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75화
“LA로 유학 와서 다행이다.”
최유성의 말에 친구들이 웃었다. 오늘은 역의 개봉일, 최유성과 친구들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영화 티켓은 인터넷으로 예매했고 이제 출발할 예정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로튼이 입을 열었다.
“자막 있는 영화는 좀 낯설긴 하지만, 준이 우리 학교에서 연주해 줬는데 보러 가야지.”
“그 이후로는 지원하는 사람들도 엄청 늘었대. 교수님들도 엄청 좋아하시더라.”
“학교 인지도도 올라가서 우리한테 좋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버 더 레인보우’를 촬영했던 학교라고 하면,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는 했다. 게다가 그 독주회를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그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독주회보다는 버스킹이 대단했지.”
“아. 나도.”
직접 8주 차 버스킹을 본 나탈리와 최유성은, 그 이후 신기하게도 실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마치 꽉 막혀 있던 한계를 뚫은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과 학생들의 일부도 그랬다.
기술적 상승보다는 연주에 감정을 담는 양의 변화였지만, 작은 변화에도 예민한 음대학생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들도 그랬다. 학생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자, 교수들이 그 원인을 궁금해했다.
공통점은 버스킹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라는 것. 그 연주에 무언가 있나, 싶어 8회 차 버스킹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 소식에 많은 학생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이라고 해도, 실력이 향상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과 연습을 이어가는 학생들에게는 우연이라도 믿고 싶은 일이었다.
“또 버스킹 안 해주려나.”
“버스킹한다고 해도, 여기서는 안 할걸?”
“그건 그래.”
나탈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LA음대 공원은 LA에 오면 꼭 들려야 하는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서준 리가 버스킹했던 자리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악기를 전공하는 아이들은 꼭 한 번 와서 사진을 찍고 갔다. 물론, 그중에는 바이올린 전공자가 가장 많았다.
“우리 학교에도 사진 찍어주는 일하는 애들이 있더라. 바이올린도 빌려주고.”
메간의 말에 나탈리가 에휴 한숨을 쉬었다. 바이올린 하니 또 생각이 났다.
“왜 그래?”
“바이올린 팔라고 해서.”
나탈리의 말에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버 더 레인보우가 상영된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아직도?”
“응.”
나탈리의 바이올린.
바이올린 소년에게 선물해 주려고 했다가, 8주 차 연주의 주인공이 된 그 바이올린.
동영상이 공개되고, 나탈리와 최유성에 대해 알려지자, 바이올린을 사고 싶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는 ‘그레이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유명인의 물건도 비싼 가격에 팔리는데, 하물며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가 썼던 바이올린이잖아. 그 바이올린 연주를 하게 된 사연도 엄청 감동적이고.”
그 사연의 주인공인 최유성과 나탈리가 민망한 듯 웃었다. 1년 전에는 가끔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알아볼 정도였다.
“처음에는 바이올린보다 조금 비싼 가격이었는데…… 준이 아카데미상까지 받으니까, 천정부지로 뛰어버린 거 있지?”
“얼마?”
나탈리의 대답에, 차 안에 소리 없는 경악이 퍼졌다. 나탈리는 한숨을 쉬었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가격이 내려갈 생각을 안 해.”
“바이올린은 아직 웨일 스튜디오에 있어?”
메간의 질문에 나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바이올린 가격에 도둑이 들지도 몰라서, 보안이 철저한 웨일 스튜디오에 맡겼다. 대여비를 주겠다고 웨일 스튜디오가 먼저 제안했다.
“아마 지금 로비에 장식되어 있을걸?”
“그러네. 여기 있어.”
최유성이 휴대폰으로 웨일 스튜디오를 검색했다. 웨일 스튜디오에 들른 관광객들이 찍은 사진 속 나탈리의 바이올린은, ‘오버 더 레인보우’에 나왔던 바이올린과 함께, 로비 중앙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장식되어 있었다.
“웨일 스튜디오에서도 구입하겠다던데…….”
“그쪽이 제일 나을지도. 웨일 스튜디오니까, 영화랑 관련해서 잘 활용해 줄지도 몰라.”
메간의 말에 나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에게 시달릴 바에야, 서준 리와 인연이 있는 웨일 스튜디오에 판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사이, 최유성과 친구들은 영화관 근처 주차장에 도착했다. LA에서 동시 개봉하기는 했지만, 상영관은 적었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이 영화관이 제일 가까웠다.
