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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부터 슈퍼스타-166화 (166/1,055)

0살부터 슈퍼스타 166화

“분경을 금한다고?”

수양대군으로 분한 이지석이 말했다. 그 기백에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촬영장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 * *

역逆의 촬영장에 구경하러 왔던 투자자가 안내해 주던 스태프에게 물었다. 플러스+코리아의 외국인 지사장이었다.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나면 바로 플러스+에 업로드될 계획이었다.

다른 스트리밍 사이트도 많았지만 역시 먹어본 놈이 안다고 플러스+는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을 투자하며 일체의 간섭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행 상황은 궁금했던지 플러스+에서 촬영 현장을 보길 원해서, 우정한 감독은 오늘로 날을 잡았다.

‘돈 많이 주고 간섭 안 하는 사람이 최고지.’

“분경이 뭡니까?”

“어. 낮은 신분의 관리가 신분이 높은 관리의 집에 찾아가는 걸 말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뇌물을 주고받을 수가 있어, 예전부터 금지하고 있었죠. 저 상황은 아직 왕이 어려서 다른 왕자들에게 세력이 모일까, 찾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왕이 핏줄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왕이 어리고 다른 친족들이 성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플러스+코리아의 지사장이 턱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역사 영화다보니…….’

배경 지식이 필요했다. ‘내의원’은 역사적 내용보다는 그저 조선 왕실의 일상이라는 느낌이라서 그렇게 배경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逆은 달랐다. 정치적 상황과 배경 지식이 필요했다.

‘그럼 하나를 더 만들면 되겠지.’

더욱 완벽하게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그 배경 지식을 설명해 주는 프로그램을 볼 게 분명했다. 서준 리의 팬들이라면 말이다.

지사장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내의원 스페셜이 좋았지.’

그런 식으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지사장의 시선이 촬영장으로 향했다. 내의원에서는 냉정하지만 성녕대군에게만은 다정했던 허의관이, 살벌하게 외치고 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군.’

지사장도 내의원의 이미지가 역에 투영될까 봐 걱정했지만, 이곳에는 어린 조카의 자리를 노리는 수양대군만이 있었다.

* * *

수양대군이 말을 이었다.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다들 몸을 흠칫 떨었다.

“우리 대군들에게 분경하는 것을 금하는 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오. 전하께서 즉위하시고 가장 가까운 종실을 의심하시니, 이건 전하의 의지가 아닐 터.”

수양대군의 시선이 고명대신 황보인에게로 향했다.

“혹, 전하께서 고립되어 도움이 필요하신 것이 아닌가.”

고명대신들이 임금과 친족을 이간질하는 것이 아닌가. 수양대군의 말에 황보인과 대신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런 대신들을 보며 수양대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우리 대군들이 이 위태로운 상황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여러 대신과 더불어 헤쳐나가려고 하는데, 어찌 도리어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이오. 우의정.”

* * *

‘그거야 네가, 역모를 꾀하려고 하니까!’

그 안타까운 표정에 도리어 약이 오른 스태프들이 일제히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서준과 함께 촬영을 진행하면서 단종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게다가 서준만큼 이지석도 연기를 잘하니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지석의 매니저인 윤성오마저 이지석을 미묘한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었다.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지석 씨……. 진심으로 싫을 정도로 연기 너무 잘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몸짓 하나하나가 저렇게 약이 오를까요?”

“그러게.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우리가 이 정도인데, 관객들은 충격받을 것 같네. 다들 내의원 생각하면서 올 텐데…….”

연기를 이어가는 배우들을 보며 스태프들이 속닥거렸다.

* * *

“그래서 한 대 때려 버렸어.”

윤성오의 말에 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이지석이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반쯤 진심이 담긴, 묵직한 주먹이었다. 윤성오가 입을 열었다.

“형. 엄살 그만 피워요. 살살 때렸어요.”

서준에게 고자질하듯 아픈 티를 팍팍 내고 있던 이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음. 내가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

“특히 오늘은 더 야비했어요.”

“잘됐네!”

“아하하하.”

서준이 큰 소리를 내며 웃자, 이지석과 윤성오, 안다호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스태프들, 플러스+코리아의 지사장과 비서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전 촬영이 끝나고 오후 촬영에 서준과 안다호가 나타났다. 오전 촬영만 보고 가려고 했던 지사장은 서준이 온다는 소식에 오늘 일정을 전부 미뤄 버렸다.

