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74화
진정으로 왕이 된 단종에게 세상은 새롭게 보였다. 대신들 사이의 신경전과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눈빛. 그 속에서 알아차린 것은, 찰랑찰랑 밀려오던 차가운 물이 자신의 부담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늦은 밤.
이 넓은 궁궐에서 오직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침소에서,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김 내관에게 말했다.
“좌의정은 빈 관직에 제 사람들을 추천하고 있고, 수양 숙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과한 보상을 내려주길 주장하지.”
차갑고 어두운 물은, 단종에게 임금을 자리를 넘보는 역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였다. 왕으로 태어났고, 왕으로 자라 왕이 된 단종의 본능이 경고를 보낸 것이었다.
김 내관은 안타까운 얼굴로 단종을 바라보았다.
“……전하.”
“좌의정은 할바마마 때부터 대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고, 지금도 고명대신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 임금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을 거야.”
자신의 일임에도 단종은 냉정했다.
“수양 숙부를 경계해야 해.”
진정 왕이 된 단종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결론은 빨랐지만, 수양대군의 움직임은 더 빨랐다.
이렇게 빠르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던 김종서가 당하고, 수양대군과 역도들이 궁으로 쳐들어왔다. 잔혹한 피비린내가 강녕전까지 전해졌다. 김 내관까지 역도를 막으러 간 사이, 비명이 점점 가까워졌다.
‘온다.’
단종이 입술을 깨물었다.
침소의 문이 쾅! 열리고, 피가 흐르는 칼을 든 수양대군이 나타났다.
상영관이 침묵에 잠겼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신경전에 정신을 빼앗겨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정말로 역사의 한 장면을 훔쳐보는 양, 한마디라도 뱉었다가는 이 아슬아슬한 신경전이 끊어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수양대군은 이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라.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서 내뱉듯 말했다.
“오늘 일을 정난으로 만들고, 뒷말이 나오지 않게, 아주 정당하게 왕의 자리에 오를 거란 말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멱살을 잡았다. 단종의 눈빛에, 그래도 넌 반역자일 뿐이라는 눈빛에, 수양대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아무리 내 신경을 건드려도, 너를 죽여서 반역자가 될 생각은 없으니, 그만 신경 거슬리라는 소리다! 이홍위!”
순간, 단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겨우 하루.
하늘을 뒤집는 정난이 끝났다.
수양대군은 주요관직을 차지했다. 실의에 빠진 단종과 공신들에게 보상을 내려주는 수양대군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고명대신들이 죽고, 수양대군의 견제자였던 안평대군까지 유배를 떠났다.
단종이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수양대군이 모든 길을 가로막았다.
단종이 의지하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비로 자신의 사람인 송현수의 딸을 들였다. 아직 문종의 상중이라 반발이 많았지만, 수양대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명령으로 혜빈 양씨, 금성대군과 여러 종친, 궁인, 신하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났다.
“몸조심하십시오. 전하.”
“최상궁도…… 최상궁도 건강히…….”
단종이 결국 눈물을 보이자, 다들 고개를 돌려 눈물을 흘렸다. 이 유배의 끝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던 단종은 결정을 내렸다. 더 많은 사람이 다치기 전에 이 자리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경회루 아래.
단종의 명으로 수양대군, 대신들이 모였다.
무언가 직감한 듯,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단종이 고개를 조아린 수양대군과 문무백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과인이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고, 궁 안에 깊이 거처하고 있어 내외의 모든 일을 알 도리가 없어, 나라에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차마, 흉한 무리나 흉도와 같은 단어는 입에 올리지 못했다. 단종을 지키려다가 죽고, 유배를 떠나게 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단종의 말에, 남아 있던 충신들이 울음을 삼켰다.
수양대군과 공신들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더 이상의 분란을 멈추기 위해, 수양 숙부에게 이 무거운 자리를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끝냅시다. 숙부. 단종의 숨은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수양대군은 그저 부복하며 외쳤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
가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수양대군의 모습에 단종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참으로 대단한 숙부였다.
대신들도 명을 거두어 달라 외쳤다. 이 중 얼마나 그 말이 진심일까. 단종의 안색이 흐려졌다.
옥새를 들고 온 성삼문이 엉엉 눈물을 흘렸다. 조용한 경회루 아래, 성삼문의 울음소리만이 단종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문 단종은 떨리는 손으로 옥새를 들어, 수양대군에게 전해주었다.
“부디, 부디 이 나라를 잘 이끌어주세요.”
그 말에, 수양대군의 얼굴이 굳었다. 가짜 눈물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보였다.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단종이 아니꼬웠다. 그 자애로운 마음까지도, 자신이 갖지 못한 ‘왕의 여유’인 것 같아, 수양대군은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임금이었던 자와 임금이 된 자의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다.
불과 3년. 조선의 하늘을 바꾸는 화려한 즉위식이 끝나고, 단종은 거처를 옮겼다. 단종의 마지막 말에 세조는 강녕전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성군? 성군이라! 그래! 내 성군이 되어주지! 하지만 이홍위.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다!”