“자, 도착했어.”
“고마워. 로튼.”
“점심은 우리가 살게.”
차에서 내린 최유성과 친구들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헐.”
최유성은 저도 모르게 한국어를 내뱉었다. 친구들도 허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차 문을 잠근 로튼이 뒷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자막에다가 잘 모르는 동양의 역사 영화라서…… 사람도 별로 없을 줄 알았더니…….”
“나도 솔직히 한국은 몰라도 미국에서 망할까 봐 보러 왔는데 말이야.”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영화관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들은 동양인. 아무래도 한국인인 듯,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하지만 동양인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인과 흑인들도 많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LA 외의 도시에서도 찾아온 것 같았다.
“다른 데도 이러려나?”
“SNS 보니까 장난 아닌데?”
여기 영화관뿐만이 아니었다. 역이 상영되는 미국 내의 적은 영화관들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SNS에도 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YEOK 개봉일이래.
=역? 역이 뭔데?
=서준 리의 영화. 내의원에 나왔던 허의관 역 배우도 나온대.
=오. 내의원! 내의원2야?
=아닌 건 같던데?
-영화관에서 표 사려고 했더니, 사람이 너무 많아:(
-외국 영화를 개봉 날부터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동감. 게다가 더빙도 아니고, 자막이잖아. 역시 서준 리:))
매진. 매진. 매진.
반짝이는 빨간 불에 네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넷으로 예매하길 잘했다.”
“잘못하면 오늘 못 볼 뻔했어.”
영화관 안으로 들어온 최유성과 친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포스터를 챙겼다.
영화관 내 모니터에는 역의 예고편이 나오고 있었다. 너튜브로도 실컷 봤던 예고편을 다시 한번 넋을 놓고 보던 나탈리가 물었다.
“유성. 역이 무슨 뜻이야? 주인공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거스르다. 반역을 뜻하는 말이야.”
“오호.”
“유성이 한국인이라서 다행이야. 모르는 게 나와도 설명해 줄 테니까. 근데 다른 사람들은 잘 보려나? 우리 엄마 아빠도 보러 간다던데. 잘 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
메간의 말에 최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 사이트 알려드려.”
“사이트?”
“어. 영화제작사에서 만든 거 같더라.”
최유성은 친구들에게 사이트 링크를 보내주었다. 깔끔한 화면 구성에 친구들이 감탄했다.
[역逆 알고 보기]
-역 관람 전
-역 관람 후(스포일러 포함)
두 개의 카테고리가 있었다.
“조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서 같은 거야. 물론, 스포일러는 최대한 적게 되어 있어. 모르는 단어나 문화는 자막으로 짧게 설명해도, 이해하고 영화를 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말이야.”
“언어 설정도 있네.”
“플러스랑 공동으로 만들었대.”
“아. 플러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스트리밍 사이트의 등장에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러스+라면 번역가 구하는 건 쉬울 터였다.
“부모님께 보내드려야겠다.”
“팸플릿에도 설명되어 있는데, 사이트가 그림도 있어서 이해하기 편하네. 자세하고.”
“그럼 영화 보기 전에, 이거 읽어야겠다.”
[역 알고 보기-관람 전]과 팸플릿을 정독하고 최유성과 친구들은 상영관에 들어갔다. 팝콘과 나초, 음료수를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았다.
곧 상영관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둥!
낯선 동양의 성문이 보였다. 생소한 성과 새하얀 종이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 속닥거렸다.
“저게 성이야?”
“그런 것 같은데?”
“저건 종이? 문 아니야?”
“그것보다 주인공은 언제 나와?”
아무래도 내의원도 보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최유성이 볼을 긁적였다.
‘계속 말하려나?’
끄응. 첫 관람부터 관크라니……옆에 앉은 로튼과 나탈리도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애써 무시한 최유성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어차피 N차 뛸 생각이었다.
선대 왕의 죽음으로 역이 시작되었다. 김종서가 나오고, 수양대군이 나오고, 이홍위가 상참에 참여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게 뭔가, 저게 뭔가, 속닥속닥거리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어린 후계자가 불쌍한 백성을 만나 진정한 왕이 되는 장면이었다.
단종이 인자하게 웃자, 상영관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와.