* * *

세트장과 소품이 준비되는 동안, 곤룡포로 갈아입은 서준이 말했다.

“오늘 교복 맞추러 갔다 왔어요.”

볼 한쪽에 상처 분장을 한 이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촬영을 위해 분장을 끝낸 이지석은 어디서 칼싸움이라도 하다 온 것 같이 피투성이였다.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배우들은 편안하게 따뜻한 차를 마셨다.

매니저인 안다호와 윤성오가 휴대폰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자신의 배우를 찍었다.

“교복이라. 교복이라니까 진짜 중학생 같네. 어디서 맞출 생각이야?”

서준이 교복을 산 곳이라면 다른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게 뻔했다. 돈도 안 쓰고 광고라니. 교복브랜드만 좋은 일이었다.

“학교 앞에 교복점이 있어요. 브랜드는 아닌데, 여울 예중은 학생 수가 적어서 거기서 공동구매한대요. 학교에서 지원금도 줘서 싸대요.”

“공동구매면 사이즈 정해져 있지 않나?”

“수선하면 되죠.”

명쾌한 서준의 대답에 이지석이 웃었다.

“입학식은 언제야?”

“3월 4일요. 입학식하고 반 배정만 하고 마친대요.”

“우리 서준이가 벌써 중학생이라니. 요만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지석이 악령 때의 꼬마 아이를 떠올렸다. 잘 자랐어. 잘 자랐어. 서준의 성장에 부모도 아닌데, 꼬마의 훌륭한 성장에 흐뭇해졌다.

그런 두 배우의 모습을 지사장과 우정한 감독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장면을 촬영합니까?”

“계유정난 밤의 이야기입니다. 단종과 수양대군이 만나는 장면이죠. 서준이 실기 영상 보신 적 있습니까?”

“오. 봤습니다. 옷도 평상복에 상대역도 없었는데, 대단했죠.”

“그걸 찍을 예정입니다.”

우정한 감독의 말에 지사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복장에, 번듯한 배경에, 상대역까지 있었다. 얼마나 멋진 장면이 나올지, 기대되었다.

“촬영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네?”

지사장의 물음에 우정한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우들은 감정을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저렇게 친한데, 서로 날 선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면 시간이 걸리겠죠? 아, 물론, 멋진 장면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서준 리와 지석 리의 연기니까요.”

지사장의 말에 우정한 감독이 허허 웃었다.

“금세 끝날 겁니다. 집중해서 봐야 할 정도로요.”

“네?”

* * *

“촬영 시작합니다!”

조감독의 말에 서준과 이지석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 열심히 해요. 형.”

“그래. 나도 연습 많이 했어.”

서준과 이지석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두 배우의 모습에 윤성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이 차가 얼만데, 라이벌 의식이라니. 이런 관계가 웃기면서도, 오래오래 갔으면 싶었다.

서준이 자리에 앉고, 세트장 끝에 선 이지석이 소품을 손에 들었다. 붉은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두 배우의 모습 살펴보던 우정한 감독이 크게 외쳤다.

“레디-!”

순간,

지사장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분명 필요한 궁궐의 일부분만 만들었을 세트장일 텐데, 현대적인 부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서준과 이지석.

아니, 단종과 수양대군의 모습만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촬영장에 내려앉았다. 실내라서 들릴 리가 없는, 싸늘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봤지만……. 오늘은 더 대단하군.’

넋을 놓고 볼 것 같아, 촬영감독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각오를 다져야 했다. 다른 카메라들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긴장감 위로, 우정한 감독이 외쳤다.

“액션!”

실패였다.

단종은 눈을 감았다.

좌의정 김종서는 세간의 눈 때문에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고 수양대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김종서라서 그런지, 수양대군보다 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했다. 어쩌면 방심했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가 있었든, 결과가 나왔다.

단종은 실패했다.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항상 단종의 옆에 붙어 있던 김내관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궁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분명 들리지 않을 터인데, 쿵- 쿵-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단종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 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왕의 침소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는 소리는,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단종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대신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무섭다. 숙부가 무서워.

유일하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침소에서 단종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단종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천천히 눈을 떴다. 미련이 가득한 눈이었다. 숙부에 대한 무서움보다 더 큰 미련이 있었다.

“끝나버렸어…….”

