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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67화 (167/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67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정한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우정한 감독의 목소리를 들은 서준과 이지석이 얼굴을 풀고 시시덕거리자, 완벽했던 시간 여행이 와장창 깨졌다.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스태프들과 지사장의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에 천천히 현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완전했던 궁궐의 단면이 드러나고 시멘트 바닥이 보이고, 바닥에 깔린 전선들과 눈부신 조명에, 커다란 렌즈의 카메라와 한복과 어울리지 않는 패딩을 입은 사람들까지.

단종과 수양대군밖에 보이지 않던 시야가 천천히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 배우의 연기에 푹 빠져 있던 스태프들은 그런 주변 환경에 잠시 이질감이 들었다.

잘 보던 사극 속에서 현대 물건을 발견한 듯한, 옥의 티 같은 느낌. 하지만 그런 이질감도 잠시였다.

“와…… 장난 아니다.”

“그러게요. 두 배우 다 진짜 연기 잘하네요. 텔레비전으로 볼 때랑 박력이 다르달까.”

“수양대군, 진짜 칼 휘두르는 줄 알았다니까.”

그 말에 스태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단종이 또박또박 말대답할 때, 내가 다 쫄렸어.”

이미 대본을 읽었던 스태프들이었다. 여기서 이런 대사가 나오겠구나, 하며 대본을 읽고 이서준과 이지석은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상상도 해봤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두 배우의 연기는 상상 이상, 아니, 상상도 못 했던 모습이었다.

눈앞에서 격렬하게 연기하는 두 배우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읽은 게 이 대사인가, 저 대사인가? 잠시 고민했다. 슬렁슬렁 넘겼던 대사가, 살아 있는 듯 귀에 아주 콕 박힌 것 같았다.

‘이런 호사도 따로 없지.’

미술 감독이 웃었다. 누가 이런 연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겠나. 여기 있는 스태프들만의 호사였다.

‘이게 이지석 배우의 오디션 영상 연기란 말이지.’

어째서 김 내관의 연기를 볼 때, 기준이 높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연기라면 더 잘하는 배우들을 모아, 아주 완벽한 작품을 만들고 싶을 게 뻔했다. 미술 감독의 손도 근질근질했다.

한순간, 정말로 조선의 궁궐에 있는 듯했다. 자신이 만든 세트장과 소품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이 정도의 싱크로율을 보일 줄이야. 제 속에 숨겨져 있던 장인 정신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세트장과 소품들을 뜯어고치기에는 벌써 촬영이 두 달이나 지났다. 하지만 아직 남은 촬영분이 있었다. 미술팀장은 좀 더 완벽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조명 스태프가 말했다.

“저 엄청 걱정했거든요.”

“걱정?”

“따로따로 연기할 때는 괜찮은데, 두 배우가 함께 연기하면 내의원이 생각날까 봐요. 촬영 전에도 엄청 친해 보여서 걱정했는데……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봐요.”

스태프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다른 스태프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칼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웃으면서 이 피 진짜 같다, 뭐로 만들었을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렇게 이야기하고 촬영 들어가면 바로 바뀌는 게…… 엄청 대단하지 않아요?”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 * *

플러스+코리아의 지사장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냈다. 촬영분을 체크한 우정한 감독이 지사장을 보며 씨익 웃었다.

“짧죠?”

지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로 순식간이네요. 하지만, 아주 길었던 것 같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는 심장을 조마조마하게 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볼 때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아주 선명하게 머릿속에 박힐 정도로,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양 긴장감이 넘쳤는데, 다 보고 나니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짧게 느껴졌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지사장이 후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터넷에 그런 글이 있더군요.”

“글 말입니까?”

“단종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N차는 못 뛰겠다는 글이었습니다.”

우정한 감독이 웃었다. 이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 지사장은 N차라는 단어까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 저도 몇 번 봤습니다.”

“저라면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여러 번 볼 것 같습니다.”

지사장의 칭찬에 우정한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관객들이 여러 번 볼 정도의 영화. 영화감독에게 그 이상의 칭찬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런 장면을 자막으로 봐야 하는 관객들이 너무 많아서 아쉽네요. 한국어를 배우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자막은, 자막을 읽기 위해 시선을 자막 쪽으로 옮겨야 했다. 이런 멋진 연기에서 시선을 돌려야 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말 한국어 공부하길 잘했어.’

새삼,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어렸을 때의 자신이 대견해지는 지사장이었다. 그 덕에 한국지사에 오게 되었고, 이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서준 리의 한국 작품을 한국어로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더빙은 좀…….”

영어를 뱉어내는 단종과 수양대군이라니. 확장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표정이 굳어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우정한 감독의 말에 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배우의 목소리, 억양, 떨림, 숨소리까지 모두 합쳐져 나온 명장면이었다. 더빙을 하게 된다면 한국인이 느끼는 감정의 50%도 느끼지 못할 터였다. 물론, 자막도 그 감정을 완벽하게 느끼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50%보다야 높을 터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자막만 넣을 예정입니다. 그냥, 아쉽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지사장의 웃음에 우정한 감독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권 사람 중에는 자막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사장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오직, 자막으로 업로드되어 흥행한 작품이 있었다.

“내의원을 본 사람들은 다 볼 겁니다. 볼 수밖에 없죠.”

내의원은 오직 쉐도우맨의 영향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시청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

지금의 서준 리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더 많은 사람이 마음을 열고 서준 리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역사 영화. 궁궐부터 복장, 언어까지 한 번도 본 적 없거나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할 테지만 서준 리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도전해 볼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2년이 지난 내의원의 조회 수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이리라.