그 싸늘한 말에 밖에 있던 내관들이 몸을 떨었다.
관람객들도 입을 틀어막고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지석? 이서준? 성녕대군? 허의관? 그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단종이었고, 수양대군이었다.
“……실패했다 하옵니다.”
“그래.”
단종은 김 내관을 통해 전해오는 소식을 들었다.
김질의 밀고로 마지막 시도가 수포가 되었다는 것. 세조는 관련된 자들을 직접 고문한다는 것. 세조가 막지 않은 탓인지, 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성삼문은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하옵니다.”
“그래…….”
“박팽년은 그자를 나리라고 불렀다고 하옵니다.”
“흑…….”
성삼문은 잔인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박팽년은 세조를 ‘나리’라고 낮추어 불렀다. 반역자의 앞에서, 여섯 명의 신하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 충심에 단종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궁에서 내보내라!”
세조의 명이 떨어지고 단종은 궁을 떠나 영월로 가게 되었다. 태어나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궁을 떠나는 단종의 얼굴에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멀고 먼 영월에서, 단종은 백성을 만났다. 영월 근처 마을에서 살고 있던 백성, 강돌이었다.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관풍헌으로 찾아온 강돌이 들려주는 마을의 이야기만이 단종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하지만 그 소소한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시꺼먼 사약 앞에 앉은 단종의 모습에 이미연과 박성아가 눈물을 흘렸다.
말 한마디도 없이 표정만으로도 복잡한 단종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성을 위해 도망가지 않는다니. 그런 슬픈 일이 어디 있나.
단종이 부드럽게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이만하면 잘하지 않았나요?”
그 한마디에 결국, 상영관 내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람에 방해가 될까 봐, 애써 입을 막고 있던 노력도 모두 수포가 되었다.
아아.
잘했다. 잘하고말고.
애썼어. 정말로 애썼어.
그 말밖에 해줄 수가 없어, 이미연은 울지 않는 단종 대신 울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 착한 아이가 왕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좀 더 살았다면 어땠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지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관객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화면은 사약을 향해 손을 뻗는 단종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울고 있는 김 내관과 강돌의 모습이 보이고,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광풍헌이 있는 방향으로 부복한 모습이 보였다. 단종이 살렸고, 지키려고 했던 아이들이 뭣도 모르고 꺄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화면 아래로 영월이 보였다. 이곳에서, 궁과 가족들을 그리워하던 임금이 명을 달리했다.
겨우, 17살의 어린 나이었다.
땅을 내려다보는 화면에 말을 탄 관리가 보였다. 해가 지는 중에도 이랴, 이랴 달리던 말이 도성으로 들어갔다. 관리가 금군에게 말을 전하고, 금군이 내관에게 말을 전했다.
강녕전에 들어가려는 세조에게 내관이 다가와 속삭였다. 세조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려보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죽었다.
언젠가 분명히 세조를 불태울 것이 분명했던 불씨가 드디어 사라졌다. 이제 자신은 정말로 정당한 왕이 되었다. 그 누구도 반발하지 못할 왕이 되었다.
“으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세조는 태어나 처음으로, 속을 다 털어놓듯 웃어댔다. 평생을 쌓아두었던 열등감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우렁찬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단종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던 관객들은 순간 아득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저렇게 웃다니,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억울했다. 어린 임금의 억울함을 누군가 풀어줬으면 싶었다.
웃음을 멈춘 세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강녕전에 발을 디뎠다.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침소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비추던 카메라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가 잡혔다.
새하얗고 조그마한 눈송이였다.
잠시 멈추었던 화면이 세조의 뒤를 따랐다.
세조는 복도를 지나, 상궁이 미리 촛불을 켜 놓아 환해진 침소의 문을 벌컥 열었다. 이곳이 왕만이 지낼 수 있는, 왕의 보금자리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던 세조의 얼굴이 천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원망하듯 세조를 노려보던 이미연은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굳어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반쯤 미소를 짓던 눈이 천천히 커져 더 커질 수도 없이 크게 떠졌다. 혈색 좋던 얼굴빛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세조의 얼굴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이, 발이,
다리가, 몸이,
지진이라도 만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 홍위……!”
비명과도 같은 세조의 말에, 억울함에 가슴을 치던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화면은 침소 안을 비추지 않고 침소의 일부와 세조만을 비추었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느꼈다. 침소 안의 기이함을, 세조가 느끼는 경악을. 관객들은 세조의 표정과 침소 안에서 풍겨 나오는 그 음산함에 몸서리를 쳤다.
죽은 임금이 돌아왔다.
진정한 임금이 돌아오자, 터져 나갔던 모든 감정이 두 배 세 배로 부풀어, 두꺼운 사슬처럼 세조를 꽁꽁 묶어버렸다. 세조, 아니, 수양대군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이럴…… 이럴 리가……!”
그 모습을 찍던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복도를 지나, 강녕전 밖에서 침소를 비추었다.
눈이 내렸다.
왕의 죽음을 슬퍼하듯 눈이 내렸다.
창호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와 웅크려 떨고 있는 큰 그림자.
죽은 단종과 살아 있는 수양대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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