자신이 꿈꿨던 나라가 끝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성군인 할바마마와 아바마마의 뒤를 이어 성군이 되고 싶었다. 백성들을 위한 나라, 태평성대를 만들고 싶었다.

“아직 시작도 못 해봤는데…….”

이제야 겨우 배워가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겨우 내 뜻을 표현하게 되었는데. 그게 너무 분하고, 원통했다. 억울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어두운 밤.

단종이 있는 침소의 촛불이 흔들렸다. 단종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창호지 건너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쿵!

한 번도 이렇게 거칠게 열린 적이 없었을, 침소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커다란 소리에,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단종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시뻘건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역적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전하.”

언제나처럼 평안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그저 안부를 묻는 것처럼.

피를 본 단종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작 피를 뒤집어쓴 수양대군은 멀쩡한데, 단종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 송구합니다. 전하.”

전혀 송구하지 않다는 얼굴로 수양대군이 말했다.

“감히, 전하의 자리를 넘보는 불온한 무리가 있어서 말이옵니다. 전하께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급하게 달려오느라, 이런 모습으로 올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불온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아, 아. 이게 숙부의 진짜 얼굴일 터였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부 처리했사옵니다.”

그리고 너만 처리하면 끝이지.

수양대군이 웃음을 멈추고 단종을 바라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퍼런 칼날보다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다 죽어버렸다.

아아. 모두. 모두 끝나버렸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해도, 왕으로서는 끝난 게 분명했다.

머리가 아찔해, 쓰러질 뻔했던 단종이 입안 볼살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단종의 눈이 빛났다.

“내가…….”

단종이 피를 토하듯, 이를 드러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짐승 같은 사내에게 말했다.

“내가 이 나라의 왕입니다. 숙부.”

수양대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숙부.”

그 부름에, 훗날 세조가 될 수양대군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어쩌면 숨죽여 지냈던 지난날을 떠올린 것이리라. 그 날들이 지나서, 이제야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나운 눈빛을 단종은 피하지 않았다.

“내가 하늘이 내려준 왕이고, 숙부는 결국 반역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 반역도라니요. 단지, 전하를 위해…….”

“숙부.”

[(선)몰락한 조인족 왕의 날개가 발동됩니다.]

단종은 살벌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입을 여는 수양대군의 말을 막았다. 수양대군이 검을 쥔 손을 꽉 잡았다. 하늘에서 정해준 왕이 따로 있는 듯, 수양대군의 눈에 비친 단종은, 왕의 기세를 내보이고 있었다.

위대한 임금, 세종과 문종. 두 사람과 똑 닮은 아우라에, 수양대군은 입술을 깨물어버리고 말았다. 뱃속부터 차오르는 열등감에,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았다. 욕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단종이 입을 열었다.

“모든 옳음은 저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숙부가 이 자리에 올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백성들도 후손들도 모두 알게 될 겁니다.”

그 날카로운 진실이 일개 반역도인 수양대군을 꿰뚫었다. 수양대군이 검을 높게 들었다. 주제 못할 화로 인해, 검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하늘이 숙부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어린 용의 우렁찬 외침에, 이성의 끈이 끊어진 수양대군 또한 소리를 질렀다.

“겨우! 겨우 적자로 태어난 주제에!”

평생에 걸쳐서 숨겨왔던 역린을 드러냈다. 수양대군이 불을 뿜는 용처럼 화를 토해냈다.

“누가 봐도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건 나다!”

“평생 수군거리겠죠.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김종서에게 끌려다니는 너보다!”

“신하의 의견도 듣지 않는 암운이 되겠군요.”

“마음이 약해서 궁 재정을 함부로 쓰는 너보다!”

“벌써 백성들의 한탄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더 검을 들고 있다가는 정말로 단종의 목을 베어버릴 것만 같아, 수양대군은 바닥으로 검을 내동댕이쳤다.

씩씩거리던 수양대군이 거친 몸짓으로 단종의 앞에 걸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수양대군은 이를 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라.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서 내뱉듯 말했다.

“오늘 일을 정난으로 만들고, 뒷말이 나오지 않게, 아주 정당하게 왕의 자리에 오를 거란 말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멱살을 잡았다.

단종의 눈빛에, 그래도 넌 반역자일 뿐이라는 눈빛에, 수양대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아무리 내 신경을 건드려도, 너를 죽여서 반역자가 될 생각은 없으니, 그만 신경 거슬리라는 소리다! 이홍위!”

단종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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