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77화
-……들어본 것 같은데?
-국사 시간에 들어본 것 같다ㅎ
모니터에 한글과 한자가 떴다.
[피휘避諱]
“이렇게 씁니다. 피할 피. 꺼릴 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임금이나 높은 사람의 이름에 쓰인 한자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겁니다.”
-아. 기억났다.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많이 쓰는 한자로 이름을 쓰면 그 한자를 아예 못 쓰니까 일부러 안 쓰는 한자로 왕 이름 지었다고 했음
“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보통 사람들이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를 써서 짓고는 했죠. 보통 성인 ‘이李’와 다른 한 글자 이름을 정하는데, 이홍위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세종대왕 이름은 유명하죠?”
-이도!
“네. 수양대군의 이름은 이유입니다. 보통 두 글자죠. 태종 이방원도 세 글자긴 하지만요.”
영화객이 말을 이었다.
“보통 왕족의 이름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수양대군도, 이유라는 이름 대신 수양 숙부라고 불리고, 성녕대군도 이종이라는 이름 대신 성녕이라고 불렸죠. 그만큼 조선 시대 왕족의 이름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왕족의 이름이 그런데, 하물며 임금의 이름은 어떻겠습니까.”
영화객의 말에 모두 역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
-설마…….
“네. 이홍위. 세조는 그때부터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냈습니다. 단종도 알았겠죠. 누가 감히,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결례를 저지를까요.”
-난 그냥 이름 부르는 줄 알았음. 왜. 엄마가 화나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잖아.
-222 나도 그런 건 줄.
-난 알고 있었지!
-알고 보면 더 소름.
“그리고 강돌과의 인연도 감동적이었죠. 물론, 이 이야기는 픽션이겠지만 말입니다. 단종이 살린 백성들의 마을에 유배 가면서 그들의 삶을 직접 보게 되다니, 단종에게 조금의 위로가 됐으면 싶었습니다.”
-근데 단종이 죽었을 때 슬퍼했던 사람들이 있을까요?
-ㅇㅇ 왕이었던 시기가 너무 짧잖아.
-ㅠㅠ 아무도 없으면 너무 불쌍함ㅠ
“3년을 조금 넘는 재위 기간이지만, 분명히 단종의 명으로 그렇게 살아남은 백성들이 있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전염병이 돌거나 자연재해가 있었다는 자료가 있거든요.”
-노산군일기?
-그거 왜곡 많다고 하지 않음?
영화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산군일기가 어디서 어디까지가 수정됐는지는 몰라도 자연재해와 전염병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런 사실들은 정난과 관계된 일은 아니니까요. 하여튼, 그런 백성들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 강돌의 마을처럼 단종의 죽음을 슬퍼했을 겁니다.”
-ㅠㅠ단종ㅠㅠ
-사약 먹었으면 나 진짜 대성통곡했을 뻔.
-직접 안 보여줘서 다행이었다ㅠㅠ
-안 보여줘도 엄청 울었음ㅠㅠ
-대사가 너무 슬펐어ㅜ
-단종 : ……이만하면 잘하지 않았나요?
-……또 눈물이 나오잖아.
-ㅠㅠ엄청 잘했지. 정말 잘했어.
영화객의 눈도 촉촉해졌다. 5번 넘게 봤는데도, 항상 눈물을 흘리게 하는 대사였다.
“저도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었습니다.”
먹먹한 영화객의 목소리에 채팅창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번 여름방학에 영월에 갈 예정이에요. 단종 유배지도 둘러보고, 장릉도 가서 기도 하려고요.
-22성녕대군 묘에도 갔었는데ㅎㅎ장릉에도 갈 예정임.
-장릉?
“단종의 묘를 장릉이라고 합니다. 숙종 때가 되어서야 왕으로 인정을 받았죠. 좋네요. 저도 시간 나면 영월에 여행을 가야겠습니다.”
-뜻밖의 영월 여행.
-근데 영월에서는 이미 준비 중이었다고ㅎ
-그래요?
-ㅇㅇ 이미 이서준이 역 찍는다고 말했을 때부터 열심히 준비 중이었대. 단종제랑 여러 가지 행사도 할 예정임. 영월군청 홈페이지 들어가 보면 행사 시간 있음.
