”
박재민의 나지막한 말에 최대만 감독은 생각에 잠겼다.
본업.
머리를 긁적인 영화감독, 최대만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새로 시놉시스 만들 건데…… 이걸로 작업하자.”
“제일 처음에 섭외하는 건 서준이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박재민의 모습에 최대만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야. 까여도 촬영한다니까.”
“알았어. 알았어.”
최대만 감독은 다시 펜을 잡고 종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대만 감독의 집에 익숙한 박재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사이트들을 돌아다녔다.
7월.
이서준이 열연한 영화 역逆은 아직도 뜨거웠다. 천만을 넘긴 지는 옛날이었고, 어느 정도 성적을 거둘까? 다들 말이 많았다.
이서준에 대한 글들을 읽고, 차기작에 대한 네티즌들의 예상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조감독의 눈에 모니터 구석, 빼꼼 올라와 있는 알림이 보였다.
메일 알람이었다.
“형, 이거…….”
아이디어 노트를 살피며, 새로운 시놉시스에 푹 빠져 있는 최대만 감독의 모습에 볼을 긁적인 박재민이 알림을 클릭했다.
‘뭐, 스팸이겠지.’
별생각 없이 메일을 살피던 조감독이 몸을 굳혔다.
발신인. [코코아엔터]
그 다섯 글자에, 박재민의 심장은 두근두근 뛰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던 박재민의 눈알이, 천천히 옆으로 굴러갔다.
길다면 긴 메일 속 단어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최대만 감독님. 시놉시스. 잘 봤습니다. 이서준 배우. 출연 결정…… 결정?
출연 결정!
거의 되새김질하면서 메일을 읽던 박재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형! 이거 봐!”
쩌렁쩌렁한 박재민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최대만 감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박재민의 얼굴은 흥분한 듯 시뻘게져 있었다.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번쩍 든 채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으아! 으아악!”
최대만 감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자식…… 술 먹었나?
환호성을 지르던 박재민이 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대만 감독을 향해 외쳤다.
“왔어! 왔다고!”
“뭐가 와?”
“메일……!”
따르릉.
그때, 최대만 감독의 휴대폰이 울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박재민의 상기된 얼굴과 흥분한 몸짓, 오늘 처음으로 울리는 휴대폰.
무언가를 감지한 최대만 감독의 심장도 커다랗게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배우 이서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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