그게,

슈퍼스타의 힘이었다.

예상되는 흥행에, 지사장이 시원하게 웃었다.

“솔직히 두 배우를 본다고 자막을 못 볼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죠.”

어쩌면 자막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두 배우의 연기였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표정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터였다. 연기를 본다고 자막을 놓칠지도 몰랐다.

“오늘 촬영 정말 잘 봤습니다. 제작비가 필요하시면 꼭 연락해 주세요.”

플러스+코리아의 지사장이 환한 얼굴로 촬영장을 떠났다. 지사장의 손에는 서준 리의 사인지가 소중히 들려 있었다.

* * *

역逆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실내 촬영분을 모두 찍고, 이제부터 야외 촬영분을 찍어야 할 때가 왔다. 우정한 감독은 날씨가 더 풀릴 때까지는 NG가 많이 날 수 있는 대규모 신보다 짧은 야외 신을 찍기로 했다.

오늘은 상왕, 단종이 경복궁을 떠나 새로운 거처, 창덕궁으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분장을 끝낸 서준과 김호영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괜히, 도와준다고 갔다가는 오히려 방해될 수 있어서 최대한 얌전히 있는 두 배우였다.

“좀 춥기는 한데, 밖이 탁 트여서 좋네.”

“저도요.”

김호영의 말에 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지수가 전해주라더라. 핫팩이야.”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이거 우리 할머니가 담근 유자차예요. 맛있어요.”

“고마워.”

김호영이 서준에게 핫팩을 건네주고 서준이 김호영에게 유자차를 건네주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배우를 보며 스태프들과 단역 배우들이 속닥거렸다.

“서프라이즈 봤어? 완전 인연 아니야?”

“기사도 보고 서프라이즈도 봤는데, 진짜 신기하더라.”

귀가 좋은 서준은, 유자차를 마시며 속으로 허허 웃고 말았다.

저번 주 토요일, MBS의 세상의 신기한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방송, ‘서프라이즈’가 서준과 김호영의 이야기를 방송했다. 영화 홍보가 된다면서 제작사에서도, 감독도, 스태프들도 모두 좋아했다.

‘엄마 아빠도 좋아했지.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신기하다고 하고.’

호영 삼촌의 말로는 삼촌의 딸도, 딸의 친구도 엄청 신이 나서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호영 삼촌은 화재 사고의 트라우마가 남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민망한 건, 공익 영상 잘 찍었다고 칭찬을 듣고 있는 서준뿐이었다.

‘의도하긴 했지만, 직접 구한 것도 아니고…….’

어휴, 속으로 한숨을 쉰 서준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호영의 인터뷰가 인터넷에 떴다는 이야기였다.

“삼촌, 인터뷰도 했어요?”

“홍보팀에서 해줬으면 하더라고. 처음 해보는 거라 힘들긴 했는데, 좋더라.”

“좋아요?”

“응. 처음 연기할 때, 이랬으면 좋겠다, 꿈꿨던 게 딱 이랬거든. 유명한 배우들과 같은 작품에서 연기하고, 여기저기 인터뷰도 하고.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떨리고, 재미있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단역 배우 출신, 슈퍼스타 서준이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는 김호영의 컵에, 축하의 유자차를 부어주었다.

“이거 찍을까요?”

“좋네. 찍어.”

홍보팀장이 눈을 반짝였다. 패딩을 입은 단종과 김 내관이 나란히 앉아 유자차를 마시는 사진이 금세 인터넷에 업로드되었다.

* * *

“레디, 액션!”

그 날이 왔다. 새로운 임금이 나타났고 단종이 상왕이 된 이상, 왕의 보금자리인 경복궁을 떠나야 했다.

창백한 얼굴의 단종이 경복궁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리가 떨리고 발이 무거웠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흐흐흑.”

단종을 보필하던 김내관과 궁녀들이 눈물을 흘렸다. 눈에 띄는 빈자리에 단종의 마음이 쓰려 왔다. 계유정난 당시, 침전으로 들어오려는 수양대군의 앞을 막았던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계단 아래로 내려온 단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궁궐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자신을 위해 울고 있는 자들은 적었다. 냉정한 표정의 사람들과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단종은 자신이 나왔던 궁궐, 경복궁을 바라보았다. 할바마마가 있었고, 아바마마가 있었고, 자신이 있었던 곳. 웅장한 모습에 기가 죽기도 했지만, 곧 익숙하게 지내던 곳.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와 하나하나, 기둥 하나하나, 창호지 하나하나. 눈에 새길 듯, 꿈에 나올 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곳에서 상소를 보고, 백성을 돌보고, 신하의 의견을 듣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웃고, 울고, 속상해하고, 행복하고, 공부하고, 그리워하고, 결심하고, 이루고, 걱정하고.

끝내,

쫓겨난 곳.

단종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자신은 왕이었다. 쫓겨난 왕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함부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했다.

많고 많은 생각이 단종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먼저 가버린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이렇게 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한탄. 죽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수양대군에 대한 원망.

“부디…….”

그 모든 마음을 삼키고, 단종이 입을 열었다.

물기가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어린 왕을 위해 모두가 모른 척했다.

“부디, 성군이 되어주세요. 숙부.”

직접 듣고 있을지, 아니면 사람을 통해 전해 들을지는 몰랐지만, 단종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다시 한번 단종을 모시는 사람들에게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써 시선을 피하던 자들도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부디, 이 어린 상왕의 앞날이,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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