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살부터 슈퍼스타 164화
졸업식이 끝나고, 3월에 있을 여울 예중 입학식까지 길고 긴 겨울방학을 만끽하게 된 서준은 평일에도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방학인데 촬영만 해도 괜찮아?”
“네! 촬영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들떠있는 서준의 목소리에 운전하던 안다호가 웃었다.
서준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하는 장면이라 촬영장 주차장부터 북적북적했다.
“서준이 왔다.”
서준의 등장에 역逆의 스태프들이 들썩였다. 촬영장 입구로 이서준과 이서준의 매니저가 들어오고 있었다. 헤죽헤죽 웃던 스태프들이 직접 사온 꽃을 서준에게 건넸다. 그들이 직접 준비한 졸업 축하 이벤트였다.
화사하게 핀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모여 어느새 서준의 품을 가득 채웠다. 커다란 꽃다발이 되어 있었다.
“서준아, 졸업 축하해!”
“이서준 배우, 축하해요!”
가족, 지인, 팬들에게서 졸업 축하 메시지를 잔뜩 들었는데, 스태프들에게서도 잔뜩 듣게 되었다.
진심 어린 축하에 꽃을 든 소년, 서준이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윽!
꽃다발 효과에 제대로 당한 스태프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서준의 얼굴에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 격렬한 반응에 서준이 아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스태프들과 친근한 스타 배우의 모습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던 단역 배우들도 이리저리 지나가면서 축하의 말을 전했다. 서준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박운열과 김호영이 스태프가 준 꽃송이를 서준에게 건넸다. 서준이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꽃다발을 소중히 옆에 놔두었다.
떠들썩한 축하가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우정한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주상전하 납시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이홍위가 편전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편전의 분위기에 두려움도 들었지만, 이홍위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이제 이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했다. 떨리는 손은 주먹을 꽉 쥐어 숨기고 이홍위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상 위에 오르니, 대신들이 더욱 잘 보였다. 가장 가까운 곳, 대신들 속에서 익숙한 김종서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홍위가 어좌에 앉았다.
대신들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어좌에 짓눌릴 것 같은 어린 왕의 모습에 다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마음을 얼굴에 내보일 어리숙한 신하들은 없었다. 모두 마음을 숨기고 할 일을 해나갔다.
“빈전도감을 설치해야 하옵니다.”
이홍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종의 장례였다. 문종의 장례를 이끌어 나갈 임시 관아가 설치되고 차례차례로 장례를 맡을 관인들이 정해졌다.
“윤사로를 빈전도감의 제조로 임명하시옵소서.”
누군가 문제를 말하면 삼정승이 답을 내렸다. 이홍위에게도 물었으나, 깊이 파악하지 못한 이홍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윤사로라는 자가 어떤 자인지도 잘 몰랐지만, 빈전도감의 책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좌의정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거야.’
대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홍위의 시선을 힐긋힐긋 김종서에게로 향했다.
대신들의 논의가 이어졌다. 열심히 듣고 있던 이홍위의 어깨가 조금씩 처졌다. 나라의 문제는 예상했던 것처럼 어려웠고, 그 해결책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이홍위는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켰다. 원인을 알고 답도 알지만, 그 답은 서책에 나오는 답이었다. 현실에서 원하는 답은 서책에서의 답과 다르다는 걸 총명한 이홍위는 잘 알고 있었다.
높은 자리에서 대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홍위는 자신의 발끝에서 물이 찰랑찰랑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발끝에 머물던 검은 물이 천천히 발목까지 올라오려고 했다.
이홍위는 생각했다. 이 물은 부담감이 환상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차가운 물을, 이 부담감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이홍위는 할바마마와 아바마마의 말을 떠올렸다.
‘배우자.’
대신들의 내려다보는 이홍위의 눈이 반짝였다.
‘배우고 또 배우자.’