-관계자예요?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영월군청 공무원도 영화객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화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월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시 영화 리뷰로 돌아가 보죠. 내의원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역에서도 죽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단종의 시체까지 보여주면 그 충격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감독이 예상했기 때문이겠죠.”
-나도 단종 시체 버려졌다는 거 알고 영화에 나오면 큰일이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안 나옴.
-안 나와도 충격적이었다. 엄청 울었어.
-22 세조 웃을 때까지만 해도, 저 새…… 놈 죽이고 나도 죽자. 그 생각했는데…….
-천벌이 내려졌음.
-천벌…… 무섭.
댓글을 읽던, 영화객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다시 떠올려도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단종이 죽고, 그 소식이 세조에게 전해졌죠. 이지석 배우가 연기를 너무, 너어무 잘해서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천벌은 따로 있었습니다. 저도 영화 보면서도 진짜 하늘이 내린 천벌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순간, 세조가 불쌍해졌거든요.”
-이지석 연기 진짜 잘함.
-근데, 이지석 연기만이라고 말하기에는…… 침소 안쪽이 무서웠당
-동감ㅎ
“네. 이지석 배우의 경악 가득한, 두려움 가득한 연기도 인상 깊었지만, 침소 안쪽은 진짜 뭔가 있는듯한, 이상한 기분이었죠. 건너건너 알아보니까, 침소에 이서준 배우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지석 배우와 함께 연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촬영 때도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음.
-근데 단종 살아 있는 거임?
“아니요. 죽었습니다. 아마, 세조가 이홍위라고 부른 것은, 그거겠죠. 열등감과 죄책감이 불러일으킨 환상 같은 거요.”
-? 지가 죽여 놓고 죄책감?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네?
-그러게. 그 정도 각오도 안 했대?
쿵짝이 맞는 댓글들에 영화객이 웃었다.
“각오는 했을 겁니다. 그 정도로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는데 그 정도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실제로 겪는 것은 달랐을 겁니다. 조선 시대, 왕은 하늘이 내려줬다고 합니다. 내의원을 봐서 아시겠지만, 과학보다 신을 믿는 시대였거든요. 그 하늘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팩트1) 아프다고 점 보는 시대였다.
-팩트2) 병 고치려고 제사를 지내는 시대였다.
“선왕 때도, 노산군 때도 단종이 ‘살아’ 있으니까 몰랐던 거겠죠. 죽어도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죠. 진짜 죽고 나서는 몰려온 겁니다.”
-죄책감?
“죄책감도 그중 하나겠죠. 가장 큰 건 아마도 두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녕전 침소는 역대 왕들이 지내던 곳입니다. 세종과 문종, 단종이 지냈던 곳이죠.”
-……헐?
“아마, 세조가 본 환상은 단종이 끝이 아닐 겁니다. 단종도 보고, 자신의 형인 문종도 보고, 아버지인 세종도 봤겠죠. 그곳에서 세조는 얼마나 문종과 세종을 떠올릴까요? 침소뿐만이 아니라, 궁궐 이곳저곳에서 단종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
열심히 이야기하던 영화객이 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멈춰버린 영화객의 모습에 채팅창이 폭발했다.
-왜?
-왜왜?!?
정신을 차린 영화객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오프닝 부분에…… 카메라가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
-설마……?!
채팅창이 잠깐 멈추었다. 그저 궁궐을 소개한다고 생각했던, 궁궐의 곳곳을 비추었던 카메라. 소름이 쫘악 끼쳤다.
“……전부 세조가 단종을 보았던 곳일지도?”
영화객의 말에 채팅창이 다시 폭발했다.
-어째서 사극에 귀신?! 귀시인?!
-저런 데서 어떻게 사냐고!ㅠ
-ㅎㄷㄷ강녕전 나가면 되지 않음?
-나 같으면 궁에 불지름ㅠㅠ
“조카를 죽이고 차지한 곳인데요? 그렇게까지 원하던 곳인데, 겨우 헛것 때문에 떠나겠어요?”
-헛것이라기엔 너무 무섭잖아요ㅜㅜ
“뭐, 금방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낮에는 멀쩡하고 밤에는 환상을 보았겠죠. 건강할 때는 모르더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병이 들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세조의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겠죠. 자신의 죄가요.”
-마지막 장면에서 세조를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1人
-세조 참 불쌍타 했던 1人
-천벌은 무섭구나.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지 했던 1人
세조를 불쌍히 여겼던 영화객도 고개를 끄덕였다.