이게 성군의 아우라라는 건가. 나탈리는 감탄했다. 이국의 어린 왕은 인자했고, 자애로웠다. 계속 보고 싶었던 어린 성군의 앞날은,
‘거스르다. 반역을 뜻하는 말이야.’
뜬금없이 떠오른 최유성의 목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곧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어린 성군과 피가 이어진 남자, 수양대군이라는 자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단종과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잘 아는 한국인들은 참담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올 게 왔구나!’ 각오한 한국인들과는 달리, 외국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의아함에 눈만을 깜빡거렸다.
배경음이 바뀌었다. 긴장감 가득한 음악에, 상영관 내의 소리가 줄어들고, 관객들의 숨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팝콘과 나초를 먹던 손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들리던 작은 소음도 멎었다.
그리고, 반란이 시작되었다.
나탈리, 메간, 로튼이 입을 쩌억 벌리고, 감히, 왕의 침소에 발을 들인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잠깐? 네?
네 사람 중 유일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편안하게(물론, 단종과 수양대군의 신경전은 긴장감 가득했다) 관람하는 사람은 한국인인 최유성뿐이었다.
상황은 끝도 없이 악화되었다. 상왕이 되고, 옥새를 물려주고, 노산군이 되어 쫓겨났다. 간신히 편안하게 지내는가 싶었더니, 사약이 내려졌다.
세 명의 외국인과 한 명의 한국인이 눈물을 흘렸다. 안타까움에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죽은 왕과 피가 이어진, 사내가 쩌렁쩌렁 웃었다. 다들 질린 눈으로 왕이 된 사내를 바라보았다.
‘누가 저 XX 좀.’
그리고 천벌처럼 죽은 왕이 나타났다.
소름이 끼칠 듯한 무언가에 순간, 저도 모르게 세조를 동정해 버린 네 사람이었다.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와 웅크려 떨고 있는 큰 그림자.
죽은 단종과 살아 있는 수양대군이었다.
영화가 끝났다.
상영관이 밝아지고, 기운이 빠진 네 사람은 잔뜩 흘린 눈물을 닦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역의 OST가 흘러나왔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최유성이 미리 준비해 온 휴지로 눈물을 닦은 나탈리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너무 울었어.”
“진짜 연기 잘한다. ‘지석 리’랬나? 준도 잘하는데, 리도 잘하더라.”
“준도 지석 리도 LEE네.”
메간의 말에 세 사람이 허허 웃었다. 우느라 기운이 빠져 약한 웃음소리였다.
휴지로 눈물을 닦아낸 로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안하게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고 남는 휴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한국인들이 보였다. 한국인 관람객들은 거의 휴지를 챙겨온 모양이었다.
“역사 영화라…… 실제 있었던 일이란 거지? 한국인들은 다 휴지를 챙겨왔네.”
“뭐, 단종의 이야기는 유명하니까. 한국인이라면 울 각오는 하고 왔을 거야. 단종 역을 맡은 배우가 이서준이기도 하고. 설마, 이 정도나 울지는 몰랐겠지만 말이야.”
상영관에서 나온 네 사람이 카페에 앉아 음료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영화의 여운이 몸을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달달한 초콜릿을 마시던 메간은 [역 알고 보기] 사이트에 들어갔다.
“여기 관람 후에 보라던 링크도 있던데.”
“그랬지?”
메간의 말에 다들 휴대폰을 꺼냈다.
[역 알고 보기]
-관람 전
>관람 후(스포일러 포함)
-노산군일기에 관하여
-노산군일기 속 단종과 세조
…….
조용히 하나둘 읽어나갔다. 노산군일기 속 단종과 세조의 모습이 저절로 두 배우의 모습이 되었다. 그 때문에 많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영화랑은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나탈리의 말에 로튼과 메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종에 대해서는 개봉 전 많이 찾아본 최유성은 한국 반응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국도 시끌벅적했다.
“조선왕조실록이란 게 있구나.”
“응? 거기 그런 것도 있어?”
느긋하게 한국 반응을 보고 있던 최유성이 메간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응. 여기 있던데? 그 옛날에 이 정도 자료라니. 엄청 신기하다.”
“댓글에도 조선왕조실록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왕이 쓰지 말라는 것도 쓰다니, 대단한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구나.”
어…… 어?
최유성은 세 친구의 반응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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