멋진 왕이 되고 싶다. 백성들의 자애로운 어버이가 되고 싶었다. 훌륭했던 할바마마와 아바마마처럼. 이홍위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내려가던 어깨를 다시금 바르게 폈다. 바른 자세로 대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잘 기억해 두었다가 좌의정이나 다른 대신들에게 물어야겠다.’
이홍위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아챈 몇몇이 살며시 이홍위를 주시했다.
* * *
역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늘 촬영은 이지석의 스케줄 때문에 오전에는 서준과 김호영이 나오는 장면을, 오후에는 이지석까지 함께하는 촬영을 찍게 되었다. 처음으로 수양대군과 단종이 함께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레디, 액션!”
보료에 앉은 단종은 상소문을 펼쳤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임금의 모습에 3대 왕을 모두 보필한 김내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리시긴 하나 누가 봐도 하늘이었다. 인자하고 어진 왕이었다.
조용히 감격의 눈물을 훔친 김내관과 상소문에 빠진 단종의 모습이 카메라 화면 가득히 들어왔다.
우정한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컷이라는 울림에, 서준은 단박에 단종에서 벗어났고, 김호영은 천천히 마음을 추슬렀다. 열심히 하는 단종을 보면 꼭 딸 같아서 마음이 뻐근해졌다.
“오전 촬영은 이걸로 끝이에요?”
서준의 물음에 우정한 감독이 대답했다.
“그래. NG가 별로 없으니 금방 끝나네.”
“야외촬영은 언제부터 해요?”
서준과 우정한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까워지는 점심시간에 김호영은 평소처럼 휴대폰 전원을 켰다.
“어…….”
[부재중 전화 5통]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호영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호영의 딸, 김지수였다.
휴대폰을 든 김호영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 일찍,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놀러 간다고 들떠있던 딸을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수야…… 지수야…….”
심상치 않은 배우의 모습에, 점심은 뭘까 이야기를 나누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모였다. 서준과 우정한 감독의 시선도 김호영에게로 향했다.
그런 시선도 모른 체 김호영은 휴대폰에 매달렸다. 몇 번의 전화시도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지수야!”
김호영이 크게 외쳤다.
* * *
두 시간 전.
“지수야!”
“벌써 왔네!”
김호영의 딸 김지수가 친구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거 봐. 아빠랑 이서준 사진.”
“진짜네! 이서준이야!”
김지수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 이서준과 김호영의 모습이 보였다. 지수와 친구들이 꺄르르 웃었다.
“여기 코인노래방 새로 생겼대.”
“새로 생기면 가봐야지!”
동네 코인노래방을 섭렵한 지수와 친구들이 새로운 코인노래방에 발을 디뎠다.
문제가 생긴 건 한창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에에에엥!
노랫소리와 마이크 소리를 뒤덮는 비상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아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노래방에 내려앉았다. 아이돌 음악과 비상벨 소리가 섞여 소음을 만들어냈다.
얼어버린 아이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김지수였다.
[(선)모스족의 연상기억이 발동됩니다.]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소방청 공익 영상의 ‘한 걸음’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영상 속 아이들의 침착함에 물든 김지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응!”
아이들은 얼른 방을 나왔다. 복도에는 당황하는 아이들과 침착한 아이들이 뒤섞여 서성이고 있었다. 겨울방학이라서 그런지 평일 오전인데도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일단 119 신고를…….”
“내가 하고 있어!”
한 아이가 손을 들며 말했다. 한쪽 손으로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입구 쪽으로 가자.”
“휴지나 손수건 있으면 적셔서 입 막고.”
서로 처음 본 사이인데도 몇몇 아이들이 나서서 당황하는 아이들을 이끌었다. 각자의 방에서 물통을 들고나와 아이들의 손수건이나 휴지, 소매에 물을 부어 적셨다.
‘그리고……그리고…….’
지수의 머릿속에 아빠와 함께 본 ‘한 걸음’이 떠올랐다. 어째서 한 걸음 속 아이들이 열심히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무섭다.