“속 시원한 벌은 아닙니다만, 그렇게라도 벌을 받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영화 마지막은 완전 지옥같던뎋
-통쾌함ㅎㅎ
-영화만 보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잠을 자나 싶음.
-나도. 나 같으면 매일 같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과 제일 첫 장면이 이어집니다. 뫼비우스의 띠 같아서 무섭네요. 천벌.”
영화객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웃던 영화객이 입을 열었다.
“전 솔직히 이서준 배우의 실기 영상 전에는 단종을 그저 유약했던 어린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조의 이야기에 잠깐 나오는 엑스트라 같았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영화객이 포스터를 보았다. 어린 임금이 어좌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들러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세조에게 가려져 있던 단종의 삶에도 희로애락이, 보람이, 좌절이 있었습니다. 역에서의 단종은 백성을 돌보는 성군이었고,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임금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갔을지도 모릅니다. 우정한 감독의 말씀처럼 말이죠.”
-모두 허구일 수도 있고.
-어쩌면 모두 진실일 수도 있고.
영화객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역逆, 멋진 영화였습니다.”
* * *
모니터를 바라보던 최대만 감독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최대만 감독이 보고 있는 사이트는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물론, 역이 아직 상영 중이라 역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아니.
“역이라기보다는 서준이 이야기만 있지만 말이야.”
이서준의 작품에 울고, 웃고, 감동했던 사람들은 벌써부터 이 대단한 배우의 다음 작품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서준이가 영화 2번 했으니 이번엔 드라마인가?
-드라마가 더 좋긴 함. 길게 봐서ㅎ
-나는 일주일 기다리는 거 너무 싫어 ㅠ 영화가 더 좋음.
-재탕하기도 영화가 편함.
-그래서 내의원 재탕 안 함?
-합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난 연극. 어디서 또 깜짝 등장해 줬으면 좋겠다.
-22 이서준 연기 직접 보고 싶음
-333 다음 작품 스태프로 뛸 생각도 있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겠냐. 그렇게 안면 트고 나중에 섭외하면 될지도.
-이서준 의외로 인맥으로 일하는 듯
-시리즈 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지석으로 다 이어짐.
-내의원은 이서준 섭외가 먼저라던데?
-내의원 작감이 이지석 주연 드라마 재수사잖아. 이서준도 카메오로 나와서 작감이랑 안면 터서 내의원 나간 거고. 오버더레인보우도 뒤풀이 파티 때 사라 로트 감독이랑 만난 적 있다던데.
-친분이 있는 사람들 작품에 나온다는 거지?
-지금까지 그랬으니 친분 있는 사람들 작품이 좀 더 점수를 많이 준다는 거지.
최대만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그랬으면 내 작품이 그렇게 까이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까이고 들어간 드라마가 내의원이라서 원망도 못 했다. 수목드라마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드라마, 내의원. 이서준의 작품 보는 눈은 정확했다.
“망하진 않았지만…….”
이서준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최대만 감독의 작품은 괜찮은 영화였다. 손익분기점을 넘어, 아마 다음 작품도 쉽게 투자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서준이랑 작업하고 싶은데.”
좋은 배우들은 많지만, 카메라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배우는 적었다. 마치 실제 있는 곳에 들어온 것처럼 서준의 연기는 현실감이 있었다.
최대만 감독은 댓글을 다시 읽었다.
-근데 우리랑 상관없지 않음? 누구 작품이든 이서준 작품만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올해 내년에는 안 나올 듯
-하긴. 영화나 드라마보다야 휴식기가 먼저겠지
-재작년 오버 더 레이보우 작년 시상식 올해 역. 3년간 열일 했으니, 쉴 타이밍인 듯
-ㅇㅇ 푹 쉬어서 또 열심히 촬영해줬으면.
“그렇겠지?”
활동이 왕성한 배우는 일 년에도 몇 작품씩 한다지만, 지금까지의 서준은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성인과는 달리 학교도 다녀야 했고 나이도 어려서 그런 것 같았다.
“역도 올해 촬영을 했고 올해도 벌써 반년이나 흘렀고.”
최대만 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보았다. 수십 번의 수정을 거쳐 지저분해진 대본이 보였다.
“그래도 넣어볼까?”
이서준에게 까인 작품만 5개.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최대만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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