하지만 무서워하고만 있기에는 아빠가 보고 싶었다. 아빠를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공익 영상 속 굳센 서준의 눈동자를 닮아가는 지수가 외쳤다.
“다른 방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방 확인하면서 움직여줘.”
“손잡이가 뜨거우면 열지 말고.”
119를 불렀다던 아이가 지수의 말을 이었다.
에에에엥!!
요란한 소리를 뒤로하고 아이들은 출입구 쪽으로 향하면서 빈방을 확인했다. 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움직이면서 재빨리 확인하는 터라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다.
“이쪽은 못 가.”
아이들이 출입구에 도착하자, 땀범벅이 된 코인노래방의 알바생이 있었다. 알바생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아래층에서 불이 났어.”
알바생은 비상벨이 울리자마자 탈출로를 확인했다. 불이 난 지점을 정확히 확인하고 손님들을 대피시킬 생각이었다.
“연기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황이라서 출입구랑 비상구를 이용해도 밑으로는 못 갈 것 같아.”
유일한 어른의 말에 아이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수는 생각했다.
‘그러면 ‘한 걸음’처럼 노래방에 들어가서 틈을 막고 기다려야 하나?’
어느 방에 가야 하지? 지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모스족의 연상기억이 발동됩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진정시킨 알바생은 사장님이 서랍에 넣어 놓은 옥상 열쇠를 떠올렸다. 건물 주인이 잠가놓았는데, 작년 ‘한 걸음’ 영상을 보고, 하나 복사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알바생이 얼른 서랍에서 열쇠를 꺼냈다.
“옥상으로 가자. 옥상 열쇠가 있어.”
“네!”
알바생이 아이들을 살피다 가장 침착해 보이는 지수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119에 전화했던 아이가 아이들을 옥상 계단으로 이동시켰다. 열쇠를 건네받은 지수가 불안한 눈으로 알바생을 바라보았다.
“언니는요?”
“CCTV로 보니까 노래방에는 손님이 없던데, 화장실에 손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너희 먼저 올라가.”
지수는 가지고 있던 휴지를 적셔 입을 가리고,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알바생에게 건넸다. 물에 흠뻑 젖은 손수건에 알바생은 아차 싶었다. 너무 급해서 입과 코를 막는 것도 잊고 있었다.
“고마워.”
“조심하세요.”
“그래. 너희도 넘어지지 말고.”
지수와 지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연기에 아이들은 입을 꼭 막은 체 계단을 올랐다.
“열쇠가 없다고?”
“옥상 문을 잠가놓으면 어떻게 해!”
비상문 앞에서 이 건물 안 가게에 들렀던 손님들이 화를 내고 있었다.
“열쇠 있어요!”
지수가 열쇠를 들어 보였다. 어른들이 얼른 자리를 비켜주자 지수가 옥상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연기를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에게 밀려들었다. 하지만 곧 그 바람 속에 섞인 탄 내를 느꼈다.
사람들이 모두 옥상에 올라오자 누군가 말했다.
“연기가 올라올 것 같은데 문 닫아야 하지 않아?”
누군가의 말이 아이들이 외쳤다.
“아직 누나가 안 왔어요!”
“안 돼요!”
아이들의 커다란 목소리에 그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불이 난 층의 창문을 통해서 빠져나온 검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옥상으로 대피한 사람들이 연기를 피해 움직였다. 누군가는 가족들에게, 누군가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안도의 울음소리와 구해달라는 애타는 목소리가 옥상에 가득 찼다.
지수와 친구들도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전화를 걸면서 알바생을 기다렸다.
“왜 안 오지?”
“그러게.”
초조한 눈빛으로 계단만 바라보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언니!”
지수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알바생이었다. 기운이 빠진 알바생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얼굴에 미소가 떠 있었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더라.”
“다행이에요!”
아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몇 분도 되지 않아, 시끄러운 비상벨 소리 덮고, 시꺼먼 연기를 뚫고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화염보다 새빨간, 모두를 구하러 달려온 소방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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